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공략대는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주역은 당연히 정도현이었다.
그가 성수를 바른 화살을 쏴 준 덕에 부상자는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권유담 부팀장이 대표로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현 씨 덕분에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정도현은 길드원들에게 하급 성수를 각각 스무 병씩 배분해 줬다.
게다가 성수를 지원해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절대 발설치 않기로 피의 맹약을 맺었다.
‘절대 평범한 짐꾼이 아니야.’
권유담은 정도현의 정체가 궁금했다.
교단의 고위 사제가 아닌 이상 성수를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닐 수 없을 텐데.
길드원들도 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정도현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 성수도 잔뜩 있으니 악마들과 싸울 때 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살아서 나갈 수 있어.’
그 희망만으로 호기심은 사라졌다.
권유담과 길드원들이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때. 조세아가 슬그머니 정도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정도현 옆에 털썩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성수들 다 어디서 난 거야?”
“글쎄, 지금 그게 중요한가?”
정도현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성수의 출처를 밝혀서 득 볼 게 전혀 없었으니까.
그의 불친절한 대답에 조세아가 뚱한 얼굴로 바라보다 급히 표정을 고쳤다.
“크흠, 흠… 아까 나 구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정도현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 철부지가 먼저 고맙다고 할 줄이야.
그의 눈빛에 담긴 심리를 읽었는지 조세아가 작은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나도 도움 받았을 땐 고맙다고 해! 그 정도 개념은 있거든?”
“그래, 알면 됐어.”
“그나저나 너, 내가 누군진 알아?”
“광명 기업 회장님 손녀딸.”
정도현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조세아의 한쪽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는 당연히 그가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줄 알았다.
그녀가 누군지 아는 이들은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굽신대거나, 그녀와 엮이는 게 두려워서 거릴 두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마치 그런 거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걸 알면서 왜…….”
“그래서 용건이 뭔데, 본론이나 말해.”
정도현이 멋대로 말을 끊어 버리자 조세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꾹 참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까처럼 날 지켜 주면 좋겠어. 여기서 무사히 나가면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제대로 보상해 줄게.”
“왜 나한테 부탁하지? 나보다 길드원들 레벨이 훨씬 높은데.”
“아까 너도 봤잖아. 아무도 안 구해 주는 거.”
그녀가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길드원들을 째려봤다.
아마 그녀는 저들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자길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길드원들은 단지 도와줄 여력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아무튼,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구해 준 건 정도현이 유일했다.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도 정도현뿐이다.
조세아의 주장에 정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했다.
“그럼 네 옆에 딱 붙어서 다가오는 몬스터만 처리하란 거지?”
“당연하지. 그게 경호의 기본이잖아?”
조세아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정도현이 고갤 저었다.
“그럼 안 되겠는데.”
“…뭐? 어째서!”
“너한테만 신경 쓰면 분명 다른 쪽에서 사상자가 나올 테니까.”
아까 전 교전도 정도현과 서아린이 돌아다니며 도왔기에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조세아의 안전만 우선시하면 분명 어디선가 사고가 터질 거다.
‘게다가 경험치도 얼마 못 챙길 거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켰다.
단칼에 거절당하자 조세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다급히 설득했다.
“그,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수고비도 챙겨 준다니까? 못 믿겠으면 피의 맹약서로 약속하면 되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돈보다 사람 목숨이 우선이지.”
“그, 그럼 내 목숨은?”
“아까처럼 위험해지면 화살 쏴 줄게. 안전은 장담 못 하겠지만.”
“그, 그건 싫어! 나한테 다가오기 전에 처리해 달라고!”
조세아가 또 징징댔다.
그러자 휴식 중이던 길드원들이 아니꼽게 쳐다봤다.
정도현이 한숨을 쉬며 달래 주려 할 때, 서아린이 일침을 가했다.
“적당히 좀 해요.”
“…뭐?”
“도현 씨가 당신만 신경 쓰면 공략 팀이 전멸할 수도 있어요. 이기적으로 굴지 마세요.”
“시, 시끄러! 짐꾼 주제에 나한테 명령하지 마!”
서아린의 레벨은 고작 60.
65레벨인 조세아 입장에선 만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물며 서아린은 짐꾼이지 않은가.
조세아가 주인 품에 안긴 치와와처럼 으르렁댔다.
‘괜히 자극해서 문제 생기면 안 좋은데.’
정도현은 서아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아깐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었지만 그건 조세아를 조금 겁주려고 한 말이다.
정도현은 아무도 죽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수도 아낌없이 뿌렸다.
