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정도현은 한은성의 팔을 앗아 갔다. 그런데 감사 인사라니?
정도현의 의아한 표정에 한은철이 웃으며 설명했다.
“저주형 아이템에 조종당한 제 동생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놔뒀으면 은성이는 분명 죽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생분이 팔을 잃었죠.”
“그건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비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동생을 많이 아끼는 모양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솔직히 절 만나고 싶다 했을 때 걱정했었거든요.”
“이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길드장님께 부탁해서 D구역 지부장님과 따로 협상했습니다.”
“협상이요?”
“예, 그러니 D구역 관리국도 더는 이번 사건을 걸고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한은철은 정도현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길드의 힘까지 써서 도움을 줬다.
옆에서 듣던 안태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역시 파도 길드군요. 듣던 대로 공명정대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정도현은 안도했다.
파도 길드가 감싸 준 덕에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저들도 그냥 도와준 건 아닐 터.
‘내 환심을 사려는 건가?’
정도현의 예측은 정확했다. 한은철이 품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D구역에 올라오시게 되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안태환의 눈이 커졌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도현을 파도 길드에 스카우트하겠단 거다.
아직 60레벨도 아닌데 저쪽에서 먼저 가입을 권하다니.
D구역에 연줄 하나 없는 정도현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만, 전 파도 길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
그런데 정도현은 가입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줄 몰랐는지 한은철은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 저희 길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D구역에서 저희만큼 괜찮은 길드를 찾긴 힘드실 겁니다.”
“그런 게 아니라 길드에 가입하는 게 내키질 않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정도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질문했다.
“파도 길드의 공략 팀은 던전에 들어가고 다음 던전 공략까지 얼마나 쉽니까?”
“아!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늘 길드원의 안전과 복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거든요. 급한 게 아니면 적정 레벨도 꼭 지키죠.”
한은철이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파도 길드는 아무리 공략 일정이 빡빡해도 최소 삼일은 푹 쉴 수 있었다.
게다가 팀의 수준을 고려해 최대한 안전한 던전으로 배정해 준다.
돈과 실적에 눈이 먼 길드는 길드원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레벨대 던전에 들여보낸다.
그런 곳이랑 비교하면 파도 길드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예?”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전 안전하게 돈이나 벌자고 D구역에 올라가려는 게 아닙니다.”
정도현의 목적은 돈이 아닌 레벨을 빠르게 올려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는 것.
그는 바꾸고 싶었다. 플레이어로 각성할 가망성이 낮단 이유로 버려지는 아이들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도록.
파도 길드에 들어가면 당장은 편하리라.
하지만 안전함을 우선시하는 곳에선 레벨을 올리기 힘들 거다.
“전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고레벨 플레이어요?”
“예.”
한은철이 입을 쩍 벌렸다.
고레벨 플레이어가 된다는 건 위험하면서도 허황된 꿈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끊임없이 도전하는 행위는 그만큼 실패할 때의 위험 부담이 컸다.
예컨대 도전자 백 명이 있다고 치면 그 중 아흔아홉은 죽거나 불구가 된다.
재능을 지닌 나머지 한 명조차 운이 따라 주질 않으면 던전에서 죽는다.
그게 플레이어의 현실이었다.
한은철을 포함해 대다수의 D구역 플레이어들이 왜 도전을 멈추고 안주했겠는가.
게을러서? 겁이 많아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도현 씨, 저도 솔직하게 얘기하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희 파도 길드는 아무한테나 가입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가 볼 때 정도현은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어쩌면 출신의 벽을 허물고 C구역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운이 잘 따라 줬다는 가정하였다.
천재든 범재든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에 실패하면 죽거나 불구가 된다.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을 바엔 적당히 만족하고 재능을 펼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정도현 정도면 D구역에서도 남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다.
“D구역이 이곳보다 살기 좋은 곳은 맞습니다만……. 그건 일반인에 한해섭니다.”
플레이어 및 길드 간의 알력 다툼이 훨씬 살벌하고 활발히 벌어진다.
