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14화
“경험치요?”
“그래.”
“농담이죠?”
고작 그런 이유로 혼자 싸우겠다니.
서아린이 아연실색했다.
정도현의 레벨은 그새 올라 34.
엄청난 성장 속도였지만, 혼자서 척살대를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잘 싸워봐야 간부 한둘 데려가겠지.
‘허세 부리는 건가?’
그녀는 종종 봐왔었다. 여자 앞이라서 젠체하는 남자들을.
그러나 정도현은 그런 한심한 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진짜 이길 자신이 있다고?’
대체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서아린은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할 얘기 다 했으면 이제 돌아가.”
“자, 잠깐만요! 그럼 제 단검은 돌려주세요.”
“내가 왜?”
“정보를 줬잖아요.”
“나도 그 정도는 예상했었어.”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듯 뻔뻔한 그의 대답에 서아린은 머리에 열이 확 뻗쳤다.
“그리고 지금 돌려주면 네가 복수하겠다고 덤빌지도 모르잖아.”
“피의 맹약서를 쓰면 되잖아요.”
정도현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으면 된다.
그녀가 그렇게 주장했지만 정도현은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피의 맹약서는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효력도 사라지지.”
“···.”
핵심을 관통하는 그의 지적에 서아린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그렇다. 피의 맹약은 둘 중 누군가가 죽으면 해지된다. 그런데 서아린은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개인 특성이 있었다.
“죽었다 부활하면 피의 맹약이 유지될까 사라질까?”
“···알았어요! 속여서 미안해요.”
정도현의 예상이 적중했다.
그녀가 죽었다 부활하면 이전에 맺었던 계약도 전부 소멸한다.
그에게 비밀을 들킨 서아린은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심정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돌려주실 거예요?”
원한다면 몸이라도 바칠 기세였다.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거면 돼요?”
“그래. 단, 잔머리 부리지 말고 제대로 해.”
“···.”
더 심한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제안에 서아린은 한참 말이 없었다.
“왜 굳이? 저 말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도 되잖아요.”
“실력만큼은 확실하니까. 어정쩡한 놈 고용할 바엔 네가 낫지.”
정도현은 재차 물었다. 할 건지 말 건지. 그녀는 고갤 끄덕이며 피의 맹약서를 꺼냈다.
그렇게 임시 동맹을 맺은 두 사람.
서아린은 전부터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그런데···. 정말 혼자서 싸울 거예요?”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단검은 믿을 수 있는 지인한테 잠시 맡겨둘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정도현은 일목요연하게 요약해줬다.
하지만 태도가 까칠했다. 서아린이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
‘그래도 저 정도로 자신만만한 걸 보니···.’
도핑제 말고도 그에겐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그게 뭘지 궁금했지만 물어봐도 말 안 해주겠지.
***
그로부터 삼일 뒤. 정도현이 활동하던 구역에 필드형 던전이 발생했다.
그는 늘 그랬듯 혼자 던전에 들어갔다.
게이트 앞에 모여 있던 레드 플레이어들은 그를 보며 수군댔다.
“저 녀석, 걔 맞지?”
“아, 정도현?”
“미친. 벌써 34레벨이야?”
“얼마 전에 20레벨대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죽여둬야 하는 거 아냐?”
저렇게 빨리 성장하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레드 플레이어들이 질시와 함께 위기감도 느꼈다.
저대로 놔두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할 것만 같았다.
남 잘되는 꼴을 보면 눈이 휙 돌아가는 게 레드 플레이어의 본성이었다.
“그런데 누가 죽일 건데?”
“···.”
누군가의 지적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것과 유사했다.
정도현을 죽이려면 이들 역시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게다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이도 여태 없었다.
그런데 34레벨로 성장해버린 그를 죽이라고?
물론 여기 모인 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쪽도 피해가 막심할 터.
당장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만한 이득도 딱히 없었다.
“그냥 놔둬.”
“그래. 알아서 상위 구역으로 가겠지.”
정도현의 행보를 보면 E구역에서 만족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가 윗구역으로 떠나면 더이상 엮일 일도 없겠지.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현실과 타협했다.
‘시비 거는 놈들은 없네.’
정도현은 주변 플레이어들을 쓱 훑어보곤 그들의 심리를 꿰뚫어봤다.
저들은 아마 그를 피해 다닐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경험치 손실로 아쉬움을 느꼈겠지만, 지금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블랙 스컬 놈들이 올 테니까.’
지금은 블랙 스컬을 상대하는 데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레드 플레이어들까지 상대할 여유는 없었다.
‘만반의 준비는 했어.’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는 법. 어쩌면 그가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승부였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정도현은 심호흡하며 떨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기합을 넣었다.
