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푹! 푸욱!
물고문을 끝마친 정도현이 쌍둥이 보스의 심장을 동시에 찔렀다.
보스들은 그대로 절명했고 탈출용 게이트가 열렸다.
“끄, 끝난 거야?”
“살았다! 으하핫! 살았다고!”
정말로 보스 두 마리를 쓰러트리고 생존했다니.
권유담과 길드원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멍하니 탈출용 게이트를 쳐다봤다.
몇몇은 너무 기뻐서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부상자부터 챙겨라!”
“아!”
“예, 알겠습니다!”
권유담이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고 길드원들에게 그리 지시했다.
길드원들도 허겁지겁 다친 동료들을 부축했다.
다행히 치명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부상자들 얼굴에도 웃음이 만연했다.
하긴,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어딘가.
“꼼짝없이 다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진짜 저 사람 정체가 뭐지?”
“…상위 구역에서 내려온 거 아냐?”
“에이, 그런 사람이 왜 짐꾼을 하겠어.”
“그래도 성수를 엄청 많이 갖고 있었잖아.”
“고위 사제의 자제분 아냐?”
“설마…….”
길드원들이 뒤에서 그렇게 속닥거릴 때, 권유담이 정도현한테 다가갔다.
공략대 대표로서 모두를 살려 준 은인에게 감사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도현 씨, 정말 감사합… 도현 씨?”
“…….”
권유담이 불러도 대꾸가 없었다.
정도현은 쌍둥이 악마들의 시체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도 어딘지 어둡고 심각해 보인다.
권유담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아직 끝난 게 아닌가?’
하지만 보스들은 분명 죽었다.
탈출용 게이트가 열린 게 그 증거.
그런데 왜 저리 심각하단 말인가?
권유담이 마른침을 삼키고 정도현의 어깨를 붙잡아 살짝 흔들었다.
“도현 씨, 괜찮으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네.”
“그, 그게 뭡니까?”
긴장해서 목소리가 절로 떨린다.
정도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보스를 두 마리나 잡았는데 레벨이 안 올랐어요.”
“…네?”
“예상보다 경험치가 너무 적게 들어왔다고요.”
파란 악마야 막타만 친 거라서 경험치가 적게 들어온 걸 수 있다.
하지만 빨간 악마는 그 혼자서 제압했다.
그러니 79레벨 보스가 주는 경험치를 독식한 셈. 그런데 그의 레벨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고작 그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셨던 겁니까?”
“고작 그거라뇨. 저한텐 엄청 중요하다고요.”
권유담이 허탈한 말투로 되묻자 정도현은 뚱한 얼굴로 투덜댔다.
아니, 물론 레벨업도 중요한 문제인 건 맞지만, 당장은 전원 생존했단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권유담은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람마다 관점은 전부 다른 법이니까.
‘도현 씨는 강해.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더.’
정도현한테 이 쌍둥이 보스는 그리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를 보고 있자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레벨이 안 오른 이유, 내가 알아.”
누군가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세아였다.
아까까지 훌쩍대느라 눈은 충혈됐고, 얼굴과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정도현은 그녀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말해 봐, 어디 들어나 보자.”
“대신 부탁이 있어.”
“…부탁?”
그녀가 뭔가를 요구하려 들자 정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애 건져다 살려 줬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란 격 아닌가.
그의 불만에 찬 눈초리에 조세아가 다급히 말했다.
“무, 무리한 부탁 아니야! 그냥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먹으며 얘기하고 싶어서…….”
“커피?”
“응. 대신 우리 둘이서만, 저 여자는 빼고.”
조세아는 마지막에 바짝 목소릴 낮췄다.
그러더니 부상자들을 돕고 있는 서아린 쪽을 흘끔 쳐다봤다.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긴 한데.’
그녀의 눈빛이 확신으로 찬 걸 봐선 그 이유를 명확히 아는 듯했다.
원인을 알아 두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정도현은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그래, 좋아.”
조세아가 해냈단 듯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도현은 덧붙여 말했다.
“대신 다른 얘긴 꺼내지도 마.”
“다, 다른 얘기 하면 안 돼? 왜?”
그가 그런 조건을 붙이자 조세아는 울상을 지었다.
반응이 너무 알기 쉬웠다.
아마 길드 영입 같은 이야길 꺼내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는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 * *
던전을 나가기 전, 서아린한테 말했다.
조세아랑 잠깐 따로 얘길 나누고 오겠다고.
그러자 서아린이 조세아를 째려봤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에 조세아는 덜덜 떨면서도 정도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신 궁금한 것만 알아내고 바로 나와요.”
서아린이 그렇게 말하곤 얌전히 물러났다.
