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정도현은 음식들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댔다.
조세아가 알려 준 진실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진 탓이다.
‘레벨에 비해 너무 강해진 게 문제가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발목을 잡혔다. 물론 해결법은 간단하다.
지금 사냥하는 것들보다 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를 잡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 최소한 80레벨대 이상의 던전에 들어가야만 하는데. 날 끼워 줄 리 없지.’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기엔 자살 행위로 비칠 터.
그러니 상위 던전에 들어가는 건 현실성이 없었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정도현이 한숨을 푹 쉬자, 조세아가 손가락을 꼬물대며 말했다.
“그…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욘 없지 않을까?”
“왜?”
“솔직히 레벨업이란 게 원래 고된 거잖아. 너무 조급한 거 아닐까 싶어서…….”
그녀는 식사하면서 정도현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다 언제 각성했는지도 물어봤었다.
솔직하게 답해 주니 그녀는 경악했다.
F구역 출신에다 각성한 지 반년도 안 됐는데 66레벨이라니.
조세아는 플레이어가 된 지 4년이 훌쩍 넘었다.
설렁설렁 하긴 했어도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도 이수했다. 그런데도 추월당한 것이다.
그녀 기준에서 정도현의 성장 속도는 기적이란 말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정도현 본인은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꼭 시험 문제 하나 틀렸다고 우울해하는 우등생 같아.’
아카데미든 일반 학교든 그런 애가 하나쯤 꼭 있었다.
그런 애를 볼 땐 우릴 기만하는 것 같아서 얄밉게 느껴졌는데, 정도현이 저러고 있으니 뭐랄까, 마음이 촉촉해졌다.
그를 위로해 주고 싶다.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가슴이 갑갑했다.
이렇게 애달픈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녀의 위로에 정도현은 피식 웃었다.
“내 욕심이 너무 과하다?”
“아, 아냐!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사실 그녀의 조언은 정확했다.
1원 상점이 없었으면 그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진 못했을 테니까.
‘평생 E구역에 머물렀거나 벌써 죽었겠지.’
“답답해서 그래. 힘은 충분한데 그걸 풀 곳이 없으니까.”
“으응, 나도 그 마음 알 것 같아.”
“네가?”
조세아가 공감하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자 정도현이 의외란 눈으로 쳐다봤다.
“으, 그게… 아카데미 학생일 때 종종 사고를 치고 다녀서…….”
그녀는 불량한 학생들과 자주 어울렸었다.
그러다 종종 사고 치면 외출 금지나 카드를 정지당했었다.
돈은 있는데 밖에 나가서 펑펑 쓰질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녀의 경험담에 정도현은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다.
“자랑이다.”
“아, 앞으론 안 그럴 거거든?”
“입으로만 그러지 말고 행동으로 좀 보여 봐.”
“두고 봐. 나 진짜 달라질 거니까.”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며 삐약거렸다.
슬슬 메인 요리를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달그락.
조세아가 돌연 포크를 떨궜다.
“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뭐?”
“오빠 고민 해결할 방법.”
정도현이 눈을 반짝였다.
오랫동안 안 입고 처박아 둔 옷을 정리하다 지폐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정도현의 기대감 섞인 눈빛에 그녀가 우쭐대는 표정을 지었다.
“알려 주는 대신, 부탁 하나 들어줘.”
“또 뭔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조세아가 또 뭔가를 바랐다.
정도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어려운 부탁 아니야. 다음에도 시간 되면 이렇게 만나서 어울려 줘.”
“…또?”
“노골적으로 귀찮단 표정 짓지 마.”
조세아가 팔짱을 딱 끼며 그를 째려봤다. 그는 속으로 뜨끔했다.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에 던전 하나 더 도는 게 이득 아닐까.
방금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왜 굳이 날 만나려는 건데?”
“응?”
“같이 놀 친구나 지인 정돈 있을 거 아냐.”
“…….”
그 말에 조세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도현은 설마 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같이 놀 친구 없어?”
“…응, 없어.”
그저 돈줄 취급에, 그저 잘 보이려 아첨하고 뒤에서 욕하는 녀석들이라면 차고 넘치지만.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학창 시절에 데였던 경험담을 말했다.
그녀는 마음을 터놓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친구인 척 굴며 그녀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만 득실댔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질렸다.
정도현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히 대화하는 게 얼마 만이던가.
“…알았어. 시간 되면 어울려 줄게.”
“진짜? 분명 약속했어. 나중에 발뺌하면 안 돼?”
“알겠으니까 일단 얘기해 봐. 대신 별 도움 안 되는 얘기면 없던 거로 할 거야.”
조세아는 아주 자신만만한 얼굴로 해결책을 설명했다.
“던전에서 마법 지팡이 압수당했던 거 기억하지?”
“아, 개념 없이 굴다가 권유담 씨한테 혼난 거?”
“…예, 그래요. 그땐 개념이 아예 없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알면 됐어.”