***
정도현이 던전에 들어가고 몇 분 정도 흘렀을까.
블랙 스컬의 흑마법사들이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집합 시간이 몇 분 지나고서야 온 그들에게 관리국 요원들은 뭐라 따지려다, 그들의 살벌한 눈빛을 보곤 말을 아꼈다.
요원들은 한눈에 알아챘다. 저들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걸.
‘원한을 샀나 보네.’
‘누군진 몰라도 불쌍하군.’
필드형 던전에선 플레이어들끼리 싸우다 죽는 건 아주 흔한 일.
관리국 요원들은 제지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말리려다 본인들이 피를 본다.
그리고 필드형 던전은 레드 플레이어들이 대다수.
착한 레드 플레이어는 오로지 죽은 레드 플레이어뿐이다.
“신분 확인됐습니다. 입장하시죠.”
요원들은 그들이 내민 시민증을 확인했다. 정교하게 위조된 것이라 육안으로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었다.
관리국에 연락해서 식별 번호를 대조해보면 바로 탄로 나겠지만, 요원들은 그렇게 꼼꼼히 검문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일이 잡아내면 필드형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으리라.
척살대가 게이트를 통과하자 드넓은 산림이 반겨줬다.
빽빽한 거목과 수풀로 가득한 산맥.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쳇. 하필 산이야?”
숨어다니기 딱 좋은 곳이다. 재수 없게 이런 곳이 걸리다니.
“그래봤자 잡는 건 시간문제야.”
흑마법사들은 정도현이 남긴 발자국을 수색했다.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놈은 혼자 다니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의 발자국과 구별하기 쉬웠다.
흑마법사들이 정도현의 발자취를 좇아 그를 추격했다.
그렇게 몇 분쯤 걸었을까. 정도현이 지나간 곳에 새로운 흔적이 추가됐다.
“어? 이건···.”
“늑대 발자국 같은데요?”
“몬스터가 따라붙었나.”
다수의 짐승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형태는 늑대의 것을 닮았다.
수를 세어보니 얼추 열 마리 정도.
척살대 입장에선 녀석들이 반가웠다.
몬스터 무리가 정도현을 뒤쫓고 있다.
‘네놈 운빨도 여기까지다.’
정도현이 몬스터한테 당할 린 없다.
그래도 놈도 인간인 이상 싸우다 보면 지치겠지.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어부지리. 지친 적을 사냥하는 것만큼 손쉬운 건 없으니까.
게다가 몬스터들과 싸울 땐 다른 곳으로도 움직이지 못할 터.
‘그 틈에 거릴 좁히면 놈을 따라잡을 수 있어.’
행운의 여신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놈 시체는 아주 요긴하게 써주마.”
간부 중 유일한 시체술사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를 부럽단 눈으로 쳐다봤다.
3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의 시체는 좀처럼 구하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러니 이번 임무에서 가장 득 보는 건 시체술사인 그였다.
***
흑마법사들이 추적을 개시하고서 십 분이 지났다. 그러나 정도현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들이 본 건 녀석과 그 뒤를 쫓는 몬스터 무리의 발자취뿐.
“헉, 헉···.”
“후우···.”
흑마법사들이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연신 닦았다.
비탈진 산맥이라 길이 상당히 험했다.
게다가 이들은 전원 마법사. 일반인보단 좀 낫지만 플레이어 중에선 체력이 한참 뒤처졌다.
그런데 이 가혹한 환경에서 강행군을 해대니 점차 지쳐갔다.
짐가방을 뒤적이던 흑마법사가 마지막 남은 물병을 간부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젠장. 이러다 포션까지 마시게 생겼네.”
간부들은 물 한 병을 조금씩 나눠 마시며 욕설을 뱉었다.
인벤토리에 집어넣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아이템뿐.
평범한 물이나 음식 같은 현세의 물건은 넣을 수가 없다.
저레벨 플레이어를 따로 짐꾼으로 고용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젠장. 그 새끼는 왜 보이지도 않냐?”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 경주를 하는 기분이다.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척살대는 오면서 몇 번 정도 몬스터들과 마주쳤다.
그놈들을 처리하느라 잠시 발이 묶였고, 그만큼 추격도 미뤄졌다.
‘하지만 그건 그 녀석도 마찬가지일 텐데.’
게다가 정도현은 혼자였다. 이쪽보다 시간이 더 걸려야 정상. 그런데 왜 따라잡질 못하는 걸까?
짧은 휴식을 끝마친 흑마법사들이 지친 몸을 일으키며 비탈길을 다시 올랐다.
그렇게 십 분이 더 흘렀다.
“···.”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도현의 그림자조차 보질 못했다.
