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1원 상점 - 08화
정도현의 말장난에 유승혁은 주문 캐스팅을 일시 중단했다.
파티원도 없으면서 너무도 여유로운 태도가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너, 대체 뭐 믿고 까부냐?”
유승혁은 겨눴던 지팡이를 슬쩍 내리며 질문했다.
43레벨 플레이어가 죽여버리겠다고 벼르는데 눈 하나 꿈쩍 안 하다니.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면 저래선 안 됐다.
정도현은 대답 대신 칼을 뽑았다.
‘혹시 정신에 뭐 문제 있나?’
아니면 F구역 출신이라 숫자를 제대로 못 세는 건가. 상식적으로 26레벨이 43레벨을 이길 리 없었다.
그런데 놈이 하는 짓거릴 보면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이다.
“각성한 지 한 달 됐다며? 열심히 노력한 건 알겠는데 주제를 알아야지.”
유승혁은 잠시 멈췄던 주문을 다시 캐스팅하고 지팡이를 겨냥했다.
그러자 주위로 회색의 영체들이 모여들었다. 사이한 기운이 감돌자 정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령술사인가.’
사령과 악귀들을 이용해 온갖 저주를 내리는 사령술사.
신성력이나 성유물 같은 아이템이 없으면 마땅한 대처법도 없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영혼을 벨 순 없었으니까.
“끔찍한 시간을 보내게 해주마!”
유승혁은 사령들에게 명했다. 상대에게 들러붙어 저주를 내려주라고.
악귀들이 낄낄대며 정도현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귓가로 놈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무력함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고통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맞거나 움직일 때마다 통증에 시달립니다.]
[출혈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일시적으로 재생력이 대폭 줄어들고 상처가 잘 아물지 않습니다.]
···
···
모래 주머니를 찬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온갖 저주에 걸렸단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도배됐다.
정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최하급 성수를 꺼냈다. 그걸 본 유승혁이 피식 웃었다.
“꼴에 성수를 준비해뒀네? 근데 몇 개론 부족할···.”
정도현은 성수를 꺼내고 또 꺼냈다.
한 병, 두 병, 세 병···.
그의 손에서 성수가 끝없이 튀어나왔다.
“끼에에엑···!?”
“크어어어!”
저주의 목소릴 퍼붓던 악령들이 자지러지듯 괴성을 뱉으며 그에게서 급히 떨어졌다.
“뭐, 뭐야?”
사용한 성수가 열 병을 넘어갔다.
아무리 최하급이라도 성수는 성수. 회복 포션보다 두어 배는 비쌌다.
성수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신성력을 지닌 소수의 사제들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귀한 걸 저렇게 많이 들고 다니는 놈은 처음 봤다.
사제들도 저렇게 많이는 안 들고 다닐 거다.
촤악-!
정도현은 그걸로도 모자란지 성수를 한 병 더 꺼내 무기에 쫙 뿌렸다.
“무기에 성수를 바르면 악령에게 추가 피해를 줄 수 있다던데. 진짜인지 한 번 테스트해볼까?”
“···!”
서걱-!
은빛 섬광이 번뜩이며 악령이 반으로 갈렸다. 베여선 안 될 존재가 갈기갈기 찢겨 소멸했다.
빠득-!
유승혁이 이를 갈며 다음 주문을 외웠다.
“「망자 폭탄」!”
끼아아아아!
유승혁이 소환한 망자들이 제각기 절규를 뱉으며 시커먼 불꽃으로 변했다.
그게 지팡이 끝으로 모여들더니 몇 개의 구체를 이뤘다.
시커먼 불덩이가 날아들자 정도현은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방향을 꺾어 그를 추격했다.
“피해봤자 소용없어!”
원귀를 불살라 만든 주문이다.
그러니 산 자에게 집착한다.
정도현의 몸에 들러붙어 생명력을 빨아먹기 전까진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정도현은 불덩어리들을 뒤에 달고서 유승혁 쪽으로 냅다 달려들었다.
노림수가 너무 뻔했다. 유승혁은 코웃음을 쳤다.
“「망령 장벽」.”
유승혁은 사령한테서 마력을 뽑아내 보호막처럼 둘렀다.
그의 망령 장벽은 26레벨의 칼질 한 번에 깨질 만큼 연약하지 않았다.
‘이제 어쩔 거냐?’
뒤에선 불덩어리들이 바짝 쫓아오고 있고, 앞에는 철벽같은 방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정도현이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어?”
거기엔 매직 스크롤이 들려 있었다.
번쩍-!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유승혁을 지켜줄 보호막이 뿔뿔이 흩어졌다.
‘실드 브레이크라고?’
눈에는 눈. 마법을 상대할 땐 마법이란 말이 있다.
실드 브레이크는 보호 주문을 부수기 위해 고안된 주문이었다.
초급 주문이었지만 중급의 보호막도 단번에 지울 수 있어, 성능만 놓고 본다면 중급 주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문의 사거리가 너무 짧아서 마법사가 실전에서 써먹으려 들면 죽기 딱 좋았다.
그래서 근접 전투를 주로 하는 플레이어들이 매직 스크롤로 들고 다니다 사용했다.
‘저걸 왜 저딴 애송이가!’
물론 매직 스크롤의 가격은 만만찮았다.
그러니 저레벨 플레이어가 들고 다닐 아이템은 아니었다.
유승혁은 뒤늦게 당했단 걸 깨닫곤 욕설을 뱉었다.
