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폭발에 떠밀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윤우빈. 그는 허겁지겁 다시 일어섰다.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화르륵-!
저 앞에서 정도현이 야생마처럼 달려온다. 한 손에 활활 타오르는 검을 치켜든 채.
윤우빈에겐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이번 의뢰는 그냥 받지 말 걸 그랬어.
윤우빈은 그렇게 후회하며 빙화심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하지만 그의 심법 숙련도는 고작 6성.
반면에 정도현의 ‘염무심법’은 10성이었다.
게다가 냉기는 화염에 너무도 취약했다.
콰앙-!
둘의 검기가 또다시 충돌했고 윤우빈은 맥없이 밀렸다.
이쪽의 레벨이 훨씬 높은데도 힘 싸움이 성립이 안 됐다.
아니, 레벨이라도 높았기에 겨우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크윽!”
흙투성이가 된 윤우빈이 부들대며 일어났다. 굴욕이었다.
저 불꽃의 검기에 감히 맞서 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 쩔쩔맬 때.
화륵!
뜨겁게 타오르던 불꽃의 검기가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꺼졌다.
그러자 정도현은 벼락을 방출했다.
“……?”
윤우빈은 의아했다.
당연히 화염을 다시 지필 줄 알았는데 처음에 쓴 전격을 꺼냈다.
‘뭔진 모르겠지만 지금이 반격할 기회야!’
화염 속성만 아니면 충분히 해 볼 만했다. 그렇게 판단하고 뛰어들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82레벨 플레이어답게 만만치 않은 주력(走力)이었다.
카앙-!
서로의 무기가 교차했지만, 이번엔 밀리지 않았다.
카가각-!
뇌전과 얼음이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서로의 몸속에 마력이 파고들자 두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냐?”
샤악! 채앵!
다시 여유를 되찾은 윤우빈이 질문하며 검을 휘둘렀다. 정도현은 얼음의 검기를 막아 냄과 동시에 반격했다.
채재쟁-!
둘 사이에 검광이 번뜩이고 마력의 반발음이 악기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떻게 여러 종류의 심법을 쓰는 거지?”
“그냥 잘.”
정도현은 물어본 사람의 맥이 빠질 정도로 성의 없게 대답했다.
뭐, 상관없다. 제압한 다음 천천히 심문해서 알아내면 되니까.
“저 여자도 오래 못 버틸걸?”
윤우빈이 서아린 쪽을 흘끔 바라보곤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부하들이 그녀를 포위하고 합공을 펼치고 있었다.
개인 특성 덕인지 용케 버티고 있다만 그리 오래가진 않으리라.
그녀가 무너지면 그의 부하들이 이쪽에 합세할 터. 시간은 윤우빈의 편이었다.
“야, 저 여자랑 사귀는 사이냐?”
샤악! 챙!
정도현이 대답 대신 묵묵히 검만 휘두르자 윤우빈은 입꼬릴 씩 올리며 말했다.
“얘들아, 그년은 죽이지 말고 반드시 살려 놔!”
이놈이 보는 앞에서 실컷 능욕하고 죽여 버릴 거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곤 정도현의 반응을 살폈다.
도발에 걸려 흥분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안 먹혀도 그만이었다.
“말 되게 많네.”
저급한 도발에 정도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리 중얼댔다. 그와 동시에 천뢰격도 사라졌다.
‘몸속에 축적해 둔 마력이 거의 다했나?’
하긴, 레벨이 한참 낮으니 심법으로 쌓아 둘 수 있는 마력도 그보다 훨씬 적겠지.
상상도 못 한 싸움 방식에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이겼어.’
윤우빈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정도현의 호흡도 급변했다.
스르륵-!
윤우빈의 검을 감싼 냉기가 아지랑이처럼 변해 정도현 쪽으로 스멀스멀 흘러 들어갔다.
마치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뭣……!?”
냉기를 빼앗기자 검기가 흐릿해졌다.
윤우빈이 크게 당황했다.
반면에 정도현의 검기는 상대의 냉기를 먹어 치우고서 한층 강력해졌다.
쩌저적-!