탈출용 게이트를 통과하자 현실로 나왔다.
밖에는 관리국 요원들 말고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하나같이 피닉스 길드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무리는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며 생환자들을 찍어 댔다. 아무래도 기자들 같았다.
‘폐쇄형 던전인 거 알고 다들 몰려왔나.’
정도현이 그렇게 생각할 때.
피닉스 길드원들이 먼저 나온 생환자들을 붙잡고 캐물었다.
“세아 아가씨는요?”
“아가씨는 무사하신 겁니까!”
“아, 저깄다!”
조세아가 나오자 대기 중이던 피닉스 길드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괜찮냐는 질문 공세에 그녀는 갑갑하단 표정으로 대꾸했다.
“다친 곳 없으니까 다들 비켜 줘. 나 볼일 있어서 어디 좀 가 봐야 해.”
“아가씨, 그건 안 됩니다. 곧 회장님께서 오실 겁니다.”
“…뭐? 하, 할아버지가?”
“아가씨가 던전에 갇혔단 소식을 들으시더니 정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이에요.”
할아버지가 직접 온다는 말에 조세아가 움찔했다.
끼익-!
말 끝나기가 무섭게 시커멓고 길쭉한 리무진이 나타났다.
운전기사와 수행원이 내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백발의 노인이 내렸다.
길드원들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곤 급히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열었다.
노인이 조세아를 끌어안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우리 세아,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저, 전 괜찮아요.”
“폐쇄형 던전인지 뭔지 문제가 터졌다길래 부랴부랴 왔단다. 이 할애비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니? 일단 병원 가서 검진부터 받자.”
“아, 아뇨! 저 진짜 괜찮아요.”
조세아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조원호 회장은 그녀의 몰골이 지저분한 걸 알아채곤 고갤 돌려 버럭 소릴 질렀다.
“같이 들어갔던 길드원들은 대체 뭘 한 거냐? 널 지켜 주지도 않고 고생만 잔뜩 시키고 말이야!”
그의 역정에 권유담과 길드원들은 면목 없단 얼굴로 고갤 떨궜다.
길드원들은 조 회장의 갑질 앞에서 침묵했다.
그들이 피닉스 길드에 몸담은 주된 이유는 광명 기업이 설립한 병원에 자신들의 가족이 신세지고 있어서였으니까.
조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면 D구역 최고의 의료 시설에서 아픈 가족들이 쫓겨날 것이다.
“이 쓸모없는 것들!”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도 조원호 회장은 폭언을 퍼부었다.
그의 재력 앞에선 언론조차도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하, 할아버지, 됐어요. 그러지 마세요.”
조세아가 할아버지를 뜯어말렸다.
듣고 있으니 낯뜨거웠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도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보스와 싸우다 죽을 뻔한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녀가 애원하자 조원호 회장도 화가 좀 풀렸는지 언성을 낮췄다.
“크흠, 큼. 이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고… 일단 집에 돌아가 푹 쉬자꾸나.”
“잠깐만요.”
조원호 회장이 조세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차에 타기 전, 잠깐 기다려 달라 말한 뒤 권유담에게 뛰어갔다.
그녀는 그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곤 차로 되돌아갔다.
차에 타기 직전, 조세아는 미련 섞인 눈으로 정도현을 힐끔 바라봤다.
부웅-!
그녀를 태운 차량이 순식간에 현장을 빠져나갔다.
‘아직 이유 못 들었는데.’
레벨이 오르지 않은 이유를 꼭 듣고 싶었는데. 설마 조 회장이 직접 등판해 데려갈 줄이야.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실 때.
권유담이 그에게 다가와 뭔가를 슬쩍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아가씨의 개인 연락첩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알려 주시면 안 됩니다.”
아까 귓속말을 나눈 게 자기 연락처를 알려 주라고 한 건가.
정도현은 그에게 고맙다고 눈인사를 보냈다.
* * *
다음 날 아침, 정도현은 권유담이 알려 준 번호로 연락했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뚝 끊겼다.
[여보세요? 정도현?]
“어.”
[오늘 오후 1시에 만나자. 내가 주소 보낼 테니까 거기로 와 줘.]
뚝.
그녀는 속사포처럼 용건만 전하고 연락을 끊었다.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공주병이 다시 도진 걸까.
실상은 부끄러워서였지만 둔감한 정도현이 그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지잉-!
곧바로 문자가 왔다. 조세아가 보낸 주소였다.
“…응?”
약속 장소는 카페가 아닌 식당이었다.
그것도 D구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 레스토랑.