같은 편이 되지 않으면 견제하고 짓밟는 게 당연하단 인식이 팽배해 있다.
“아무 길드에도 가입하지 않으시면 여기저기서 찔러 댈 겁니다. 물론 저희 길드는 그런 지저분한 짓을 저지르지 않지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현이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한은철은 미련 가득한 눈으로 한참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예, 이번에 도와주신 건 잊지 않겠습니다.”
정도현은 언젠가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한은철이 빙긋 웃으며 D구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다고 했다.
둘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중, 민감한 화제가 나왔다.
“그나저나 동생분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저주 아이템 때문에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아,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한은철은 그렇게 말하곤 씁쓸히 웃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모양이다.
“다만 마력 회로가 심하게 손상돼서…….”
“저런. 그럼 요원 일을 계속하긴 힘들겠군. 젊고 유능한 친구였는데, 참 안타깝게 됐어.”
“예, 곧 은퇴할 겁니다.”
마력 회로란 플레이어의 마력이 흐르는 혈관을 통칭한다.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운용하면 마력 회로에 충격이 가서 내상을 입는다.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망가지면 한은성처럼 아예 마력을 쓰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만다.
플레이어지만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동생 얘기가 나오자 한은철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정도현은 그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동생분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아, 네. 부모님 두 분 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둘 다 플레이어로 각성하게 되면서 사이가 점점 꼬여 버렸다.
형제는 비슷한 시기에 아카데미를 입학했다.
하지만 형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동생은 하위권이었다.
형은 파도 길드에 합격하고 쭉 승승장구했지만, 동생은 몇몇 중견 길드에 가입하려 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결국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관리국 요원에 자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한은성은 한은철을 멀리했다.
* * *
“씨발, 씨바아알!”
쿠당탕! 쨍그랑!
마력 고자가 된 한은성이 하나 남은 팔로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그런데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욱신-!
심신의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길길이 날뛰자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몸 곳곳이 쑤셨다.
그는 눈물을 질질 흘리며 주저앉았다.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한은성의 원망이 정도현을 향했다.
엄밀히 따지면 뇌령검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뇌령검의 강렬한 사념과 분노가 미처 사라지지 않고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걸지도 모른다.
‘죽여 버린다.’
정도현은 이번 사건으로 어떤 책임이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일을 크게 키워 봤자 관리국 입장에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게다가 부하 요원에게 들은 바로는 파도 길드장이 지부장과 따로 만나서 얘길 나눴다고 한다.
‘한은철, 그 자식이 손을 쓴 거겠지.’
정도현이 탐났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생을 이 꼴로 만든 놈을 감싸 주다니.
으득-!
한은성은 이를 갈며 정도현과 잘나신 형을 저주했다.
그러다 뭔가 결심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그가 외투를 걸치고 집 밖을 나섰다.
그는 살인 청부로 유명한 ‘그린 베놈’ 길드를 찾아갔다.
그의 시민증을 확인한 카운터의 접수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관리국의 개가 여긴 어쩐 일로?”
관리국 출신이란 말에 길드원들이 다 쳐다봤다.
“그야 의뢰 맡기러 왔지. 죽여 버리고 싶은 놈이 있어.”
“우리랑 거래한 게 알려지면 그쪽도 밥그릇 뺏길 텐데?”
“상관없어.”
그는 어차피 곧 요원을 관둬야 한다.
잃을 게 없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접수원은 한은성의 한쪽 소매가 헐렁한 걸 보곤 알 것 같단 표정을 지었다.
“그놈이 팔을 그렇게 만들었구만? 만만찮은 놈인가 보네. 레벨이 몇이지?”
“57레벨. 아니, 이젠 58레벨이다.”
“뭐?”
“58레벨?”
그가 정도현의 레벨을 언급하자 길드원들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서로 쳐다봤다.
곧 아지트가 웃음바다로 변했다.
“푸하핫!”
“58레벨? 그럼 E구역 놈이잖아.”
“그런 놈한테 팔을 잃어?”
