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한규리는 해방단 간부야.”
“해방단이요? 아, 저번에 첩자로 심어 뒀다던 그…….”
정도현이 한규리의 정체를 밝혔다. 그러자 서아린의 오해도 눈 녹듯 풀렸다.
다행이다. 저 둘이 우려했던 관계가 아니라서.
냉랭한 눈빛이 사그라들자 한규리도 숨통이 좀 트였다.
“한규리, 마저 얘기해 줘. 무슨 재난이 터진단 거지?”
“조만간 이 공원 어딘가에 폐쇄형 던전이 나타날 겁니다.”
“…폐쇄형 던전?”
처음 듣는 용어라 정도현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서아린이 찬찬히 설명해 줬다.
“폐쇄형 던전은 특수형 던전 같은 변종이에요. 보스를 처치할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죠.”
“그럼 특수형 던전이랑 똑같은 거 아냐?”
위험하긴 해도 그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정도현이 그렇게 반문하자 한규리가 고갤 저었다.
“아뇨, 폐쇄형 던전은 공략에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바로 붕괴합니다.”
“뭐? 그게 무슨…….”
“쉽게 말해, 던전에 처음 들어간 파티가 몰살당할 시 곧바로 게이트가 붕괴해 버리죠.”
즉, 도전 기회가 딱 한 번뿐이란 뜻.
상당히 골치 아픈 던전이었다.
“이 공원에 폐쇄형 던전이 생긴다고?”
“예.”
예언자는 꿈속에서 보았다. 어떤 공원에 시뻘건 게이트가 생겨나는 광경을.
꿈을 영사해 주는 아티팩트를 써서 꿈속의 풍경과 현실의 지형을 대조해 본 결과 이곳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였다.
‘만약 여기서 게이트가 터지면….’
이번에 퇴치했던 쥬레이어드 사건이랑 피해 규모가 거의 비슷할 거다.
공원 일대는 물론이고 그들이 이사한 아파트 단지까지 휘말리겠지.
집들이 파티 중에 이런 얘길 듣자 마음이 착잡했다.
새로 살 집을 둘러보며 크게 기뻐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공략만 성공하면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도전 기회가 한 번일 뿐, 성공하면 그만이었다.
D구역 플레이어들 수준도 꽤 높으니 괜찮지 않을까. 정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규리가 고갤 저었다.
“폐쇄형 던전의 몬스터는 기존보다 월등히 강해져서 공략 난이도가 확 올라갑니다. 그래서 실패하고 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일단 가족과 지인들에게 사정을 대충 설명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죠.”
“예언자는 게이트가 붕괴하는 미래도 본 거야?”
“…예?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십중팔구 실패하겠죠.”
“공략 결과는 모른다? 그럼 성공할 수도 있단 거네?”
그 말에 한규리와 서아린이 우려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일단 대피시키는 편이…….”
“저 여자 말이 맞아요. 괜히 위험한 도박을 할 필욘 없잖아요?”
“여긴 D구역 중심 도시 중 하나야. 여기가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리면 D구역 전역이 살기 팍팍해질걸?”
여기로 이주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경제와 사회가 무너지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너무 좋은 집으로 이사했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던 할아버지가 크게 낙담하리라.
그것만큼은 도저히 못 보겠다.
정도현이 결심했다.
“내가 들어갈게.”
“네?”
“도현 씨, 설마…….”
무슨 소린지 이해 못 해서 어리둥절해하는 한규리.
반면에 서아린은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직접 공략하겠다고요?”
“어.”
“너무 위험하잖아요!”
서아린이 절대 안 된다며 뜯어말렸다.
폐쇄형 던전은 한 번 들어가면 공략이 끝날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다.
즉, 지원 병력이나 구조대가 들어올 수 없으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셈.
폐쇄형 게이트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뻔히 알면서도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냥 포기하고 도망쳐요. 왜 위험을 감수하려는 건데요?”
“방금 말했잖아. 이곳 상권이 죽으면 D구역 경제에 큰 타격이 올 거야. 인명 피해도 엄청날 거고.”
“그러다 도현 씨가 죽으면요!”
서아린이 축축해진 목소리로 따졌다.
그러자 정도현이 고갤 저으며 말했다.
“무작정 들어가진 않을 거야. 들어가도 괜찮은지 먼저 확인할 거야.”
“그걸 어떻게 확인… 아.”
서아린은 맥주 몇 잔 마시고 곯아떨어졌던 박수무당을 떠올렸다.
그래, 박성원의 「초감각」이면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생환 여부를 판별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써먹고 있고.
“…알았어요. 대신 저도 데려가요.”
“뭐?”
“여기서 답답하게 기다릴 바엔 제가 직접 뛸래요.”
둘의 대화 내용에 한규리는 납득이 안 된단 얼굴로 질문했다.