서아린이 같이 가 보고 싶다며 졸라 댔던 가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약하지 않은 고객은 이용할 수 없고, 그 예약도 보통 한 달 이상 기려야 했다.
‘집안이 빵빵해서 인생도 되게 편하게 사네.’
그나저나 커피 한 잔이 왜 식사 한 끼로 불어난 걸까.
‘알려 준다던 정보, 별것 아니기만 해 봐라.’
* * *
정도현은 약속 시각에 맞춰 가게에 도착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조세아가 그를 발견하곤 황급히 거울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의자를 뒤로 쭉 끌며 일어났다.
활짝 웃으며 반갑다며 손까지 흔든다.
“여기야, 여기!”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눈에 확 띄었다.
예쁘게 차려입은 건 둘째 치고, 가게 안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인데 이리 썰렁하다니.
누가 보면 오늘 영업 안 하는 줄 알겠다.
안쪽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발소리만 없었으면 정말 그렇게 착각했을지 모른다.
정도현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커피 한잔 먹자더니 왜 여기로 부른 거야?”
“집에 돌아가서 쭉 생각해 봤는데, 내 목숨값이 커피 한잔이면 너무 싸잖아.”
그녀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자길 구해 준 보답으로 식사를 대접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여기 인기 많아서 예약 잡기도 어렵다던데. 왜 텅 비었어?”
“원래 오늘은 쉬는 날이거든. 내가 부탁해서 특별히 자릴 마련해 준 거야.”
그녀의 할아버지가 레스토랑 주인과 깊은 친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친분도 수평이 아닌 수직적인 관계였지만.
정도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조세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그래서 이유가 뭐야?”
정도현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참지 못했다.
레벨이 오르지 않은 이유.
그게 너무 궁금해서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조세아는 정도현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말했다.
“…알려 주자마자 나가 버릴 건 아니지?”
“안 그럴게.”
“그럼 식사 끝나고도 나랑 좀 더 어울려 주는 거다?”
“알겠으니까 빨리 말해 봐.”
정도현은 고갤 끄덕이며 재촉했다.
조세아가 목소릴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내용인데… 오빠한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거다?”
내가 왜 네 오빠야.
정도현은 그렇게 따지려다 참았다.
저렇게 밑밥을 까는 걸 보면 꽤 중요한 정보인 모양이다.
“정말 단순한 거야, 그래서 은근히 놓치기 쉬운 내용이기도 하고. 오빠는 레벨을 올리는 행동이 뭐라고 생각해?”
“그야… 강해지는 거지.”
“나도 그렇게 대답했었는데.”
그녀가 옛날 생각이 떠올랐는지 킥킥 웃었다.
“답이 뭔데?”
“정답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거야.”
거창한 표현이지만 정도현이 말한 것과 일맥상통했다.
“한계를 넘으려면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강한 상대랑 싸워야만 해.”
“그렇지.”
본인보다 레벨이 낮은 대상은 죽여 봤자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그건 상식이었다.
“그런데 레벨이 오를수록 레벨업이 힘들어지고 속도도 더뎌지잖아?”
“…….”
“사람들은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량이 확 늘어서 그런 거구나 하고 넘기는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야.”
조세아는 아카데미 강사가 알려 준 이론을 쭉 읊었다. 정도현은 완전히 몰두해서 들었다.
“높은 레벨일수록 경험치가 많이 필요한 건 맞지만, 강해지면 점차 한계를 뛰어넘는 게 어려워져.”
“…한계를 넘어서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정도현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상념에 잠긴 그의 얼굴을 조세아가 푹 빠진 눈동자로 바라봤다.
그러다 레스토랑 직원들이 전채 요리를 들고 오자 정신을 차리곤 설명을 계속했다.
“솔직히 대답해 줘. 그때 쓰러트린 보스들. 상대하기 어려웠어?”
“아니.”
두 녀석이 동시에 덤볐더라도 그 혼자서 잡았으리라.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
“그게 레벨이 안 오른 이유야.”
“…아.”
그 말대로였다. 그는 여태 너무도 간단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보스의 레벨이 높긴 했지만, 나보다 훨씬 약한 상대였어. 그래서 경험치도 적게 얻은 거야.’
정도현은 레벨이 기준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레벨은 단순한 숫자일 뿐.
중요한 건 알맹이였다.
그는 여러 스킬, 강화된 장비 템, 소모 아이템 등등을 써서 자신의 레벨에 맞지 않는 전투력을 발휘하곤 했다.
운동으로 빗대면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고, 매번 적당한 강도에서 멈췄다.
그러면 근육에 충분한 자극이 전해지지 않아 성장도 더뎌질 터.
‘레벨에 비해 너무 강해진 게 문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