86화
F구역 중심 지역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곽 지대.
블랙 스컬은 그곳의 신흥 강자로 급부상했다.
그들은 그동안 여섯 개 구역을 점거했고, 세력도 엄청나게 불렸다.
전부 정도현의 원조 덕이었다.
길드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장비 아이템과 회복 포션을 지원해 준다.
그러니 던전 공략도 아주 수월했다.
길드원들은 레벨을 올리고 블랙 스컬은 돈을 쭉쭉 벌어들였다.
“보호세도 조금만 가져가면서 어떻게 길드가 저리 잘 돌아가나 몰라.”
“그러게.”
“우리야 좋지 뭐.”
주민들 사이에선 칭찬 일색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모인 길드여도 하는 짓은 일반 길드랑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자경단처럼 주민들을 지켜 주고 크고 작은 분쟁들도 원만하게 해결해 줬다.
원래는 관리국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런 외곽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부 정도현의 지침 덕분이었다.
“착하게 사니까 좀 뿌듯한 거 같아. 살맛 난달까?”
“그렇습니다.”
블랙 스컬의 대표, 류동하는 부관 오예찬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처음에는 남을 돕고 사는 게 낯간지럽고 불만스러웠다.
이득을 포기하고 호구처럼 살라니.
하지만 정도현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마음이 바뀌었다.
류동하는 창밖을 보았다.
길거리에 아이들이 깔깔대며 뛰놀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풍경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저렇게 놀 시간에 공장 같은 곳에서 노동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고 있었겠지.
“애들은 저러고 사는 게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걸 못 누리고 살잖아.”
“그렇죠.”
“정도현, 그 녀석 마음도 이제 좀 이해가 가.”
아이들이 걱정 없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면 마음이 포근해졌다.
보호세 좀 덜 거두고 신경 써서 보호해 준 게 전분데 삶이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야, 방금 한 말 진심이야?”
“……!”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류동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오예찬은 소설 속에 나오는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정도현이었다.
“도, 도현 님? 아이고! 연락도 없이 웬일로 오셨습니까?”
류동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쭉 둘러봤는데 동네 분위기 괜찮더라? 블랙 스컬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내가 하라는 대로 잘했나 보네.”
“아유, 그럼요! 최선을 다했습죠!”
안 그럼 내가 뒈지잖아.
류동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헤헤 웃었다.
그러자 정도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잘해 줬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문제요?”
“해방단 간부가 곧 널 죽이러 올 거다.”
“…예? 저를요? 왜요?”
“너희가 점거한 구역의 조직들이 해방단이랑 엮여 있었어. 그놈들한테 상납금을 바치고 있었다나?”
“아…….”
그제야 류동하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낯빛이 창백해졌다.
오예찬은 조금이나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 간부, 레벨이 몇이나 됩니까?”
“91.”
골리앗의 레벨을 듣자 오예찬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정도 레벨이면 블랙 스컬의 힘으론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
못 보던 사이에 정도현의 레벨도 엄청나게 올랐지만, 아직 91레벨이랑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류동하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질문했다.
“아, 씨… 이거 좇됐네. 야, 오예찬. 우리 이제 어쩌면 좋냐?”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왔잖아.”
정도현의 발언에 둘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류동하가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뭘 어쩌시게요?”
“어쩌긴. 놈을 처리해야지.”
“싸운다고요? 91레벨인데?”
류동하는 자살 행위라며 뜯어말렸다.
하지만 정도현이 고갤 저었다.
“걱정하지 마. 나 혼자 싸울 거야. 너흰 주민들 대피에만 신경 써.”
“호, 혼자서요?”
“너무 무모합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이번엔 제대로 미쳤다. 류동하는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오예찬도 언성을 높이며 반대하자 정도현이 현실을 짚어 줬다.
“너희들이 합세한다고 뭐, 달라지겠냐?”
무려 91레벨이다.
40, 50레벨대 길드원들은 나서 봤자 떼죽음만 당할 터.
그건 전투도 전략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죽으라고 등 떠미는 꼴이지.
정도현의 지적에 오예찬도 할 말이 없는지 조용해졌다.