흑역사를 까발리자 그녀가 무안한지 진저리를 쳤다.
정도현은 됐으니까 계속 얘기해 보라 손짓했다.
“오빠도 나처럼 해 봐.”
“뭘? 무개념처럼 행동하라고?”
“아니, 그거 말고! 무기를 바꿔 보라고.”
“……!”
무기를 바꿔라. 그 말에 정도현의 눈이 커졌다.
그가 사용하는 장비 템들은 에픽 등급이다. 거기에 무려 +15강까지 해 둔 상태.
그러니 비슷한 레벨대는 물론이고, 10레벨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가 덤벼도 눈 하나 꿈쩍 안 했었다.
그런 사기 템들을 장착하지 않으면 그의 능력치도 확 떨어질 터.
‘그럼 전투도 그만큼 빡빡해지겠지.’
조세아는 그냥 무기만 바꾸라고 말했지만, 정도현은 거기서 몇 술 더 떴다.
장비 템을 노말 등급으로 싹 바꿔 끼는 거다.
단순 무식하고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그만큼 효과적일 터.
활로를 찾은 정도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에게 도움이 됐단 생각에 조세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정도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고민이 풀렸어.”
“자, 다 먹었으면 백화점으로 가자.”
“…백화점?”
“오빠 옷 좀 사 주려고.”
조세아가 정도현의 차림새를 쭉 훑어봤다.
그에겐 무난한 평상복이지만 재벌가 아가씨 눈에는 너무 단출했다.
정도현이 썩 내켜 하지 않자 그녀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 줄 거니까 오빠는 몸만 와.”
그녀가 정도현의 손을 붙잡으며 반쯤 강제로 끌고 갔다.
정도현은 별수 없이 따라갔다.
그녀가 해 준 조언들엔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밥 한 끼 대접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조세아는 평소 자주 들르는 백화점에 들렀다.
그녀가 옆에 웬 남자를 데리고 오자 백화점 직원들이 술렁댔다.
짐꾼으로 데리고 다니는 수행원이나 전속 호위인 권유담 부팀장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렇다고 권유담 대타로 붙은 호위 같지도 않았다.
호위였다면 저렇게 손을 잡고 걷지는 않을 테니까.
언뜻 보면 귀찮아하는 남자를 그녀가 질질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설마 남자친구인가?”
“에이.”
직원들은 정도현을 보면서 그럴 리 없다고 여겼다.
조세아가 성질이 더럽긴 해도 그 외엔 뭐 부족한 게 없었다.
외모, 재력, 좋은 집안. 거기다 플레이어였다.
그런 그녀가 뭐 아쉽다고 저리 평범한 남자랑 사귀겠는가.
게다가 그녀에겐 약혼자도 있지 않던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던 직원들은 그녀의 행동에 점차 의혹을 품었다.
“음. 이것도 어울리고, 요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는 정도현을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듯 옷을 갈아입혔다.
덕분에 직원들은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남성용 의복을 챙겨 왔다.
“오빠는 둘 중 어떤 게 마음에 들어?”
“몰라. 그냥 비슷한 거 같은데.”
“그래? 그럼 전부 살까.”
“……?”
정도현이 대충 아무거나 사라고 하자, 그녀는 한 번씩 입어 본 옷들을 전부 가리켜 포장해 달라 말했다.
그녀의 행동에 정도현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경악했다.
자기가 입을 옷도 아닌데, 저리 돈을 쓴다니. 백화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 진짜 남자친구인가 봐!’
‘대박.’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보다.
봐라, 저 행복에 찬 미소를.
예쁘면 뭘 해도 용서가 된다더니.
그녀의 갑질에 자주 시달렸던 직원들마저도 절로 그녀를 응원하게 되었다.
‘근데 남자 반응이 너무 시큰둥한 거 아냐?’
‘그러게.’
정작 선물 공세를 당한 당사자는 무덤덤했다. 누가 보면 마네킹인 줄 알겠네.
그래도 옷이 날개라고.
저렇게 차려입으니 둘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정도현이 환복하러 탈의실에 들어가자, 눈치 빠른 직원이 조세아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아부했다.
“방금 입어 본 옷들 저분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아가씨가 잘 고르신 것 같아요.”
“그치? 역시 내 안목은 정확하다니까.”
“그런데 저분은… 남자친구신가요?”
그러자 조세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는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그냥 친군데… 근데 그렇게 보였어?”
그녀가 쑥스럽단 얼굴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오해받은 게 그리 싫지는 않아 보인다.
직원들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었다.
하지만 어떤 직원은 슬쩍 물러나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로 문자를 보냈다.
[조세아가 웬 남자랑 있다고?]
- 예.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그놈 사진 찍어서 보내 봐.]
- 예.
그 직원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도현을 몰래 촬영해 전송했다.
* * *
지잉-!
정도현과 조세아가 함께 있는 사진들이 누군가의 휴대폰으로 전송됐다.
그걸 보더니 어떤 남자가 혀를 찼다.