흑마법사들은 이제 욕할 기운도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길드원이 벌떡 일어났다.
길드원이 놀란 얼굴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 저 나무···.”
“뭐야. 왜 그래?”
“저 나무랑 바위! 아까 제가 봤던 겁니다!”
“뭔 소리야. 아까 봤다니?”
안 그래도 힘들어서 짜증 나는데, 이 새낀 또 뭔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간부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째려보자, 길드원이 억울하단 얼굴로 설명했다.
“여기 저희가 아까 지나왔던 곳 근처입니다!”
“뭐?”
“잠깐만···.”
그 말에 간부들도 주변을 빙 둘러봤다.
산속이라서 비슷한 풍경이겠거니 했는데 정말로 낯익었다.
플레이어의 뛰어난 기억력은 한 번 와본 곳이어도 좀처럼 잊지 않는다.
정도현이 교묘하게 경로를 비틀며 왔기에 이제야 눈치챘을 뿐.
“지, 진짜잖아!”
“그럼 같은 장소를 빙빙 돈 거야?”
“대체 왜···.”
뒤늦게 진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 흑마법사들.
정도현이 심각한 길치가 아닌 이상 이건 일부러 한 짓이다.
이유야 뻔했다.
‘우리가 추격하는 걸 눈치챘어.’
하지만 놈이 그걸 어떻게?
간부들이 머릴 굴리다 뭔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암흑가에서 우리 길드원 한 명 실종됐다고 했지?”
“설마···.”
“정도현이 죽인 거였어?”
“그 새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젠장, 우릴 갖고 놀아?”
간부들이 이를 갈며 부들댔다.
놈에게 완전히 농락당했다. 하지만 알아채봤자 늦었다.
식수는 진즉에 다 떨어졌고, 그들의 체력은 거의 바닥났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땡땡 울렸다.
“일단 물러나고 재정비를···.”
간부가 그렇게 말할 때.
피잉-!
시커먼 무언가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화살이었다.
간부는 급히 보호막을 펼쳐 자신을 보호했다.
갑작스러운 저격에 놀라긴 했지만 그래봤자 화살. 블랙 실드면 충분히 막히고도 남을 터.
쩌적-!
그 믿음은 불길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화살이 보호막을 뚫고 그의 어깨에 푹 박혔다.
“끄아아악!”
블랙 실드 덕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길드원들이 달려와 주저앉은 그를 감싸며 부축했다.
화살을 맞은 간부가 신음을 흘리며 동료들에게 경고했다.
“크윽···. 화살에, 씨발! 성수를 발랐어, 크악!!”
흑마법사를 완벽히 겨냥한 아이템, 성수.
방금 날아온 화살은 정도현이 쏜 게 틀림없었다. 녀석이 이 근처에 숨어있는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언제부터 우릴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부스럭!
근처 수풀이 흔들리고, 누군가가 낙엽을 밟았다.
흑마법사들은 곧장 그쪽으로 공격 주문들을 갈겼다.
냉정함은 등산으로 흘린 땀과 함께 증발한 지 오래였다.
콰과광-!
쏟아지는 마법 폭격에 거목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대지에 드러누웠다.
“···해치웠나?”
어떤 흑마법사가 숨을 헐떡이며 저도 모르게 마법 같은 주문을 중얼댔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곳에서 화살이 새처럼 날아들었다.
푹-!
흑마법사의 오른쪽 눈에 명중했다.
한쪽 눈을 잃은 흑마법사가 비명을 꽥 지르며 고꾸라졌다.
“제, 제기랄! 어디야, 당장 나와!”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분명 놈은 혼자일 텐데.
분신술이라도 쓴 건지 사방에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다.
“헉, 헉···.”
“씨발, 대체 뭐야?”
흑마법사들은 서로의 등을 맞댄 채 똘똘 뭉쳤다.
정도현이 어느 방향에서 뛰쳐나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하지만 예상이란 단어는 누군가와의 약속처럼 잘 깨지기에 존재했다.
“컹컹!”
“크르릉!”
“뭐, 뭐야!”
“몬스터···?!”
수풀 속에서 나타난 건 정도현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도 아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늑대 무리였다.
그것들이 진형을 갖추고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마치 잘 조련된 사냥개들 같았다.
“하, 하운드 울프!”
누군가가 놈들의 정체를 간파했다.
갑자기 급습해온 건 ‘하운드 울프’.
소환사들이 환계에서 불러내 사역마처럼 다루는 하급 소환수였다.
“역으로 사냥당하는 기분이 어때?”
“···!”
하운드 울프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 표시된 이름, 정도현이었다.
그가 하운드 울프를 탄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소환사의 정체를 깨닫고선 입을 쩍 벌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