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13화
정도현은 이진성을 맡아줄 지인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진성은 많이 불안한지 정도현의 손을 꼭 붙잡고서 매달렸다.
그럴 만도 했다.
덩치는 곰처럼 크고, 근육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네가 진성이구나?”
송정민은 허허 웃으며 오들오들 떠는 이진성의 머릴 쓰다듬었다.
“진성아, 오늘부터 이 아저씨랑 같이 살 거야.”
“···.”
이진성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손을 꼼지락대던 진성이가 힘겹게 질문했다.
“아빠는···. 절 버린 거죠?”
아무리 다섯 살 먹은 아이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게다가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다.
송정민이 무릎을 굽혀 훌쩍이는 진성이와 눈높이를 맞춰줬다.
그는 덩치랑 안 어울리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진성아.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보호자를 알아볼게.”
“···.”
“그래도 이 아저씨한테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지 않을래?”
송정민은 7년 전 아내를 떠나보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지 못한 게 한이야.’
‘당신. 나중에 좋은 여자 만나서 아이도 낳고, 내 몫까지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줘. 쓸데없이 궁상떨지 말고.’
‘폐만 끼치다 가서 정말 미안···. 그래도 사랑해.’
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플레이어의 기억력은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남들은 편리하다며 부러워하겠지만 송정민에겐 지독한 저주였다.
‘미안해, 여보. 한 단계만 건너뛸게.’
송정민은 그녀의 바람대로 던전 공략을 관뒀다. 대신 안전한 던전 브로커로 전향했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자식을 갖긴커녕 다른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런다고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계속 고집부렸다.
수십 분 전, 정도현에게 연락이 왔었다.
임무 중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찾았다고. 이대로 놔두면 F구역으로 추방될 것 같다며 보호자를 찾아주고 싶다 했다.
‘F구역으로 쫓겨나면 어떤 삶을 살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차마 두고 볼 수 없었겠지.’
딱한 사정을 들은 송정민은 저도 모르게 자기가 맡겠다고 답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의 마음이,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말하고 나서 그도 깜짝 놀랐다.
남의 자식을 돌보겠다니. 왜 사서 고생한단 말인가.
‘근데 직접 만나 보니 알겠어.’
진작 이렇게 할걸. 속이 다 후련했다.
송정민은 떨리는 눈으로 이진성을 바라봤다.
이 아이에게 거절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대답을 기다렸다.
“···저 여기 있어도 돼요?”
“그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전 플레이어도 아닌데···.”
“그런 건 상관없어.”
송정민은 이진성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줬다.
그러자 이진성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엄마에게 배웠던 배꼽 인사를 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 표현이었다.
“흐윽, 고맙, 습니다···.”
내일부로 이진성은 출생신고도 못한 사생아 신세를 벗어나, 송정민의 아들로 입양된다.
필요한 서류와 절차들은 민규원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다.
저 어린 애를 F구역으로 추방하자니 그도 양심에 찔렸겠지.
***
구출 임무가 끝나고 일주일이 흘렀다.
F구역 중심지 번화가.
그곳에 회색빛 로브를 걸친 무리가 도착했다. 그들은 블랙 스컬의 길드원들이었다.
“젠장, 없잖아!”
그들은 정도현의 할아버지, 최진영을 인질로 붙잡고자 여기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집을 덮쳐보니 텅 비어 있었다. 허탕 친 흑마법사들이 부들댔다.
“옆집에 물어보니 며칠 전에 떠났답니다.”
“젠장, 어디로 갔는데?”
“E구역이요.”
최진영은 진즉 E구역으로 이주한 뒤였다.
흑마법사들은 어쩔 수 없이 윗선에 그대로 보고했다.
정도현을 F구역으로 꾀어낼 중요한 인질을 놓치자 길드 상층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주 허가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 걸릴 텐데. 어떻게 벌써···.]
“놈이 관리국에 뇌물을 먹인 거 아닐까요?”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인데 무슨 뇌물이야.]
놈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다.
블랙 스컬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나느냐.
아니면 E구역에 직접 들어가 보복하느냐.
‘후자는 리스크가 너무 커. 득과 실을 따져보면 물러서는 게 맞다.’
간부와 말단이 한 명씩 죽긴 했어도 길드 입장에선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물러날 순 없었다.
‘각성한 지 고작 한 달 된 애송이야. 그런 놈한테 계속 당하기만 하고 물러섰다간···.’
쉬쉬한다 해서 계속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다.
내부 고발로 언젠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터.
그럼 블랙 스컬의 명성은 저 밑바닥까지 추락할 것이다.
흑마법사들이 사는 세상에선 얕보이는 순간 바로 잡아먹힌다.
블랙 스컬의 간부가 친했던 길드원의 복수를 해주려다 되레 당했다.
