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던전에는 원숭이를 닮은 몬스터들이 득실댔다. 레벨은 70 초반대.
평소 같았으면 정도현 혼자서 다 쓸어 버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장비 템이 싹 다 노말 등급이라 능력치가 확 떨어졌고, 마력 억제 팔찌까지 찬 탓에 검기의 날카로움도 죽었다.
마치 두어 달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느낌.
‘확실히 어렵네.’
서걱! 촤악!
정도현은 덤벼드는 원숭이를 베어 넘기며 모처럼 위기감을 느꼈다.
대신 확실히 이전보다 경험치가 더 많이 들어온다.
고통 없이 성장할 수 없다.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쓸어버렸을 때보다 경험치를 좀 더 얻은 것 같은데?’
무작정 많이 죽인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이 간단한 걸 몰라서 여태 경험치 손해를 봤다니. 속이 쓰렸다.
정도현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잡으려 열심히 발을 놀렸다.
서걱-!
푸른 검광이 번뜩이며 원숭이가 피를 쏟았다.
위력이 약해진 탓에 급소를 베이고도 끈질기게 반격해 왔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한 방에 못 죽이면 죽을 때까지 패면 그만이야.’
그는 간만에 초심으로 돌아왔다. 차츰 쌓여 가는 경험치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저 녀석…….”
“혼자 다섯 마리를 처치했어?”
파티원들은 정도현의 성과에 눈을 의심했다.
별 볼 일 없는 장비 템. 이 중에서 가장 낮은 레벨.
모자란 인원수나 채울 생각으로 데려왔는데 예상을 뒤엎고 선전했다.
그는 첫 전투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다.
“멍청하긴, 처음부터 저렇게 용 쓰면 나중에 어쩌려고.”
“…페이스 조절 실패한 거지?”
“우리한테 무시당해서 화 잔뜩 났나 본데.”
정도현한테 밀린 걸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파티장의 비난에 파티원들도 마치 변명하듯 맞장구쳐 줬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정도현은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았으니까.
마라톤으로 비유하면 시작부터 전력 질주를 뛴 꼴.
“허억, 헉…….”
교전이 끝나자 정도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저렇게 계속 싸웠다간 얼마 못 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리라.
“5분간 휴식.”
파티장의 지시에 다들 적당한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털썩 주저앉은 정도현이 물통을 꺼내 내용물을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파티원들이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물 좀 마신다고 바로 회복이 되겠냐.’
‘저런 머저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지?’
하지만 파티원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정도현이 물통에 가득 채워 온 건 물이 아니라 중급 회복 포션이라는 걸.
체력, 마력 회복 포션을 수십 개나 섞어서 담아 뒀다.
몇 모금 마시니 소모된 체력과 마력이 빠르게 차올랐다.
덕분에 그는 휴식 시간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일어설 수 있었다.
저들끼리 실실 웃으며 잡담하던 파티원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야?’
‘호흡이 벌써 돌아왔어?’
전신에서 활력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몇 분 전에 지쳐 있던 그와 동일 인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정도현은 눈빛으로 파티원들을 재촉했다. 빨리 출발하자고.
그런 행동이 파티장의 자존심을 확 긁었다.
‘밑구역에서 올라온 떨거지가 시건방지게.’
파티원들도 그에게 지긴 싫은지 하나둘 일어났다.
수준 차이를 보여 줘야 못 까불겠지.
“가자.”
파티장이 고갯짓으로 출발 지시를 내렸다.
* * *
그 후로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
필사적으로 사냥하는 정도현 때문일까.
파티원들도 경쟁심에 취해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녹초가 된 정도현은 몇 분 쉬면 금세 쌩쌩해졌다.
이제 파티원들도 슬슬 힘들어서 숨이 차는데 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저놈만 멀쩡하냐고!’
정도현의 경이로운 회복력에 그들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휴식 중이던 파티원들에게 정도현이 다가왔다.
의무 방어전을 앞둔 유부남도 이런 피로감과 두려움을 느낄까.
“시간 다 됐는데 출발 안 하십니까?”
“…5분 더 쉬었다 갈 거야. 괜히 서두르다 사고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래?”
파티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딴엔 자존심을 지키려 이유를 댔지만, 오히려 핑계처럼 느껴져 추해 보였다.
정도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많이 힘드신 것 같으니 더 쉬었다 가시죠.”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앉는다.
저 여유로운 태도가 너무 얄밉게 느껴졌다.