서늘해진 검기가 날아든다. 윤우빈은 그걸 막는 데 급급했다.
‘내 마력을 흡수해? 저런 게 가능한 거였어?’
심법의 이해도와 깨달음이 고작 6성에 머물렀던 윤우빈은 시도조차 못 할 고난이도 응용법이었다.
검을 맞댈 때마다 냉기가 뭉텅이로 사라졌다. 윤우빈은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아까 싸울 때 불꽃과 뇌기에 내상을 입은 것도 한몫했다.
“으, 크윽……!”
타닥.
윤우빈의 땀이 얼어붙어 툭툭 떨어진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전신이 으슬으슬 떨렸다.
움직임과 반응도 갈수록 굼떠진다.
반면에 정도현은 혹한 속에서도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더 공세가 빨라졌다.
“자, 잠깐만!”
윤우빈은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카앙! 쩌저적!
정도현의 칼날이 윤우빈의 팔을 통째로 얼렸다.
“끄아아악!”
팔이 떨어져 나간 듯한 고통에 윤우빈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 소리에 서아린과 전투하던 자들이 공격을 멈췄다.
정도현은 윤우빈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부하들한테 물러나라고 말해.”
“무, 무기 내리고 물러나! 이 새끼들아!!”
목숨이 아까웠는지 윤우빈이 다급히 소리쳤다.
피의 맹약으로 묶여 있던 부하들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후… 진짜 아슬아슬했어요…….”
서아린이 거친 숨을 뱉으며 정도현 옆으로 걸어왔다.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으리라.
정도현은 그녀에게 회복 포션을 주고서 심문을 시작했다.
“청부 살인한 거 맞지?”
정도현이 칼날로 슬쩍 누르자 목 아래로 핏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윤우빈은 급히 고갤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한은성 팀장이냐?”
“그, 그건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제 입으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윤우빈이 덜덜 떨며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정도현이 서아린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알아듣고선 고갤 끄덕였다.
동시에 정도현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윤우빈의 목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푸확-!
윤우빈이 피를 왈칵 쏟으며 기우뚱 넘어갔다.
부하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서아린만 빼고.
촤악! 서걱-!
서아린은 당황한 부하들의 배후로 돌아 급소를 찔렀다.
두 명이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쓰러졌고, 남은 셋은 당황하며 무기를 들었지만 정도현이 그들보다 먼저 움직였다.
남은 적들도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윤우빈과 수하들을 처리하니 레벨이 2나 올랐다. 서아린도 1레벨 올랐고.
“드디어 60레벨이네요.”
서아린이 부럽단 눈으로 보며 축하해 줬다. 드디어 D구역에 올라갈 레벨을 충족했다.
물론 당장 올라가진 않을 거다. 서아린과 박성원도 60레벨을 찍어야 하니까.
‘넉넉하게 두세 달 정도 준비하면 되겠지.’
그때까진 이주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그와 파티원들이 사용할 60레벨대 장비 템을 강화할 계획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라가야 혹시 모를 불상사도 피할 수 있다.
“허윽, 헉……!”
목이 베여 죽었던 윤우빈이 되살아났다. 정도현은 녀석을 곧장 수하로 삼았다.
제 목숨을 아끼던 녀석이니 배신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리라.
수하들도 차례대로 살려 낸 뒤 정도현은 놈을 마저 심문했다.
“한은성 팀장이 시킨 거 맞지?”
“그, 그렇습니다.”
팔을 잃고 폐인이 됐으니 복수심에 눈이 멀 법도 하다. 정도현은 한은성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괜히 일 키워서 좋을 게 없었다.
‘D구역에 가기도 전에 이목을 끌 필욘 없겠지.’
그러니 이번 일은 최대한 조용하고 원만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정도현이 고민할 때, 눈치를 보던 윤우빈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그놈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뭘 어쩌게?”
“간단합니다. 제가 놈을 죽이고 되살리겠습니다.”
윤우빈은 한은성을 죽였다 부활시키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말했다. 서아린도 고갤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저 사람이 실패해도 도현 씨한텐 전혀 피해가 없을 거고.”
“그래, 한 번 해 봐. 단, 실패하면 네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다.”