조세아한테 밉보이면 나중에 할아버지한테 모든 걸 일러바칠 터.
정도현은 서아린의 어깨에다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서아린, 진정해.”
“도현 씨. 이런 애는 버릇을 고쳐 놔야 해요.”
서아린은 고갤 저으며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덥석-!
그녀는 조세아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고 확 잡아당겼다.
“꺅! 이, 이거 안 놔!?”
“너 같은 애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더라고.”
짜악-!
서아린이 매섭게 따귀를 쳐올렸다.
예전에 민소이한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적나라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도현은 물론이고 길드원들까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너, 너……!”
태어나서 처음으로 따귀를 맞아 본 조세아. 그녀는 불변의 법칙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심정이었다.
“너, 너 죽여 버린다!”
조세아가 악에 받쳐 소릴 빽 질렀다.
죽인다고 협박까지 해 댔다.
하지만 조세아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서아린에겐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같잖단 눈으로 쳐다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짜악! 짝! 짜아악!
맞을 때마다 조세아의 얼굴이 좌우로 휙휙 돌아갔다.
“끄으… 왜, 다들… 안 말려 줘…….”
추하게 머리끄덩이를 잡힌 조세아가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길드원 중 그 누구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소하단 표정이었다.
그제야 조세아도 눈치챘다.
바깥과 달리 이곳에 자신의 편은 없다는 걸.
“그, 그만해…….”
“말이 짧네?”
“그, 그만해 주세요…….”
“싫은데.”
“히익!”
서아린이 다시 손을 치켜들자 조세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파르르 떨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 위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만해!”
정도현이 서아린의 손목을 붙잡아 제지했다.
“너 어쩌려고 일 벌여?”
정도현이 뒷일은 생각 안 하냐고 묻자, 퉁퉁 부운 뺨을 감싸고 주저앉아 있던 조세아가 거들었다.
“마, 맞아.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말하는 거 보니까 아직 덜 맞았네?”
서아린이 손을 슬쩍 움직이자 조세아가 정도현 등 뒤로 쏙 숨었다.
하는 짓이 잔뜩 겁먹은 애완견이랑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정도현이 그만하라고 노려보자 서아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쟨, 여기서 나가도 할아버지한테 하소연 못 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맹약 맺었잖아요? 던전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남에게 절대 말해선 안 된다고.”
“아, 맞네.”
정도현과 길드원들도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서아린은 무작정 따귀를 날린 게 아니었다. 철저한 계산하에 저지른 짓이었다.
조세아도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닫곤 멍하니 중얼댔다.
“그, 그럼… 할아버지한테 나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절망한 조세아. 서아린은 무릎을 살짝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더니 귓가에 입을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또 처맞기 싫으면 앞으로 처신 잘해. 그리고 도현 씨한테 자꾸 엉겨 붙지 마.”
“흐, 흐끅… 네…….”
조세아가 울먹이며 힘겹게 고갤 끄덕였다.
가재처럼 정도현의 옷가지를 꼭 붙잡았던 그녀의 손가락이 슬며시 떨어졌다.
* * *
미친개한텐 매가 특효약이다.
서아린에게 제대로 혼쭐이 난 조세아는 그 뒤로 꼬릴 말고 얌전해졌다.
악마들과 싸울 땐 제 발로 뛰며 정도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남한테 기대지 않고 제 힘으로 뭔가 해 보려는 그녀가 기특해서 그도 적당히 페이스 조절을 해 줬다.
“헥, 헤엑… 나 죽어…….”
“자, 이거 마셔.”
“흑, 고마워…….”
전투가 끝날 때마다 조세아는 녹초가 되어 헉헉댔다.
던전에서 이렇게 뛰어 본 적도 없으리라.
정도현은 바닥에 퍼질러진 그녀에게 자신의 물병을 건네줬다.
그 물통에는 중급 체력, 마력 회복 포션이 반반씩 섞여 있어서 한 모금만 마셔도 마력과 몸의 피로가 빠르게 풀렸다.
“…푸하!”
그 사실을 모르는 조세아는 몇 모금 들이켜곤 살 것 같단 표정을 지었다.
수십 분 만에 초췌한 몰골이 된 그녀에게 정도현이 질문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 뛰니 어때, 힘들지?”
“…응.”
조세아는 부끄러웠다.
그녀는 여태 말도 안 되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었다.
‘내가 해 왔던 건 던전 공략도 뭣도 아니었어.’
위험하고 힘든 일은 죄다 길드원들한테 떠넘기고 그녀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만 했을 뿐이었다.