파티장과 파티원들이 속으로 부들거릴 때.
“……?”
스릉-!
자리에 앉았던 정도현이 벌떡 일어서더니 검을 반쯤 뽑았다.
그의 돌발 행동에 파티원들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뭐, 뭐야?”
“저 새끼 갑자기 왜 저래?”
정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본인들이 지나왔던 통로를 쳐다봤다.
다수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뛰어온다.
발소리가 점차 커지자 파티원들도 그제야 눈치챘다.
“…발소리지?”
“우리 몬스터 놓쳤었나?”
“병신아, 통로가 일직선이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그럼 설마…….”
던전에 불청객이 난입했다. 그거 말곤 없었다.
남이 공략하는 던전에 기어들어 오다니.
불순한 의도가 물씬 느껴진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파티원들이 욕설을 뱉으며 무기를 쥐었다.
곧이어 열 명 언저리쯤 되는 괴한들이 나타났다.
‘미친.’
그들의 레벨을 본 파티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의 평균 레벨은 70 수준인데, 저쪽은 전원 75레벨이 넘었다.
게다가 가장 높은 사람은 무려 78레벨이었다.
‘아예 상대가 안 되잖아.’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졌다.
괴한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도 그 점을 눈치챘는지 비릿하게 웃었다.
“이봐, 너희들. 이런 데서 다 같이 뒈지긴 싫지?”
78레벨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파티원들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 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판단하기 어려웠다.
‘우릴 죽이러 온 게 아닌가?’
그들을 죽이러 온 척살대라면 저런 얘길 꺼낼 필요도 없었다.
파티장이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척살대의 대장은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그는 파티원들에게 친절히 설명해 줬다.
“우린 정도현 저 녀석을 죽이러 왔어. 너흰 타깃이 아니지.”
“……!”
“그, 그럼 저흰 살려 주는 겁니까?”
“그래, 너희까지 다 죽이면 관리국이 수상쩍게 여길 거 아냐.”
그 말에 파티원들도 어느 정도 동감했다.
일반 던전에서 사상자가 한둘쯤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몰살당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우린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파티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정도현은 저들에게 죽겠지만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
전투 중에 무리하다 죽었다는 식으로 관리국에 보고하면 되겠지.
“너희가 그 녀석을 죽여. 그럼 살려 줄게.”
남자가 정도현을 지목하며 파티원들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파티원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정도현에게 무기를 겨눴다.
정도현이 내심 못마땅했던 파티장은 아예 미소까지 지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거, 미안하게 됐다? 근데 우리도 살려면 어쩔 수가 없어.”
“이해합니다.”
“뭐?”
그의 대답에 파티원은 물론이고 척살대도 어리둥절했다.
이런 상황에선 욕을 뱉거나 제발 살려 달라고 비는 게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그런데 저리 태평하다니.
정도현이 이어서 말했다.
“다 살려고 그러는 건데, 그럴 수도 있죠.”
정도현은 마력 억제용 팔찌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꽉 막혀 있던 체내의 마력이 서서히 흘렀다.
“그러니 제가 하는 짓도 이해해 주세요.”
“뭐…….”
촤악-!
정도현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파티장은 황급히 막았지만 반응이 조금 늦었다.
주룩.
파티장의 뺨에 빨간 핏줄기가 흘렀다.
정도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몰아붙였다.
채재재쟁-!
파티장은 그저 막아 내는 데 급급했다.
“…크윽!”
정도현이 갑자기 빠르고 강해졌다.
자신보다 레벨도 낮은데 밀린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파티장은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
촤악-!
파티장의 목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겼다. 거기서 피가 콸콸 쏟아지며 풀썩 쓰러졌다.
“대, 대장!”
“이 새끼가!”
파티원들이 분개하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들의 합공에도 정도현은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그의 행동은 단순했다. 공격을 막거나 흘려 낸 뒤 역공을 꾀한다.
서걱! 촤좌좍!
주위에 시체와 핏자국이 하나둘 늘어났다.
“오, 저놈 봐라?”
척살대의 대표, 사냥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역으로 파티원들이 당할 줄이야.
레벨이 낮아서 별것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사냥개의 눈동자에 작은 희열이 피어났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투두둑.
정도현은 칼날에 맺힌 붉은 이슬을 털어 내곤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러곤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을 향해 검을 겨눈 뒤 말했다.
“뭐 해? 안 덤비고.”
“푸하핫!”
정도현의 당돌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냥개가 웃음보를 빵 터트렸다.