“그러니까 두 분… 이곳 시민들을 위해 목숨을 걸겠단 겁니까?”
“그렇게 거창히 포장할 필요 없어. 내 집을 내 손으로 지키려는 것뿐이야.”
정도현이 태연자약하게 말하자 한규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규리는 박성원의 능력을 모른다.
그래서 둘의 선택을 고결한 영웅의 그것과도 같이 받아들였다.
보통의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용기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정도현 씨의 가족과 지인분들은 제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되면… 할아버지를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죽을 때까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고마워.”
정도현이 죽으면 맹약의 효력도 사라진다. 그럼 더는 정도현의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한규리는 그와 맺은 약속을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가장 원했던 걸 선물해 줬으니까.
특성을 강화해 주는 비약.
정도현이 그걸 준 덕에 그녀는 새로운 힘, 「사이코키네시스」을 획득했다.
그건 그녀가 바라지 마지않았던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저 여자랑 그런 약속도 했어요?”
한규리의 진심 어린 맹세에 서아린의 눈이 샐쭉해졌다.
평생 할아버님을 모신다느니 뭐니 말하는 게 꼭 정도현과 아주 긴밀한 사이 같지 않은가.
나한텐 그런 부탁 안 했으면서.
‘민소이, 너도 이런 기분이었구나.’
민소이가 왜 자길 죽이려 들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서아린의 살기를 느낀 한규리는 오한이 들었다.
싸울 힘이 생기긴 했으나, 옛 트라우마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렇게 기 센 여자가 자신을 째려보면 저도 모르게 학창 시절 쭈구리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정보 알려 줘서 고맙다. 예언자 때문에 직접 움직이기 부담스러웠을 텐데.”
혹여나 예언자가 이 광경을 꿈에서 볼지 모른다.
아니면 한규리가 해방단을 배신하고 그와 내통하는 모습이라든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는 정도현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의 할아버지가 게이트 붕괴에 휘말려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감사에 한규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을 돕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게 맹약의 조건이니까.”
“그것도 그러네. 그래도 당분간은 직접 나서지 말고 몸을 사려. 예지 능력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네.”
피의 맹약으로 동맹을 맺었기에 그녀는 정도현을 배신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위협하는 요소는 곧 정도현 본인의 위험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망설임 없이 달려왔다.
‘물론 피의 맹약이 없었어도 당신을 도왔겠지만요.’
한규리는 그 말을 겨우 목구멍으로 삼키며 배시시 웃었다.
그걸 본 서아린의 표정은 한층 싸늘해졌다.
그가 다른 여자랑 시시덕대는 꼴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도현 씨, 슬슬 돌아가죠. 할아버님이 저희 둘을 기다리실 거예요.”
서아린은 보란 듯이 정도현의 손을 붙잡고 슬쩍 끌어당겼다. 그러면서 한규리를 한번 흘겨봤다.
그 따가운 시선에 한규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한규리가 품은 감정은 연정보다는 은인을 향한 공경심에 더 가까웠다.
고마움을 표현하려다 서아린한테 괜한 오해를 사고 말았다.
“알았어. 한규리, 조심해서 돌아가.”
“네. 말랑아, 어른들 말씀 잘 들어야 해?”
[알았어, 누나. 나중에 또 보자!]
* * *
그로부터 며칠 후. 예언은 실현됐다.
시민 공원에 차원 게이트가 발생했다.
겉보기엔 평범한 게이트였지만 플레이어들이 진입하는 순간 본모습을 드러낼 거다.
정도현 일행은 곧장 게이트를 확인하러 공원으로 향했다.
게이트 근처엔 관리국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이상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현장을 지키던 요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정도현은 강민겸 지부장한테 연락해 전화를 바꿔 줬다.
“시, 실례했습니다!”
지부장과 직접 통화시켜 주니 요원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정도현은 기념 촬영이라도 하듯 차원 게이트 앞에 똑바로 섰다.
“어떤 것 같습니까?”
“음, 큰 위험은 안 느껴져요. 그대로 혼자 들어가셔도 문제없겠는데요?”
박성원은 차원 게이트와 정도현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서아린도 긴장의 끈을 놓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피치 못할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박성원은 아직 59레벨이라 오늘 아침까지만 D구역에 머무를 수 있었다.
강민겸 지부장의 특별 허가증이 없었다면 집들이 파티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리라.
고로 이번 던전은 정도현과 서아린 둘만 참여가 가능했다.
‘문제는 이 던전에 어떻게 들어가느냐인데.’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들어가 공략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건 위법이니까.
어떤 지역에 게이트가 발생할 시, 그 일대를 담당하는 길드들끼리 공략권을 놓고 경매를 한다.
