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26화
[오예찬][LV.37]
“장 의원님의 수행원께서 F구역엔 무슨 일이지?”
블랙 스컬의 길드장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오예찬을 노려봤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날 귀찮게 한 거면 쓴맛을 보여주겠다.
37레벨이라 해도 자신보단 한참 낮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길드장은 다음 말에 흠칫했다.
“변신술사, ‘류동하’ 님께 제안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
정체를 간파당한 블랙 스컬 길드장, 류동하는 취기가 싹 달아났다.
그는 곧바로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자 오예찬이 양손을 어깨 위로 올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어필하듯이.
류동하는 언제든 주문을 갈길 수 있게 준비를 끝마친 뒤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땅의 기억을 살펴봤습니다.”
“···땅의 기억? 설마 정령술사냐?”
“예, 하급 정령밖에 못 다루지만요.”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희소한 플레이어, 정령술사.
전투 능력도 준수하지만, 정령술사의 진가는 정령을 이용한 탁월한 정보 수집력이다.
하급 정령까지만 제대로 다룰 줄 알아도 괜찮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류동하가 지팡이를 슬쩍 내리고 질문했다.
“날 왜 찾아왔지?”
“정도현, 누군지 잘 아시죠?”
“너···. 그놈이랑 무슨 관계냐.”
길드를 무너뜨린 주범을 언급하자, 류동하의 눈동자가 살벌해졌다.
오예찬은 공연한 오해를 사지 않게 설명을 덧붙였다.
“진정하시죠. 저흰 정도현과 적대 관계입니다.”
“적대 관계라고?”
“예, 놈을 죽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장 의원 측에서 정도현을 죽이려 한다.
제법 솔깃한 얘기였지만 류동하는 신중히 상황을 살폈다.
“놈을 왜 죽이려는 거지?”
“아까도 말했듯 장 의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를 저희 파벌로 영입하려 했는데···. 자꾸 다른 후보랑 친하게 지내지 뭡니까? 보아하니 조만간 그쪽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 같아서요.”
그전에 제거하겠다는 건가.
하긴. 다음 지부장 선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보통 놈은 아니긴 하지.’
정도현이 다른 지부장 후보 밑에 들어가면 장 의원 측은 거슬릴 터.
장 의원은 무자비한 폭군으로 유명했다.
흑마법사나 레드 플레이어를 동원해 말 안 듣는 유망주를 척살한단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마침 류동하는 이번 표적에 깊은 원한도 품고 있다. 그러니 의뢰를 받아들일 거라 판단했겠지.
류동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미끼를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그쪽은 뭘 줄 거지?”
“길드전에서 패하시고 쫓기는 중이라 들었습니다.”
“···크흠.”
“E구역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새 신분을 드리겠습니다.”
“음. 나쁘지 않군.”
류동하는 눈앞에 떨어진 동아줄을 붙잡기로 했다.
***
한편 정도현은 일주일간의 유령 도시 청소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할당량을 다 채우고도 계속 남아서 토벌 의뢰를 행했다.
그 덕에 다른 팀보다 몇 배는 더 처치했고 추가 보수도 두둑이 받았다.
아쉽게도 최용민을 처치한 이후론 레벨이 더 오르지 않아 45에 그쳤다.
“아쉽긴 뭐가 아쉬워. 일주일 만에 4레벨을 올린 거면 엄청난 거지. 대체 얼마나 죽여댄 거야?”
송정민은 정도현의 레벨을 보곤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저 정도 레벨대면 한 달에 1레벨 올리기도 어려웠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은 정도현처럼 레벨업에 미쳐서 솔로잉을 하지 않고, 던전 공략도 자주 하질 않아서 그런 거지만.
그걸 감안해도 정도현의 레벨업은 지나치게 빨랐다.
“들어갈 만한 던전 없어요?”
“그게 일주일 내내 사냥하다 온 놈이 할 소리냐? 좀 쉬어!”
“저도 힘들면 그러겠는데 아직 할 만해요.”
레벨이 오르니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한층 고강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 이틀 정도 쉬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힘이 남아돌았다.
송정민은 그런 그를 괴물 보듯 바라봤다.