“그, 그래도… 저희가 뭐 도울 만한 게 없겠습니까?”
“류동하, 네가 웬일이냐?”
“아, 아무리 제가 쓰레기처럼 살았어도… 최소한의 의리는 있습니다!”
정도현이 자길 버리지 않고 도와주러 와 줬다. 그런데 마냥 뒤에 숨어 있으면 되겠는가?
뭐라도 거들어야지.
어차피 골리앗을 막지 못하면 지금껏 쌓은 걸 전부 해방단한테 뺏길 텐데.
“류동하, 너 진짜 사람 됐구나?”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저 지금 진지하다고요!”
“저도 돕고 싶습니다.”
둘의 충성심에 정도현은 히죽 웃었다.
“괜찮아. 비장의 카드를 준비해 왔으니까.”
“비장의 카드요?”
“이거.”
정도현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걸 본 류동하가 고갤 갸웃했다.
“이 알사탕 같은 건 대체 뭡니까?”
“효과를 읽어 봐.”
“효과요?”
“……!”
눈치 빠른 오예찬은 이미 아이템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곤 입을 쩍 벌렸다.
뒤늦게 확인한 류동하도 반쯤 얼이 빠졌다.
“상점창에서 이런 사기 템도 팝니까?”
“아니, 이건 다른 플레이어가 만들어 준 거야.”
“만들었다고요?”
“이런 걸 만들 정도면 고레벨 연금술사일 텐데.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연금술사 아니야. 고레벨은 더더욱 아니고. 이제 40레벨 정도야.”
40레벨밖에 안 된 플레이어가 이런 아이템을 만들어 냈다고?
오예찬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씩 웃었다.
“개인 특성이군요?”
“정답.”
“그런 인재를 찾아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늘이 돕는군요.”
“설레발치지 마. 이걸 써도 무조건 이긴단 보장은 없으니까.”
정도현이 웬일로 약한 소릴 했다.
그러자 오예찬도 식은땀을 흘리며 고갤 끄덕였다.
“확실히… 약효가 끝날 때까지 못 죽이면 페널티 때문에 역으로 당하겠군요.”
* * *
다음 날 늦은 새벽, 골리앗이 F구역에 나타났단 보고가 들어왔다.
한규리가 놈의 얼굴을 세세히 그려 준 덕분에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블랙 스컬은 골리앗이 뜨자마자 도시 주민들을 지하 방공호로 대피시켰다.
다른 길드나 갱단이었다면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 어려웠겠지만, 블랙 스컬의 지시엔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줬다.
“대피 상황은?”
[한 명도 빠짐없이 대피했습니다.]
“좋아. 주민들 불안해하지 않게 잘 챙겨 주고.”
[예, 이쪽 걱정은 마시고 꼭 이기십쇼.]
“그래, 끊는다. 그놈 왔어.”
정도현은 통화를 끊고 아지트 정문을 바라봤다.
밖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
걸음걸이에 여유가 느껴진다.
도시 전체가 텅 빈 걸 알면서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물러나거나 머뭇거릴 텐데.
골리앗은 정반대였다.
‘그만큼 제 실력에 자신 있단 거겠지.’
끼이익-!
정문이 열리며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키는 2m가 넘었고 온몸엔 근육이 꽉 차 있었다.
정도현은 늦게 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 골리앗.”
“…정도현?”
골리앗도 정도현을 한눈에 알아봤다.
퍼펫이 당했을 무렵, 한규리의 보고로 그의 이름과 얼굴이 간부들 사이에 알려졌으니까.
“너였나? 블랙 스컬을 지원해 준 녀석이?”
스릉-!
정도현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그는 시작부터 +15강 아이템들로 무장했다. 평소처럼 여유 부릴 상대가 아니니까.
범상치 않은 개인 장비의 자태에 골리앗이 눈썹을 꿈틀했다.
“레어는 아닌 것 같고. 전부 에픽 등급인가?”
골리앗이 피식 웃었다.
정도현의 레벨은 고작 77.
아무리 에픽 아이템으로 무장했다 한들 자신을 어찌할 순 없다.