거기서 낙찰받은 길드가 관리국에 돈을 지불하고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만약 어떤 길드도 던전 공략을 원치 않는다면 던전 브로커들 손으로 넘어간다.
제대로 된 길드가 없던 E구역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수직적인 시스템 구조였다.
‘이래서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많이 힘들 거라 했구나.’
먹음직스러운 던전은 길드가 낚아채고, 맛없는 건 던전 브로커와 소속 없는 플레이어들 몫이었다.
이 던전은 어느 길드가 가져가게 될까.
정도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부장님.”
[오, 그래. 게이트는 살펴봤나?]
“예,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확인했습니다.”
[이것 참. 이사하자마자 근처에 게이트가 생기다니. 자네도 참 기구하구만.]
“그러게요.”
정도현은 강민겸한테 예언에 대한 얘기는 쏙 빼고, 이사한 아파트 근처에 게이트가 생겨서 걱정된단 식으로 핑계를 댔다.
그걸 빌미 삼아 게이트를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던전, 피닉스 길드가 낙찰해 갔거든.]
“피닉스 길드요? 파도 길드처럼 유명한 곳입니까?”
[파도 길드에는 못 미쳐도 어지간한 길드보단 잘나가지. 광명 기업이 세웠거든. 자금이 짱짱해.]
피닉스 길드는 D구역 제약 회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광명 기업이 세운 길드였다.
그래서 파도 길드 같은 D구역 3대 길드를 제외하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 중 하나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피닉스 길드가 깔끔히 처리해 줄 거다.
강민겸은 그렇게 말했다.
정도현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지부장님, 혹시 이번 던전에 어떻게 참여할 수 없겠습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래도 제 집은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실력이야 나도 잘 아네만… 공략대 편성은 피닉스 길드가 쥐고 있어서 나도 방법이…….]
그렇게 말하며 난감해하던 강민겸이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중얼댔다.
[아니지, 아니야. 내 정신 좀 봐. 들어갈 방법이 하나 있네.]
“그게 뭡니까?”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길드는 공략대에 짐꾼들을 붙여 주네. 길드원들 사기 증진을 위해 각종 음식과 음료들을 들고 가거든.]
그런데 몬스터와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투원들이 무거운 짐가방을 메고 움직일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짐을 대신 들 플레이어를 고용하네.]
“그게 짐꾼이군요.”
[레벨이 낮아 전투를 돕진 못해도, 짐을 들고 따라오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이해했습니다.”
[정 걱정되면 짐꾼으로 따라가지 않겠나? 여차하면 자네가 나서도 될 거고.]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저랑 제 파티원 한 명이 짐꾼이 되겠습니다.”
[알겠네. 피닉스 길드장한테 내 따로 부탁해 봄세.]
* * *
대기업이 어떤 길드를 후원해 주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길드를 직접 설립하는 건 드물었다.
후자는 대체로 기업 대표의 친족 중 누군가가 플레이어로 각성했을 때였다.
피닉스 길드를 세운 광명 기업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응? 저 둘은 누구야? 못 보던 얼굴인데.”
“관리국에서 지원해 준 짐꾼입니다, 아가씨.”
“아, 짐꾼?”
불사조 문양이 수놓아진 마법사 로브.
주먹만 한 크기의 마정석이 박힌 지팡이.
에픽 등급 장비 템으로 무장한 젊은 여자가 정도현 일행을 보더니 고갤 갸웃했다.
그녀의 질문에 옆에 있던 남자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가씨라 불린 이 여자의 이름은 ‘조세아’.
광명 기업의 리더, ‘조원호’ 회장의 하나뿐인 손녀이자, 피닉스 길드 내 최연소 팀장이었다.
당연히 실력으로 팀장 자리까지 오른 건 아니고 빵빵한 뒷배경 덕분이었다.
그녀는 일가에서 유일무이한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조원호 회장은 손녀딸을 끔찍이도 아꼈다.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일까.
길드 내에서 그녀의 성질머리는 아주 더럽기로 유명했다.
“…저 여자, 뭔가 맘에 안 드네.”
조세아가 서아린을 빤히 보며 그렇게 중얼댔다.
그러자 남자는 서아린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조세아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짓밟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번엔 저 여성 짐꾼을 타깃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질 나쁜 양아치들이랑만 어울렸다더니, 대체 언제쯤 철들려나.’
천성이 나쁜 건 아닌데 사회성과 배려심이 너무 부족했다.
뭐랄까, 몸만 자란 어린애 같았다.
“그럼 출발한다!”
조세아 옆에 있던 남자가 그렇게 외치며 길드원들을 이끌고 던전으로 진입했다.
정도현과 서아린까지 집어삼킨 차원 게이트는 본래의 색을 잃고 삽시간에 시뻘게졌다.
예언자가 꿈속에서 보았다던 폐쇄형 게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