“당장은 너 혼자 들어갈 던전이 없는데.”
“용병으로 다른 파티에 끼는 건요?”
“그건 당연히 있지. 네 레벨이면 어느 파티든 환영할걸?”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다 용병을 뛰겠다고 했다.
언제 일정 잡힐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기다리며 쉬는 것보단 파티 사냥이라도 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의 말에 송정민이 웬일이냐며 눈을 크게 떴다.
‘경험치 손실 난다며 파티 사냥은 질색하던 녀석이었는데.’
이젠 스스로 용병을 자처하다니.
철이 든 자식을 바라보는 기분이 혹 이럴까.
어쩌면 이번 유령 도시 건으로 임시 파티를 맺어본 게 좋은 영향을 준 걸지도 모른다.
“잘 생각했어. 언제까지 혼자 사냥할 순 없을 거 아냐.”
송정민은 껄껄 웃으며 용병이 급히 필요한 파티들을 수소문했다.
십 분도 채 안 걸려 어떤 파티가 정도현을 고용하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경력이 짧은 초짜 용병치곤 몸값도 제법 두둑했다.
“오늘 저녁 7시에 와 줄 수 있냐는데, 괜찮지?”
“그럼요. 쉬는 것보단 훨씬 낫죠.”
“좋아.”
그렇게 정도현은 며칠 내내 용병으로 뛰며, 몇몇 파티와 함께 던전을 공략했다.
‘괜찮을까?’
‘각성한지 이제 두 달 되어간다는데.’
‘F구역 출신은 좀···.’
그와 처음 던전에 들어가 본 플레이어들은 다들 반신반의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돼 공략 경험이 부족한 데다, 레드 플레이어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F구역 출신이지 않은가.
그나마 레벨이 되니 급하게 고용한 거였다.
“뭐, 뭐야?”
그러나 그들의 고정관념은 정도현의 맹활약으로 박살이 났다.
그는 혼자서 몇 인분 몫을 소화해냈다.
걱정과 달리 성격도 그리 모난 곳이 없었다.
“도현 씨, 혹시 저희 파티에 들어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 당장은 혼자가 편해서요.”
“그러시군요. 그래도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다들 그를 정식 파티원으로 영입하고 싶어 했다.
암흑가에서 떠돌던 소문이 E구역 일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스멀스멀 퍼졌다.
오예찬과 함께 E구역으로 올라온 류동하 역시 그 소문을 접했다.
‘놈을 죽일 기회다.’
마음 같아선 당장 놈을 찾아가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오예찬이 만류했다.
대놓고 죽이면 안태환 세력한테 꼬투리를 잡혀 귀찮아진다나 뭐라나.
던전 안에서 죽인 뒤 사고사로 처리하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했다.
정치적 문제가 얽히니 상당히 번잡했다.
그래도 류동하는 새 신분을 얻어 마음 편히 살고 싶었기에 얌전히 때를 기다렸다.
놈이 용병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지금이 적기였다.
“놈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래?”
오예찬이 씩 웃으며 보고했다.
그가 심어둔 레드 플레이어 파티가 정도현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 저녁, 정도현은 그들과 함께 던전 공략에 나선다.
레드 플레이어들이 도와줄 거란 말에 류동하는 자존심이 퍽 상했다.
“나 혼자도 충분한데.”
“확실히 처리해야 하니까요.”
오예찬의 설득에 류동하는 선선히 고갤 끄덕였다.
그놈 손에 죽은 길드원들만 몇 명이던가. 그보단 약하겠지만 절대 방심할 상대는 아니었다.
거기다 오예찬이 말하길, 놈은 개인 특성이 있을 확률이 농후하다고 했다.
‘그래. 좀 이상하다 싶었어.’
놈에게 개인 특성이 있었다면 길드원들이 줄줄이 죽은 것도 납득이 갔다.
류동하도 개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놈으로 변신하면 되나?”
“예.”
류동하는 오예찬이 마련한 시신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
시신의 살점이 증발하여 뼈다귀만 남았고, 류동하의 얼굴과 체형이 시신의 것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정광현][LV.43]
단순히 겉모습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머리 위에 뜨는 정보도 바뀌었다.