“바,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윤우빈이 머릴 조아리며 굽신댔다.
굴욕적이었지만 살 수만 있다면 그는 뭐든 할 수 있었다.
“하나만 더 묻자.”
“예?”
“너 혹시 심정환이라고 아냐?”
“…심정환이요?”
정도현의 질문에 윤우빈은 고갤 갸웃했다. 분명 예전에 들어 본 이름인데 누구였는지 딱 떠오르진 않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보던 윤우빈이 누군가를 떠올리곤 흠칫했다.
‘내가 장님으로 만들었던 놈?’
정도현은 그의 반응을 보곤 무언가 직감했는지 빙긋 웃었다.
“그 녀석 눈,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면서?”
“그, 그 녀석이랑 어떤 관계신지…….”
“그냥 아는 사이야.”
쿵!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윤우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대로 땅바닥에다 처박았다.
쿵, 쿵, 쿵, 쿵!
몇 번을 반복하자 윤우빈이 코피를 질질 흘리며 제발 살려 달라 애원했다.
정도현은 그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친절히 설명해 줬다.
“부활 아이템으로 고칠 수 있는 건 죽을 당시의 상처뿐이야. 그러니 녀석의 눈은 나도 당장 못 고쳐.”
“흐, 흐어… 죄, 죄송합니…….”
“사과는 내가 아니라 그 녀석한테 해야지. 그건 나중에 따로 시간 내서 하고…….”
정도현은 녀석의 눈앞에 단검을 들이밀며 말했다.
“앞으론 남 앞길 망치는 추잡한 짓거리 하지 말고 얌전히 살아. 안 그럼 양쪽 눈알을 다 파 버릴 거니까.”
“예, 옙…….”
* * *
한은성이 살인 청부를 넣은 지 며칠이 지났다.
그는 정도현을 처치했단 소식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금방 처리하겠다더니…….’
벌써 삼 일이 지났는데 연락이 안 왔다.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건 말도 안 돼.
놈은 아직 60레벨도 찍지 못했다.
그런데 82레벨 상대로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그래, 불가능하다고…….”
한은성은 그렇게 중얼대며 애써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자꾸 두 눈에 아른거렸다.
놈이 자신의 팔을 손쉽게 앗아 간 광경이.
위잉-!
바로 그때, 윤우빈이 연락용으로 챙겨 준 대포폰이 한 차례 울렸다.
윤우빈한테서 문자가 왔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확인 버튼을 눌렀다.
[일을 완수했다. 약속했던 보수 챙겨서 이쪽으로 와.]
내용을 읽어 본 한은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냥 기우였다.
그는 돈세탁을 마친 지폐들로 채운 가방을 메고 길드 아지트로 향했다.
“왔냐?”
윤우빈은 수하들을 등 뒤에 일렬로 세워 둔 채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은성은 그에게 인사를 하려다 그의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레벨이 왜 떨어졌습니까?”
“글쎄다, 왜 그럴까?”
그 질문에 윤우빈의 표정이 한층 싸늘해졌다. 분위기도 어째 흉흉했다.
한은성은 불길한 상상을 했다.
‘설마 날 죽이려고?’
아니, 그런 짓을 저지를 린 없다.
그의 형, 한은철은 파도 길드의 간부.
한은철은 하나뿐인 혈육을 건든 자를 가만히 놔둘 작자가 아니었다.
그를 해코지하면 파도 길드가 나설 터.
그럼 윤우빈도 필시 죽는다.
분명 그럴 터인데.
“반쯤 죽여서 내 앞에 끌고 와.”
“예.”
“뭐, 뭐……!?”
윤우빈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마력을 못 쓰는 한은성은 저항조차 못 하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
“꺼, 꺼흐… 허윽…….”
순식간에 초주검이 된 한은성.
그가 부하들 손에 포박당한 채 윤우빈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이러냐고? 너 때문에 내 인생 다 말아먹었으니까, 이 개새끼야!”
“끄아악!”
푹-!
윤우빈이 단검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한은성이 한바탕 비명을 질렀다.