그런데 블랙 스컬은 복수도 안 해주고 흐지부지 넘어갔다더라.
그런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 길드의 미래도 끝장이다.
‘어쩔 수 없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정도현만큼은 죽여둬야 한다.
그래야지만 다른 길드 놈들이 우습게 보지 않을 터.
상층부는 회의 끝에 결정했다.
[너흰 E구역으로 올라가서 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둬라.]
“놈을 죽이는 겁니까? E구역 안에서요?”
[그래. 마스터의 뜻이다.]
상황을 보고하던 흑마법사 조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예삿일이 아니었다.
[쫄지마. 너흰 조용히 정보만 수집하면 돼. 그 녀석이 던전에 들어가면 간부들이 나서서 죽일 거니까.]
“아!”
간부들이 나선단 말에 흑마법사 조장은 속으로 안도했다.
‘던전 안에서 죽이면 증거도 남지 않아.’
게이트 앞에서 경계를 서는 요원이 있겠지만 크게 문제 될 것 없었다.
제압한 뒤 최근 기억을 잊게 만드는 주술을 걸면 그만이다.
간부급이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터.
요원들은 자신들이 왜 기절했는지도 기억 못 하리라.
정도현은 던전에서 사고사한 것으로 처리될 테고.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은 상층부의 지시에 따라 곧장 E구역으로 잠입했다.
그렇게 각지에 흩어져서 며칠 동안 정도현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그러다 놈이 거주하는 구역의 암흑가를 탐문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수확을 건졌다.
“그게 정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흑마법사들한테 붙들려 으슥한 뒷골목까지 끌려온 레드 플레이어.
남자는 벌벌 떨면서 그들이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했다.
“정도현, 그놈이 필드형 던전에 자주 들락거린다고?”
“예, 옙! 얼마 전에도 제 친구들이 놈을 목격했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필드형 던전은 돈이 절실하거나 레드 플레이어들이 자주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곳인데.
정도현은 거길 왜 자주 들어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이건 놈을 죽일 중요한 단서였다.
‘필드형 던전에선 처리하기 훨씬 쉽다.’
흑마법사들도 종종 관리국의 허가를 받고 필드형 던전에 들어간다.
거기선 플레이어의 시체를 구하기 쉬우니까. 여차하면 직접 사냥해도 괜찮고.
물론 하이에나들이 때때로 사자를 사냥하듯, 레드 플레이어 무리한테 역으로 잡히기도 한다.
각설하고, 거기서는 눈치 볼 필요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놈이 필드형 던전에 들어가는 순간을 노린다.’
흑마법사 조장은 정도현의 레벨이 몇인지도 확인했다.
레드 플레이어는 지인에게 전화 찬스를 써서 퀴즈의 정답을 알아냈다.
“사흘 전에는 34레벨이었답니다.”
“···34?”
한 달 만에 34레벨이라니?
나보다 높잖아. 흑마법사 조장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필드형 던전을 자주 돌았어도 그렇지.’
그렇게 빨리 성장하는 게 정녕 가능한가?
누가 보면 그 녀석만 경험치를 더 많이 받는 줄 알겠다.
하여튼 한시라도 빨리 놈을 죽여야 한다.
‘그냥 놔뒀다간 진짜 괴물이 되겠어.’
지금이라도 알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흑마법사 조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드 플레이어를 쳐다봤다.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맙다. 덕분에 꽤 도움이 됐어.”
“그럼 살려주시는···.”
“보답으로 고통 없이 보내주지.”
덥석!
흑마법사 조장이 남자의 목을 붙잡고서 생기를 쭉쭉 빨아먹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미라처럼 비쩍 마르더니 그대로 절명했다.
일반 시민은 관리국 눈치가 보여서 건들기 껄끄럽지만, 이런 레드 플레이어는 몇 명쯤 죽여도 티도 안 났다.
암흑가에선 저들끼리 싸우다 죽고 죽이는 게 일상인 동네였으니까.
흑마법사 조장은 알아낸 정보를 길드 상층부에 알린 뒤, 길드원들에게 소집 신호를 보냈다.
“···응?”
집합 신호를 보냈는데 길드원 한 명이 응답하지 않았다.
전화도 걸어봤지만 역시 안 받았다.
흑마법사 조장은 혀를 찼다.
‘레드 플레이어들한테 역으로 사냥당했나.’
머저리 같은 놈. 방심하다 당했나 보군.
***
같은 시각. 연락이 두절됐던 길드원.
그는 누군가의 발밑에 머릴 짓밟힌 상태였다.
“흐음. 흑마법사들이 왜 도현 씨 뒤를 캐고 다닐까요?”
“사, 살려주세요···.”
흑마법사를 제압한 건 암살녀, 서아린이었다.