“길드 지원에 개인 장비까지. 돈이 꽤 많아 보이는데, 혹시 상위 구역의 사생아라도 되나?”
“…사생아?”
“그래, 어디 돈 많은 양반이 몰래 숨겨 둔 자식 같은 거 말이야. 최근에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돈을 지원받은 거 아닌가?”
정도현은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태어나자마자 F구역에 버려졌으니까.
“미안한데, 난 F구역 출신이다.”
“그럼 그 아이템들은 다 어디서 구했지?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말이야.”
정도현은 부정했지만 골리앗은 반쯤 확신했다. 그가 부유한 집안의 사생아임을.
정도현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안 믿을 거면 왜 물어본 건데?”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정도현, 해방단에 들어와라.”
정도현을 영입하면 자금난도 어느 정도 해결될 거다.
정도현은 개인 장비만 좋은 게 아니다.
블랙 스컬에 각종 아이템을 원조해 준 것도 그였다.
정도현 위에 누가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거물일 터.
“싫다면?”
“맹약을 맺을 때까지 두들겨 맞겠지.”
골리앗이 허연 이를 씩 드러내며 위협했다. 정도현은 그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골리앗이 피식 웃었다.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군.”
쿵-!
골리앗은 발을 크게 한 번 굴렸다.
그러자 작은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길드 아지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평범한 70레벨대 플레이어였으면 충격파에 균형을 잃거나 휘청댔을 것이다.
하지만 정도현은 똑바로 서 있었다.
그걸 본 골리앗이 재밌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딴 놈들보단 좀 낫군.”
“계속 떠들기만 할 거야?”
정도현이 도발하듯 검을 까딱거렸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골리앗이 포탄처럼 날아온다.
정도현은 천뢰격을 생성해 상대의 주먹을 막았다.
터어엉-!
충돌하자마자 몸이 뒤로 쭉 밀렸다.
카가각!
거친 마찰음과 함께 겨우 멈췄다. 주먹 한 방에 몇 미터나 날아갔다.
‘역시 만만치 않아.’
휘익-!
정도현이 일격을 버텨 내자 골리앗은 칭찬의 의미로 휘파람을 불었다.
“반응 좋은데? 맷집도 나쁘지 않고.”
골리앗의 칭찬에도 정도현은 기쁘지 않았다.
‘천뢰격에 별 반응이 없네. 무식하게 튼튼하군.’
파직, 파지직!
검기에서 스파크 소리가 튀자 골리앗이 신기하단 눈으로 쳐다봤다.
“심법도 익혔나? 뇌 속성이라, 어느 가문인지 대충 알 것 같군.”
“…가문?”
“모르는 척할 필요 없다. 아니지, 가문의 이름은 입에 담지 말란 맹약이라도 맺은 건가?”
골리앗이 제멋대로 착각하고 떠들자 정도현은 검을 슬쩍 내렸다.
“인정할게.”
“…음?”
“지금 실력으론 못 이겨.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뭐야, 벌써 항복하는 건가? 생각보다 포기가 빠르군.”
몇 대 패 줘야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굴복했다.
골리앗은 전투를 좋아하지만, 불필요한 싸움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는 주의였다.
“그러니 쓸 수 있는 건 전부 다 쓸게.”
“……?”
정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양다윤한테 부탁해서 만든 도핑용 환약이었다.
[상급 도핑제 (환약)] [소모 아이템]
- 사용 조건: LV.70 이상
- 섭취 시, 10분간 모든 능력치가 300만큼 상승합니다.
- 단, 효력이 끝나면 24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300만큼 감소합니다.
- 다른 도핑제와 중복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까득-!
정도현이 환약을 씹어 삼켰다. 그러자 온몸에서 힘이 흘러넘쳤다.
‘10분 안에 쓰러트리지 못하면 역으로 내가 당한다.’
꽈악-!
정도현이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천뢰격이 훨씬 커지고 선명해지자 골리앗의 눈동자도 커졌다.
“너, 뭘 처먹은…….”
이번엔 정도현이 먼저 달려들었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참격. 골리앗은 정권을 내질러 받아쳤다.
“……!”
카앙-! 카가각!
골리앗이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당황한 그에게 천뢰격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