그는 숨을 헐떡대며 독기 서린 눈으로 윤우빈을 노려봤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정말 무사할 줄 알아? 우리 형이 누군지 알면…….”
“네 형이 파도 길드 소속인 거? 그건 나도 알아.”
윤우빈은 허벅지에 꽂힌 단검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끄아악! 지, 지금이라도 그만둬! 그, 그럼 그냥 없던 일로…….”
“누구 맘대로 없던 일로 해!”
윤우빈이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 냈다. 그가 단검을 뽑아 한은성의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한은성은 살려 달라고 외치다 결국 고갤 떨궜다. 숨이 멎었다.
그러자 윤우빈은 혀를 차며 정도현에게 받은 부활 아이템을 꺼내 사용했다.
“우리 둘 다 이제 좇됐어. 하, 인생 씨발…….”
* * *
“…뭐라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내가 못난 놈이었어.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형한테 모질게 굴었잖아. 앞으론 안 그럴게.”
한은철은 제 귀를 의심했다.
동생이 돌연 찾아오더니 그에게 사과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형제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한은철은 동생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챙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애는 삐걱댔다.
다시는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 아냐! 너도 여태 힘들고 서운했겠지. 다 이해해.”
“…….”
“먼저 용기 내 줘서 고맙다. 이대로면 죽어서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한은성이 개과천선했다.
최근 안타까운 사고를 겪었지만,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양이다.
그게 너무 대견했다.
한은철이 눈물을 글썽이며 오랜만에 동생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젠장.’
한은철은 동생이 개심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저 정도현이 명령했을 뿐이다. 앞으론 형님한테 깍듯이 굴라고.
“근데 너 레벨은 왜 줄었어? 그것도 3레벨이나…….”
“나도 몰라.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더라.”
“이런 건 못 들어 봤는데…. 혹시 ‘마력 상실증’처럼 무슨 위험한 질병인 거 아냐?”
한은철은 동생의 건강이 걱정되는지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자고 말했다.
그러자 한은성이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알려져서 좋을 거 없잖아. 마탑 놈들이 알았다고 생각해 봐. 당장 실험체로 잡아가려 들걸?”
“…그것도 그렇네. 알았어. 비밀로 할게. 그래도 어디 아프거나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탐구심과 호기심이 왕성했다.
레벨이 줄어든 걸 알면 몰래 납치해 실험이나 해부를 하고도 남을 작자들이었다.
실제로도 부모한테 버림받은 아이들이나, 수용소로 끌려온 범죄자들을 마법 실험에 쓰고자 슬쩍 빼돌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관리국 어깨 위에 앉아서 흑마법사를 규탄하지만, 그들 역시 마법사이기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권력자와 손을 잡았냐 안 잡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 * *
늦은 새벽, D구역 어느 도시 한복판에서 차원 게이트가 붕괴했다.
쿠구궁-!
크고 작은 넝쿨과 나무줄기들이 도심의 건물을 빠르게 뒤덮으며 주민들을 붙잡았다.
“젠장, 이게 무슨 난리냐.”
그리고 이 도시에는 공교롭게도 D구역 마탑주, ‘천주혁’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인 연구실에서 한창 마법 실험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소란을 느낀 것이다.
그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스팔트와 건물들 사이로 커다란 고목이 자라나 있었다.
나무 기둥에는 눈동자와 뾰족한 이빨이 달린 입이 수십 개씩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천주혁은 흉측한 보스에게 성난 목소리로 따졌다.
“네놈이 난동을 부려서 산통이 다 깨졌다.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나보다 강한 인간이여.]
“…허? 몬스터 주제에 말을 하다니.”
[그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미물 주제에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에 천주혁이 발끈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그는 나이를 먹은 게 실감이 갔다.
몸은 무겁고, 사고력은 이전만큼 빠르고 유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젊음을 되찾을 방법을 연구해 왔다.
그런 그의 사정을 안다는 듯 보스 몬스터가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내 열매를 먹어라. 그럼 꺼져 가는 생명이 다시 차오를 것이다.]
“뭐?”
줄어든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그 말에 천주혁이 화염 주문을 날리려다 멈칫했다.
천주혁이 보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