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다들 진정해! 저 말이 사실이란 보장이 없어.”
권유담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탈출을 코앞에 둔 탓인지 길드원들도 평소처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거짓말이란 보장도 없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보스 두 마리를 어떻게 상대합니까?”
“성수는 아직 충분하다. 그걸 쓰면 분명…….”
“대부분 죽거나 다칠 겁니다.”
길드원들의 반박에 권유담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성수가 있어도 이 정도 인원으로 보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
기적이 일어나 보스들을 잡더라도 이쪽 역시 전멸 혹은 그에 준하는 피해를 받을 터.
‘만약 저 글귀가 사실이라면?’
길드원들 의견대로 한 명을 제물로 바치는 게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게 가장 적은 피를 흘리고 최대한 많은 인원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몰살당할 바엔 한 명만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설사 제물을 바치면 탈출구가 열린다는 게 거짓말이라 쳐도, 조세아는 보스전에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다.
그저 발목만 잡겠지.
‘오히려 아가씨보다 레벨이 낮은 서아린 씨가 훨씬 잘 싸웠어.’
권유담도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서아린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와 몇몇 길드원들은 큰 부상을 면치 못했으리라.
반면에 조세아는 정도현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할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긴 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리 곱게만 보이진 않았다.
‘젠장.’
권유담은 그렇게 합리화하려던 자신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사람의 목숨은 신분 상관없이 누구나 고귀하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대며 저울질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권유담은 어떻게 하면 길드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싫어.”
“아가씨?”
“죽고 싶지 않아.”
조세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죽기 무서운 거다. 우리랑 똑같이.
그녀의 발언에 길드원들도 흠칫했다.
당연히 죽기 싫다며 고래고래 소리치거나, 다른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며 떼를 쓸 줄 알았다.
그랬으면 죄책감이 좀 덜했을 텐데.
담담하게 저리 말하자 양심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안 그럼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제비뽑기로 하겠습니다.”
권유담이 정적을 깨며 타협안을 내밀었다.
약하단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는 건 너무도 부당한 처사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자 몇몇이 반발했다. 이건 전원의 목숨이 걸린 일.
만약 권유담이 걸리면 어떡하는가.
그럼 공략대의 전력이 확 줄어든다.
악마가 사기를 쳤다면 남겨진 이들까지 꼼짝없이 죽을 터.
‘내가 걸릴지도 모르잖아.’
‘난 죽기 싫다고.’
뒤에서 조작이라도 하지 않는 한 제비뽑기는 공평하다.
재수 없으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거부감을 안겨 줬다.
“도현 씨, 빨리 말려야… 도현 씨?”
이대로 놔두면 내분이라도 날 것 같아 서아린이 다급히 정도현을 불렀다.
그런데 대답이 없다.
그녀는 옆에 있던 그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곤 입을 쩍 벌렸다.
“다들 그만 싸우세요.”
“…도현 씨?”
“헉!”
정도현은 희생의 제단 앞에 서 있었다. 푸른 검기가 출렁이는 검을 들고서.
다들 숨이 멎었다.
그가 제단을 깨부수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보다 궁수 아니었어?’
활 쏘는 솜씨가 범상치 않아서 당연히 활이 주무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떡하니 검기를 뽑아냈다.
그럼 활은 보조 무기였단 소리.
정말 말도 안 되는 재능이었다.
“악마한테 놀아나지 마세요.”
“놀아나다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영 수상하잖아요. 첫 번째 글귀를 다시 보세요.”
[너희 중 하나를 택해 희생의 제단에 바쳐라. 그리하면 숨겨진 탈출구가 열릴지어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정도현의 지적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가 이상하단 건지 전혀 갈피를 못 잡겠다.
한 길드원이 궁금증을 못 참고 질문했다.
“저 말 자체가 거짓말이란 겁니까?”
“글쎄요, 그거야 해 보기 전까진 모르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아마 진짜겠지만요.”
정도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
“제단에 사람을 바치면 숨겨진 탈출구가 열린다. 그다음은요?”
“그다음?”
“탈출구가 열린다고만 했지, 곱게 내보내 준단 얘긴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지막 문구도 다시 보세요.”
[한 명을 희생할지, 다 함께 죽을 것인지 택하라.]
한 명을 희생할지, 다 함께 죽을 것인지.
한 명을 희생하면 나머지 인원의 안전을 보장해 준단 말은 없었다.
자고로 악마는 말장난으로 사람을 속이길 좋아한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교묘한 이야기로 사람을 기만한다.
그게 악마들의 수법이었다.
“그, 그럼…….”
“저희가 제물을 바치든 안 바치든 보스들은 튀어나올 겁니다.”
“그, 그럴 수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소심한 반박에 정도현은 가장 원론적인 부분부터 짚었다.
“보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놈들은 인간을 죽이고자 태어난 존잽니다. 그러니 저희한테 유리한 선택지를 고르게 놔둘 리 없어요. 함정을 파 둔다면 모를까.”
“그, 그럼… 탈출구가 열리자마자 도망치면 되잖아!”