집안사람들이 자꾸 대단하다 떠받들어 줘서 자기가 정말로 그렇다고 믿었다.
이제야 눈이 뜨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응.”
정도현은 뭐라 딱 꼬집어 지적하진 않았다. 그래도 의미는 제대로 전달됐다.
조세아가 그에게 물병을 돌려주며 고갤 끄덕였다.
그녀는 휴식 중인 길드원들을 빤히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 사과하고 올게.”
정도현은 피식 웃었다.
개념이 좀 없긴 해도 심성까지 배배 꼬이진 않았구나.
주변에 말릴 사람이 없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을 뿐, 이렇게 교화가 가능했다.
물론 일시적인 변화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여우처럼 콩콩 뛰어간 조세아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힘차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지금까지 제멋대로 굴어서 너흴 힘들게 했어.”
조세아가 허릴 직각으로 굽히며 사과했다. 그녀에게 사죄했던 이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이걸 그녀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던 길드원들은 크게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조세아가 기세를 이어갔다.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앞으로 다신 안 그럴게! 던전에서도 농땡이 안 피우고 최선을 다할게.”
그 고집불통 조세아가 먼저 사과하다니?
다들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질 않아서 속닥댔다.
권유담은 웅성대는 길드원들을 진정시키고 대표로 질문했다.
“아가씨, 방금 하신 말씀 진심이십니까?”
“응, 부탁해. 뻔뻔한 거 알지만 딱 한 번만 기회를 줘.”
몇몇은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장 싹싹하게 굴어도 던전을 빠져나가면 원상 복구 될지도 모른다.
물론 던전에서 벌어진 일은 남에게 알릴 수 없으니, 그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는 오지 않을 터.
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화풀이할지 모른다.
기대는 배신을 부른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
그 단순하고도 불변의 진리를 길드원들이 떠올릴 때, 권유담이 말했다.
“아가씨께서도 이제 좀 철이 드셨군요. 기쁩니다.”
“부팀장님?”
“아가씨께서 저렇게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다들 한 번만 믿어 보자고.”
길드원들은 떨떠름했지만 고갤 끄덕였다.
이들 중 조세아한테 가장 시달린 건 권유담이었으니까.
최대 피해자가 저렇게 말하는데 안 따르기도 뭣했다.
던전에 갇힌 뒤로 줄곧 경직됐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 보자. 보스 방까지 얼마 안 남았을 거다.”
“예!”
그렇게 말한 권유담은 정도현과 서아린을 향해 고맙단 눈빛을 보냈다.
몇 년을 어르고 타일러도 도저히 바뀌질 않았던 조세아의 성질머리가 불과 수십 분만에 고쳐졌다.
문제견의 나쁜 습관을 단박에 뜯어고친 전문가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오늘 저 둘을 만난 게 천운이었다.
* * *
몇 번의 전투를 더 치른 공략대는 드디어 보스 방 앞에 도착했다.
“어?”
“이게 무슨…….”
그런데 보스 방으로 이어지는 철문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이런 건 또 처음이라 다들 당황했다.
“설마 보스가 두 마리야?”
“여기가 대형 던전도 아닌데 이런 법이 어딨어!”
보스 한 마리도 벅찬데 두 마리라니.
그냥 다 죽으란 소리였다.
“잠깐, 여기 뭔가 적혀 있어.”
권유담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철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 말대로 철문에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너희 중 하나를 택해 희생의 제단에 바쳐라. 그리하면 숨겨진 탈출구가 열릴지어다.]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분노한 쌍둥이 악마들이 문을 열고 나와 그대들을 집어삼킬지니.]
[한 명을 희생할지, 다 함께 죽을 것인지 선택하라.]
드르륵-!
권유담이 글을 읽자 바닥이 움직이며 피로 점철된 제단이 올라왔다.
딱 봐도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공물이라니…….”
“한 명을 바치라고?”
“악마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권유담이 그렇게 소리쳤지만 이미 길드원들 마음속엔 악마의 속삭임이 깊숙이 뿌릴 내리고 말았다.
‘한 명만 죽으면…….’
‘나머진 살 수 있잖아?’
상식적으로 보스 두 마리가 동시에 출몰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명만 희생하면 모두가 살 수 있다.
길드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모두 적합자를 떠올리곤 거의 동시에 그 사람을 쳐다봤다.
“…어?”
길드원들의 시선이 조세아에게 쏠렸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거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악마의 꾐에 넘어간 자들의 살기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