“이 자식, 대체 누구야? 못 보던 놈인데.”
“한번 알아볼까요?”
“그래.”
남자는 불쾌했다.
조세아가 이리 해맑게 웃을 수 있는지 그는 처음 알았다.
‘나랑 있을 땐 인상만 쓰더니, 이런 놈의 어디가 좋다고?’
남자의 이름은 ‘서찬희’.
‘스미스 공방’ 일가의 장남이자 조세아의 약혼자였다.
물론 조세아가 원해서 맺어진 건 아니었다.
당사자들이 어릴 때 일가의 어른들이 멋대로 정했다.
그녀는 서찬희에게 별 감정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했었다.
지금껏 그녀의 환심을 얻으려고 무진장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평소에 남자한테 전혀 관심 없길래 안심했더니…….’
그녀에게 웬 벌레가 들러붙었다.
더 짜증 나는 건 그리 대단한 놈 같지도 않았다.
대체 저런 놈의 어디가 좋다고 저리 헤실대는 걸까.
자존심이 짓밟힌 깡통처럼 팍 찌그러졌다.
“신원 조회했습니다. 이름 정도현, 최근 D구역으로 이주해 온 플레이어입니다.”
“이주? 그럼 E구역 놈이란 말이야?”
“아뇨, F구역 태생입니다.”
“하, 참나. 어이가 없네.”
벌레인 줄 알았는데 벌레보다 못한 버러지였다. 서찬희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 놈이 어쩌다 세아랑 엮였어?”
“어제 조세아 아가씨가 들어간 폐쇄형 던전에 놈도 짐꾼으로 동행했습니다.”
“…짐꾼으로?”
조세아가 폐쇄형 던전에 갇혔던 건 그도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사히 생환했다길래 천만다행이라고 문자를 보내 봤지만 무시당했다.
“대충 알겠어. 그 녀석이 세아가 위험할 때 지켜 준 거야.”
“그래서 마음에 들어 한 걸까요?”
“그래 봬도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으니까. 호감을 느낀 건 확실해.”
툭, 툭.
서찬희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했다.
가만히 놔두면 자신과 그녀 사이에 파문을 일으킬지도 모를 놈이다.
‘제거해야 해.’
그렇다고 대놓고 암살해 버리면 조세아가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하겠지.
그녀를 적으로 삼는 건 곧 조원호 회장을 적으로 돌리는 짓.
그러니 증거를 남기지 않고 깔끔히 처리해야만 했다.
가령, 던전에서 사고사를 당했단 식으로 말이다.
‘F구역 버러지 따위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여잘 넘봐?’
용케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만 네놈의 운도 이제 다했다.
[처리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서찬희는 평소 애용하는 레드 플레이어, ‘사냥개’한테 문자를 보냈다.
짐꾼으로 들어갔었다니 무력은 별 볼 일 없겠지.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정도현은 조세아가 알려 준 방법을 실전에서 써 보기로 했다.
우선 노말 등급으로 장비 템을 싹 교체했다. 그것만으로도 줄어든 능력치가 체감됐다.
‘마력 억제구도 차야지.’
정도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원 상점에서 마력을 억제해 주는 장신구를 구매했다.
예전에 관리국 요원한테 연행될 때 마력 억제구를 잠깐 차 봤는데 효과가 끝내줬었다.
팔찌 형태의 억제구를 차자 체내의 마력 일부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몸이 무겁다.
‘좋아.’
이 정도로 능력치를 줄여 두면 경험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겠지.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게이트 발생지로 향했다.
아쉽게도 서아린은 곁에 없었다.
그녀는 박성원의 레벨업을 돕기 위해 E구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는 던전 브로커를 통해 임시 파티원들을 구했다.
“그쪽이 오늘 대타야?”
“예, 정도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게이트 앞에 임시 파티원들이 모여 있었다. 정도현이 인사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쯧, 템 꼬라지 봐라.”
“아래 구역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내 말이.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그들은 정도현의 비루한 장비 템을 살펴보곤 불만스럽게 구시렁댔다.
갑자기 결원이 발생해서 급히 고용했는데 너무 약해 보였다.
‘던전 브로커가 말한 대로네.’
길드가 없는 플레이어들은 저렇게 텃세를 부리거나 무시하는데, 무조건 참고 견뎌야만 했다.
간만에 F구역 시절이 떠올랐다.
정도현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히 나대다 다치지나 마라. 걸리적대면 그냥 버리고 갈 거니까.”
파티장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 * *
정도현과 플레이어들이 게이트를 통과하자, 근처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관리국 요원들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잠시 뒤, 웬 무리가 게이트 앞으로 다가왔다.
“자, 약속한 돈.”
무리의 대표, ‘사냥개’가 요원들한테 묵직한 돈 봉투를 챙겨 줬다.
요원들은 액수를 확인하곤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요원들이 비켜 주자 수상쩍은 무리는 눈치 볼 것 없이 던전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