보스들도 탈출구를 타고 던전을 빠져나오겠지만 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 말에 정도현은 이렇게 반박했다.
“탈출구가 바로 열린다는 얘기도 없어요. 제물을 바치고 몇 분 혹은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죠.”
“아…….”
정도현의 추측은 단순한 비약 혹은 궤변일지 모른다.
사실인지 아닌지 해 보기 전까진 아무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무조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길드원들은 어쩌면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정도현은 우유부단한 그들을 대신해 제 할 일을 했다.
콰지직!
그의 검이 제단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희생의 제단이 단칼에 쪼개지며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자 몇몇 길드원들이 절규에 가까운 탄식을 자아냈다.
보스와 싸우지 않고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를 유일한 수단이 지금 막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부수시면 어떡합니까!”
“마, 맞아! 왜 그걸 그쪽 맘대로 정하냐고!”
“충분히 상의하고 투표로 정했어도 됐잖아!”
몇몇은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덕분인지 까맣게 잊어 먹은 듯했다.
그들의 배은망덕한 행동에도 정도현은 씩 웃었다.
역시 부수길 잘했다.
안 그럼 저들은 누군가를 희생시킬지 말지로 다투다 끝내 분열했으리라.
그것도 보스들이 원했던 그림 중 하나겠지.
“누구 희생시키고 우리끼리 빠져나가면 마음이 참 편하겠어요.”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길드원들도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훌쩍대던 조세아는 기적을 경험하고 광신도가 된 것처럼 열렬히 그를 쳐다봤다.
“곧 보스가 나올 겁니다. 한 마리는 제가 맡을 테니 여러분들은 다른 한 놈을 맡아 주세요.”
“뭐, 뭐?”
혼자 보스를 상대하겠다니, 미친 건가?
다들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바로 그때.
쿠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철문이 활짝 열렸다.
[하급 트윈 데빌] [LV.79]
[하급 트윈 데빌] [LV.78]
<망할 인간 놈들! 설마 제단을 부술 줄이야!>
《젠장. 이러면 우리도 못 나가게 됐잖아. 그냥 다 죽여 버리자, 형!》
홉고블린을 닮은 악마들이 씩씩대며 걸어 나왔다.
설마 인간 측이 제단을 부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쌍둥이 악마라 그런지 생김새가 정말 똑같았다.
다만 한 녀석의 피부는 빨갛고 다른 녀석은 새파랬다.
파란 악마가 동생인지 빨간 악마를 보며 형이라 불렀다.
레벨도 동생 쪽이 더 낮았다.
“이젠 다 틀렸어…….”
보스의 레벨을 본 길드원들이 자포자기했다.
한 마리도 버거운데 두 마리를 무슨 수로 상대하겠는가.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정도현은 검을 빙빙 돌리며 빨간 악마에게 걸어갔다.
발걸음이 아주 경쾌했다.
누가 보면 보스 두 마리가 아니라 마트에서 1+1 행사하는 줄 알겠다.
서아린도 단검을 들어 올리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먼저 돌격할 테니 여러분들이 엄호해 주세요.”
“예?”
“위, 위험합니다!”
타앗-!
그녀는 개인 특성을 사용하며 파란 악마에게 홀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길드원들이 경악했다.
60레벨이 78레벨 보스한테 덤빈다니.
극한의 상황에 그녀마저 미쳐 버린 걸까?
《순결한 여인이로구나. 타락시키는 맛이 있겠어.》
파란 악마가 서아린을 보더니 음험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서아린은 무시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샤악-!
회전력이 실린 단검이 악마의 급소를 향해 날아든다.
《흥.》
파란 악마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얼음 장벽이 솟아났다.
쩌엉-!
단검과 얼음벽이 부딪혔다.
공격이 막혔지만 서아린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차자자장-!
그녀가 팽이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단검을 휘둘렀다.
《…어?》
쩍! 쩌저적!
단검과 부딪힐 때마다 얼음벽이 흔들린다. 균열도 점차 커졌다.
게다가 단검에 실린 힘이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쾅-!
기어코 얼음 장벽을 힘으로 깨부쉈다.
자신을 지켜 줄 방패가 사라지자 파란 악마는 다급히 허공에 고드름을 만들어 쏘았다.
차자자장-!
서아린은 회전을 멈추지 않으며 전진했다.
고드름들이 단검에 닿자 가루로 변했다.
《이게 무슨……!?》
마력이 분쇄되다니.
경악한 파란 악마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보았다.
빙빙 도는 그녀의 단검에서 시커먼 아지렁이가 일렁인다.
그건 정도현이 준 심법으로 모아 둔 어둠 속성 마력이었다.
어둠의 마력은 닿은 대상의 마력을 비틀어 부순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상대의 방어력을 일부 무시하고 데미지를 쑤셔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으기가 어려워.’
성능은 강력하나 축적하기 힘들었다.
태양이 떠 있는 시간대엔 심법을 펼쳐도 어둠의 마력이 쌓이지 않는다.