이름은 정광현, 레벨은 57에서 43으로 줄어들었다.
이게 류동하의 개인 특성, 「모방」이었다.
그는 시체를 흡수해 그 존재로 변할 수 있다. 게다가 변신한 대상이 지닌 특기나 스킬도 쓸 수 있었다.
단, 변신해도 능력치가 바뀌진 않는다.
“정말 감쪽같군요.”
오예찬은 옆에서 변신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봤는데도 제 눈을 의심했다.
그에게 변신술사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런데 그 능력을 쓰시면 저희가 신분을 세탁할 필요도 없이 E구역에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시체의 피와 살점을 흡수해서 만든 외피라 며칠만 지나도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 그러고 돌아다니면 언데드로 오해받을걸?”
“아.”
그럼 변신을 오래 유지할 순 없겠군.
변신할 때마다 사람을 죽여대면 E구역 관리국이 의심하고 조사할 터.
오예찬이 고갤 끄덕였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금방 죽이고 올 테니 넌 술이랑 음식이나 준비해둬.”
“알겠습니다.”
드디어 놈을 죽일 수 있다. 류동하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날 저녁, 류동하는 늦지 않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정도현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만났다.’
류동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화를 참았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정도현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정도현 씨.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시다고···.”
“별말씀을. 오늘 공략 잘 부탁드립니다.”
정도현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러다 순간 고갤 갸우뚱했다.
그 오묘한 반응에 류동하도 속으로 의아했다.
‘뭐지?’
내 변신은 완벽하다.
시체의 거죽을 뒤집어쓴 거지만 사람의 육안이나 촉감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 기분 탓이겠지.
류동한은 오랫동안 자신을 구해준 개인 특성을 굳게 믿었다.
“아, 저기 다른 분들도 오네요.”
정도현이 대뜸 그렇게 말하며 류동하의 뒤쪽을 쳐다봤다.
류동하도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오예찬이 고용한 레드 플레이어 파티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류동하를 도와 정도현을 죽여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정도현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자, 류동하가 속으로 비웃었다.
자길 처단하러 온 자들과 태평하게 통성명이나 나누고 있다니.
진실을 알고 있으니 촌극이 따로 없었다.
“그럼 인사도 나눴으니 슬슬 출발하시죠.”
“그럽시다.”
류동하가 재촉하듯 말하자 다들 고갤 끄덕이며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
정도현은 류동하와 악수할 때 묘한 악취를 맡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채고 그냥 넘어갈 만큼 아주 미약한 냄새지만, 그의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시체 냄새다.’
그럼 저 마법사가 언데드란 소린가?
하지만 체온이 느껴졌다. 맥박도 정상이었다. 언데드는 아니다.
‘게다가 저놈들은 전부 레드 플레이어야.’
그는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혹시 모르니 상대의 킬 카운트를 보여주는 목걸이 형태의 아티펙트, ‘카인의 눈동자’를 상점에서 구매했다.
덕분에 훤히 보였다.
시체 냄새가 나는 수상쩍은 마법사는 물론이고 다른 파티원들 역시 킬 카운트가 스물이 훌쩍 넘는다.
저렇게 많이 죽였다면 레드 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다.
‘나만 빼고 전부 레드 플레이어라면···.’
대충 느낌이 왔다. 저들은 아마 자신을 죽이러 온 거다. 누군가한테 죽여달라 사주를 받았겠지.
‘장 의원 쪽에서 보냈나?’
추측이 사실이면 민규원이 우려하던 일이 기어코 벌어진 셈.
정도현은 레드 플레이어들의 레벨을 쭉 살펴봤다. 전부 자신과 비슷하다.
‘그럼 저 마법사는 흑마법사인가?’
몸에서 시체 향이 풀풀 풍기는 놈이다.
킬 카운트도 저들보다 두 배는 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대장급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레벨은 43으로 일행 중 가장 낮았다.
‘뭔가 숨기고 있어.’
정도현은 머릴 굴려 계산했다.
자신과 비슷한 레벨의 레드 플레이어가 넷.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사가 한 명.
던전에 들어가면 저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터. 위험했다.
그걸 알면서도 정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마냥 피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까.
‘레벨 올릴 기회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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