“뭐, 새로운 시대에 맡기기라도 하셨나?”
길드원들이 대놓고 조롱하자 한은성은 분을 삭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놈은 검기를 쓸 줄 알아!”
“검기?”
“이야, E구역 떨거지치곤 제법이네.”
“형씨, 방심하다 당했구만?”
“에이, 아무리 방심해도 그렇지. 72레벨이 58레벨한테 당하는 건 좀…….”
“놈은 뇌령심법인지 뭔지 하는 걸 쓰는데, 검기가 무슨 벼락처럼 나오더라고.”
이어지는 말에 길드원들은 웃음을 뚝 그쳤다. 시끌벅적했던 아지트에 정적이 찾아왔다.
한은성은 자기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심법이면…….”
“길드장님이 쓰는 그거 맞지?”
길드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수군댔다.
그러다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급히 달려갔다.
한은성은 답답하단 얼굴로 질문했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아, 잠깐 있어 봐.”
“이건 길드장님이 정해야 할 문제 같거든.”
“뭐?”
고작 58레벨 한 명 죽이는 일에 길드장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어이가 없었다.
물론 정도현이 레벨에 비해 특출나게 강한 건 맞다.
검에 몸을 뺏겼을 때 그도 놈의 싸움 솜씨를 똑똑히 지켜봤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레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놈도 쪽수 앞에선 어쩔 수 없어.’
그때 서아린이 회복할 시간을 벌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녀석은 죽었을 거다.
한은성이 그렇게 생각할 때, 아까 뛰어갔던 길드원이 누군가를 데리고 돌아왔다.
“E구역 놈이 심법을 썼다고?”
[윤우빈] [LV.82]
길드원들과 레벨의 앞자리가 달랐다.
심지어 그의 형보다도 1레벨이 더 높다.
누가 봐도 저 남자가 그린 베놈의 길드장이었다.
설마 길드장을 직접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은성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좀 더 자세히 들려줬으면 하는데.”
윤우빈이 손깍지 위에 턱을 괴며 재촉했다.
한은성은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이었던 패배의 순간을 쭉 털어놨다.
이야길 다 들은 윤우빈이 고갤 갸웃했다.
“상대 심법을 보고 바로 따라 했다고? 놈이 진짜 그렇게 말했어?”
“…예, 본인 입으로 그랬습니다.”
“푸하핫! 그 새끼 웃기는 놈이네? 그게 가능했으면 개나 소나 다 심법을 썼겠지.”
윤우빈은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몇 년 전 유적형 던전의 보상으로 운 좋게 심법서를 얻었다.
그도 심법을 익혔기에 안다. 정도현의 주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린지를.
‘원래 쓸 줄 알았는데 여태 숨긴 거겠지.’
윤우빈은 잠시 고민했다.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렸다곤 하나, 정도현은 심법을 쓸 줄 안다.
게다가 남의 도움을 받긴 했어도 무려 72레벨의 한은성을 제압했다.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소위 말하는 천재겠지.’
천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자.
윤우빈은 그런 놈들을 볼 때마다 짓밟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그 버릇을 못 고쳐서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했는데도 여태 고쳐지지 않았다.
남의 재능을 짓밟는 건 할 때마다 재밌고 새로운 기분이니까.
‘E구역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와 비슷한 녀석이 있었다.
‘그 녀석 장님 만들었을 때 참 재밌었는데.’
오래돼서 이젠 이름도 기억 안 난다.
그래도 검 하난 기가 막히게 잘 다뤘던 건 기억난다.
E구역에서 막 올라온 초짜가 검기를 스스로 터득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누가 봐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검술 천재였다.
그래서 양쪽 눈을 멀게 해 줬다.
그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히질 않았다.
‘간만에 재밌을 것 같은데.’
윤우빈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좋아,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해 줄게.”
“저,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보수는 세 배로.”
“세, 세 배?”
액수가 확 뛰자 한은성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고갤 끄덕였다.
정도현을 확실히 죽일 수만 있다면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윤우빈은 측근들을 데리고 E구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