혼자서 파티원 다섯을 쓰러트린 실력.
자신감이 넘칠 만했다.
‘그래도 우리한테 저러는 건 선을 넘었지.’
사냥개는 부하들에게 턱짓으로 지시했다. 놈을 처치하라고.
칼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만 그가 나설 수준까진 아니었다.
놈이 발버둥 치는 모습이나 구경해야겠다. 사냥개는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파바밧-!
사냥개의 명령에 척살대가 산개하며 정도현을 포위했다.
흉기가 그의 급소를 노리며 일제히 쏟아진다.
채앵! 채재쟁!
난잡한 칼부림이 벌어졌다.
예상대로 정도현은 그물망에 걸린 물고기처럼 서서히 수세에 몰렸다.
공격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쯧, 하여튼 입만 산 놈들이 많다니까.”
척살대의 대표가 실망스럽단 표정으로 중얼댔다.
사실 67레벨이 75레벨 다수를 상대로 저렇게 버티는 게 엄청난 거였다.
그래도 뭔가 더 보여 주지 않을까 했는데. 이대로면 곧 죽겠군.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쩌엉-! 쿠당탕!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척살대 한 명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사냥개가 눈을 부릅떴다.
“…뭐야?”
쩌엉! 쩡!
다른 대원 두 명도 똑같이 밀려나 꼴사납게 땅바닥을 굴렀다.
내상을 입었는지 쓰러진 이들이 쿨럭거리며 피를 뱉었다.
사냥개가 멍한 눈으로 정도현의 무기를 쳐다봤다.
‘무기를 바꿨어?’
한 번만 실수해도 골로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힘을 아끼고 있었다니.
그렇게 한 이유가 뭔진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캉! 까앙! 카가각-!
척살대 단원들은 이제 정도현의 검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다.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균형을 잃고 휘청대거나 메마른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다 비켜!”
타앙-!
부하들만으론 안 된다. 사냥개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정도현은 척살대들을 멀리 밀쳐 낸 뒤 돌진해 오는 사냥개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까아앙-!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며 폭탄이라도 터진 듯 강렬한 충격파가 퍼졌다.
“이런 무길 감추고 있었어?”
끼기긱!
사냥개와 정도현이 팽팽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무기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정도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무기길래 이렇게나 강해진단 말인가.
사냥개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정도현의 무기 정보를 살펴봤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에픽 등급, +15강?”
아이템 등급은 둘째 치고 강화 수치가 다른 플레이어들이랑 궤를 달리했다.
직접 보고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스스스.
그때, 정도현의 검기가 서서히 흐릿해진다. 마력이 거의 다한 것이다.
검기가 약해지자 힘의 균형이 시소처럼 서서히 한쪽으로 쏠렸다.
“마력이 다 떨어지셨네?”
채재재쟁-!
사냥개가 마구 검을 휘두르며 밀어붙였다. 조소와 함께 날아오는 참격들.
정도현은 착실히 막아 냈지만 점차 뒤로 밀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쓰러졌던 척살대 대원들도 하나둘씩 일어났다.
그들은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돌며 기회를 엿봤다.
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사냥개가 그렇게 확신했을 때.
정도현이 너무 아쉽단 표정으로 중얼댔다.
“아, 경험치 아까운데.”
“뭐?”
정도현의 빈약한 보호구가 하나둘 바뀌었다.
본래 장비를 착용한 그는 곧 꺼질 것처럼 흐릿한 검기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아까랑 정반대의 결과가 펼쳐졌다.
“…커헉!?”
촤아악-!
사냥개가 신음을 뱉으며 쭉 밀려났다.
그는 순간 팔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 광경에 주변에서 얼쩡대던 대원들이 주춤했다.
정도현은 그들에게도 가볍게 칼을 뻗어 한 대씩 후려쳤다.
쩌엉-!
일격에 무기를 놓치고 땅바닥에 처박힌다.
마력 부족으로 불안정해진 검기가 상태 멀쩡한 그들의 검기를 쉽게 박살 낸다.
“이, 이게 무슨…….”
정도현이 부하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이쪽으로 유유히 걸어온다.
사냥개가 덜덜 떨었다.
놈은 무기만 숨겼던 게 아니었다. 방어구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힘을 왜 숨기고 지랄이야…….”
저렇게 좋은 장비가 있었으면 왜 처음부터 안 꺼내냐고.
사냥개는 그렇게 말하며 피를 왈칵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