오로지 해가 없는 시간대에만 마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심법들과 비교하면 하루의 반절이 넘는 시간을 손해 보는 셈.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친화력은 어둠 속성과 가장 잘 맞았으니까.
《크아악!》
촤악-!
어둠의 칼날이 파란 악마의 몸 곳곳을 찢었다.
놈은 아슬아슬하게 몸을 비틀어서 치명상은 겨우 면했다.
서아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빠르게 몰아쳐야 해.’
그녀는 부족한 어둠 속성 마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고자 연구했다.
그녀가 내린 해답은 빠른 속도였다.
회전으로 신체를 한계 이상까지 가속한다.
다른 플레이어가 이리 험하게 몸을 굴리면 근육과 관절에 심한 부하가 걸려 얼마 못 가 자멸할 터.
하지만 그녀는 「묘인화」로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신체를 얻었다.
꽈드득-!
그녀의 몸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근육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78레벨의 보스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이, 이 망할 년이!》
후우우-!
몸 곳곳이 베인 파란 악마가 발끈하며 냉기의 숨결을 후 분출했다.
사방으로 자욱이 깔리는 서리 안개.
서아린의 피부가 쩍쩍 얼어붙었다.
“…윽!”
체온이 내려가자 그녀의 움직임이 점차 둔해졌다. 회전력도 자연히 약해졌다.
쩌적!
파란 악마는 얼음으로 칼을 생성해 그녀의 단검을 쳐 냈다.
몇 번 부딪히자 서아린의 회전이 완전히 멈췄다.
《흐흐! 이제 죽을 시간…….》
콰앙-!
그녀를 끝장내려던 파란 악마의 머리 위로 화염 주문이 떨어졌다.
전신이 불타자 파란 악마가 비명을 꽥 지르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데미지가 반감된다곤 해도 고통까지 줄어드는 건 아니었으니까.
“서아린 씨를 엄호해!”
권유담과 길드원들이 전투에 난입했다.
그녀가 상상 이상으로 선전하자 다들 용기를 되찾은 것이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푸른 악마가 길드원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치이익-!
성수를 바른 무기에 고기 타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바짝 타들어 갔다.
“죽여!”
“계속 몰아붙여라!”
《큭, 큭큭! 크하하핫!》
길드원들이 창칼로 온몸을 마구 찔러 댔지만 파란 악마는 오히려 낄낄 웃었다.
도무지 죽을 기미가 안 보였다.
악마의 웃음소리가 끊기질 않자 길드원들도 하나둘씩 당황했다.
“이 자식, 뭐야!”
“부, 불사신인가?”
《큭큭, 소용없다니까!》
후우우-!
상처를 재생한 파란 악마가 숨결을 뱉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새빨간 얼음 조각으로 변해 총알처럼 쏘아졌다.
푸부북-!
얼음 조각이 꽂힌 몇몇 길드원은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퍽! 퍼억!
권유담이 방패로 악마의 정수리를 마구 내리찍으며 외쳤다.
서아린이 만들어 낸 천재일우의 기회다.
지금 놈을 못 죽이면 미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뼈와 살을 짓뭉개도 녀석은 피투성이가 될 뿐 죽지 않고 천천히 재생했다.
진짜 불사신인가?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놈들, 「생명 공유」란 스킬 때문에 심장을 동시에 터트려야만 죽는대요.”
《……!》
누군가가 쌍둥이 악마의 약점을 알려 줬다.
목소리의 주인은 빨간 악마를 홀로 상대하러 떠났던 정도현이었다.
파란 악마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형이 졌다고?’
그것도 고작 인간 한 명한테?
휙-!
정도현은 한 손으로 다릴 붙잡고 질질 끌고 왔던 빨간 악마를 쓰레기 버리듯 던졌다.
피떡이 된 빨간 악마가 동생 옆에 철퍼덕 엎어졌다.
《형? 어떻게 된 거야! 눈 좀 떠 봐!》
빨간 악마는 이미 혼절했다.
대체 무슨 짓을 당했길래 이리도 초췌해졌단 말인가?
파란 악마는 형을 이렇게 만든 주범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물은 답을 알고 있더라고. 성수로 세수 좀 시켜 줬지.”
《이 망할 인간! 죽어서도 네놈을 평생 저주…….》
파란 악마의 앞에 커다란 양동이가 나타났다.
그건 성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죽기 전에 악담이나 실컷 퍼부으려 했던 악마는 크게 당황했다.
정도현은 파란 악마의 목덜미를 꽉 붙잡고 그대로 양동이에다 머릴 처박아 버렸다.
《꾸르, 꾸르륵… 케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아, 아으……. 컥!》
숨이 막혀서 실수로 삼켜 버린 성수가 온몸으로 퍼진다.
얼굴부터 내부의 장기까지 질질 녹아내렸다.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생명 공유」 때문에 편히 죽을 수도 없었다.
그제야 파란 악마는 이해했다.
형이 왜 자신들의 약점을 저 인간한테 순순히 알려 줬는지.
이 끔찍한 고통에서 빨리 편해지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