그녀는 고양이로 변신하는 디버프에서 막 벗어나 암흑가로 복귀했다.
그런데 웬 놈들이 정도현의 정보를 캐고 다니는 게 아닌가?
“도현 씨가 그쪽 길드원을 죽였다고요?”
“예, 예···.”
서아린은 길드원의 머릴 꾹꾹 눌러대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정도현이 이들 손에 죽으면 그녀도 곤란했다.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은 높은 확률로 사라지니까.’
레드 플레이어들이 플레이어를 사냥하는 이유는 편한 레벨업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상대가 가진 아이템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착용 중인 아이템만 확정적으로 획득하고, 인벤토리에 보관된 것들은 낮은 확률로 떨군다.
만약 그녀의 단검이 아직 정도현의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다면?
“척살대 전력은 어느 정도죠?”
“고위 간부가 셋이고, 정예 길드원이 대여섯 명쯤 온다고 들었습니다···.”
“언제쯤 급습할 계획이죠?”
“정해진 날짜는 따로 없고, 놈이 던전에 들어가면 뒤쫓기로 했습니다.”
고위 간부는 40레벨 중반.
정예 길드원은 30레벨 후반이었다.
고작 한 명 죽이려고 그만한 인원을 투자하다니.
‘하긴. 만만한 남자가 아니긴 하지.’
서아린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녀는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찡그린 표정이 확 풀렸다.
남자라면 눈을 떼기 힘들 만큼 고혹적이었지만, 그녀 발밑에 깔린 길드원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직면해 있어서 쳐다볼 여유도 없었다.
‘정보를 알려주고 단검을 돌려받으면 되잖아?’
척살대가 올 것쯤은 그도 알고 있으리라.
정도현이 그 정도도 생각 못 할 린 없을 테니.
하지만 척살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언제 들이닥칠지는 잘 모르고 있을 터.
적에 대해 알고 싸우는 건 상당히 큰 이점이었다.
“정했어요.”
“뭐, 뭘 말씀이십니까?”
“도현 씨를 도와주기로.”
길드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척살대의 전력을 알고도 그를 도와주려 하다니.
“이것저것 알려줘서 고마워요, 흑마법사 씨. 그럼 안녕히 가세요.”
“자, 잠깐···!”
푹!
그녀는 무정하게 단검을 쑤셔 넣었다.
길드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
서아린은 정보 상인을 통해 정도현에 대해 조사해뒀다.
그가 사는 곳은 물론이고, 어떤 던전 브로커와 거래하는지도 안다.
똑똑-!
서아린은 그가 머무는 반지하 건물 앞에 도착했다.
낡은 철문을 두드리자 정도현이 문을 열며 얼굴을 비쳤다.
그는 곧장 장비템을 착용하며 전투 모드에 돌입했다.
죽은 사람이 집에 찾아왔는데 조금도 놀라질 않는다. 마치 그녀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물론 그럴 린 없겠지만.
서아린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싸우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서아린은 그가 무장했음에도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와 싸울 생각이 없었으니까.
“근데 별로 안 놀라네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데.”
“부활할 수 있는 개인 특성이 있겠지. 레벨이 줄어든 건 페널티일 거고.”
“와, 정답!”
서아린은 순순히 인정했다. 잡아떼봤자 속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는데, 잠깐 얘기 좀 할래요?”
정도현은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그가 조그만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 건네주자,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유혹하듯 웃었다.
하지만 정도현은 목석처럼 무덤덤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척살대에 대해 얘기했다.
정도현은 담담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도 그들이 조만간 찾아올 걸 예상했었다.
“고위 간부 셋, 정예 길드원은 다섯. 각각 40레벨 중반, 30레벨 후반이에요.”
“그걸 왜 알려주지?”
“제 단검, 아직 가지고 있나요?”
정도현은 인벤토리에서 그날의 전리품을 꺼냈다. 서아린의 단검이었다.
그녀가 간절한 눈으로 쳐다봤다. 새끼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귀여웠지만, 정도현은 눈 하나 꿈쩍 안 하며 다시 집어넣었다.
서아린이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저랑 거래해요.”
“무슨 거래?”
“척살대랑 싸우는 거, 제가 도와드릴게요. 대신 그 단검을 돌려주세요. 평범한 아이템이지만, 제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소중한 물건이에요.”
“필요 없어.”
“예?”
“도와줄 필요 없다고.”
정도현이 단칼에 거절했다. 서아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자신의 도움을 거부하다니. 이해가 안 됐다.
“자, 잠깐만요! 절 못 믿겠어서 그러는 거죠? 그럼 피의 맹약서를 쓸게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예? 그럼 왜···.”
정도현은 팔짱을 척 끼며 당당히 말했다.
“경험치 독식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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