“이런 미친···!”
쾅-!
정도현이 칼을 휘두름과 동시에 그 뒤쪽에 있던 망자 폭탄들이 폭발했다.
유승혁이 어쩔 수 없이 터트린 것이다. 폭발에 떠밀린 정도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굴렀다.
유승혁도 폭발 반경 안에 있어서 함께 휘말렸다.
“쿨럭! 큭, 이런 씨···.”
유승혁의 얼굴이 화상으로 흉하게 변해버렸다. 눌어붙은 피부에 진물도 줄줄 흐른다.
하지만 유승혁은 그깟 고통보다는 자존심에 훨씬 큰 상처를 입었다.
자기가 쏜 주문에 술사 본인이 다치다니. 이보다 더 쪽팔리는 일이 어딨을까.
‘그래도 그 새낀 확실히 뒈졌겠지.’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실컷 가지고 놀다 질릴 때쯤에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 시건방진 녀석에겐 과분할 정도로 편한 죽음이었다.
타앗-!
그렇게 생각하던 유승혁의 귓가로 의문의 소리가 들렸다.
마치 땅을 박차는 발소리 같았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서 미리 메모라이즈해뒀던 주문을 발동했다.
“아, 「악령의 분노」!”
화아악-!
그를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소용돌이처럼 마구 회전했다.
유령이 물건을 움직이는 이른바 폴터가이스트라 부르는 현상과 흡사했다.
카가각-!
그를 노리던 칼날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를 뚫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너 이 새끼. 어떻게 살았어!”
놀랍게도 정도현은 그 화마에 삼켜지고도 살아 있었다. 심한 화상으로 피부가 너덜너덜해졌지만.
망령 폭탄은 그가 쓸 수 있는 주문 중에서 최고 화력을 자랑한다.
30레벨이 넘는 플레이어라도 일단 명중만 하면 일격에 즉사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정도현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몸소 보여줬다.
그는 부러진 칼을 휙 집어 던지고 회복 포션을 꺼냈다.
상점 레벨이 꽤 올라간 덕에 품질도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향상됐다.
‘아슬아슬했어.’
정도현은 폭발에 휩쓸리기 직전, 「실드」 매직 스크롤을 썼다. 그런데도 빈사 상태가 됐다.
‘보호구도 최하급에서 하급 세트로 바꿨는데.’
아무래도 상대와 레벨 차가 심해서 추가 데미지가 들어온 듯했다.
그래도 한 방에만 안 죽었으면 괜찮다. 반격할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체력을 300만큼 회복합니다.]
[체력을 300만큼 회복합니다.]
[체력을 300만큼 회복합니다.]
···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그의 HP가 쭉쭉 차올랐다.
플레이어는 죽기 직전에서도 HP만 회복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며칠 동안 환상통은 남겠지만, 당장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었다.
불과 몇 초 만에 정도현의 육신이 원상복구됐다.
심각한 화상 자국들도 씻은 듯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라도 되돌린 것 같았다.
그러자 유승혁이 절규했다.
“씨발, 이건 말도 안 돼!”
그는 비정한 현실을 부정하며 남은 사령들을 마구 쏴댔다.
하지만 하급 사령은 정도현이 쓴 성수의 버프 효과 ‘성령의 기운’으로 가까이 접근조차 못 했고, 중급 사령들은 성수를 발라둔 칼에 뭉텅이로 썰려 소멸했다.
사령들이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자 유승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포션이었다.
마력 회복용인가 싶었지만 색깔이 달랐다.
마력 회복 포션은 대체로 푸른색인데 저건 진한 보랏빛이었다.
“내가···. 너만큼은 기필코 죽인다!”
유승혁이 꺼낸 건 포션이 아니라 마력 강화제였다.
몇 분간 술사의 마력을 대폭 강화해주는 도핑제로, 간부급 흑마법사들이 쓰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심해서 자칫하다 자멸할 수도 있기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꺼내질 않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
아니, 지금은 고양이가 생쥐 상대로 궁지에 몰린 거였지만.
정도현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상대도 비장의 패를 꺼냈으니까.
“크으···.”
유승혁의 안면 여기저기에 혈관이 굵다랗게 튀어나왔다.
마치 피부 안쪽에서 애벌레가 꿈틀대는 것 같아 보기 징그러웠다.
그의 눈동자는 보랏빛 안광이 서렸다.
‘도핑제 같은 건가.’
그럼 주문의 화력이 더 올라갔으리라.
아까도 겨우 버텼는데 이번에 맞으면 포션을 쓸 틈도 없이 골로 갈 것이다.
정도현은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망령의 손아귀」!”
유승혁은 상대를 속박하는 저주를 발동했다.
바닥에서 시커먼 손이 수십 개나 솟아났다.
그것들이 그림자처럼 쭉쭉 늘어나며 정도현을 붙잡으려 했다. 독사가 살점을 물어뜯으려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붙잡히면 죽는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정도현은 칼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계속 전진했다. 멈춰선 안 된다.
촤좌좌좍-!
검은 손이 그의 칼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속박 주문이 안 통하자 유승혁은 피눈물을 줄줄 쏟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다음 주문을 발동했다.
“···쿨럭! 「죽음의 창날」!”
이번엔 정도현의 주변 공간이 일렁이며 찌그러졌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자 뾰족한 뭔가가 그를 향해 불쑥 찔러 들어왔다.
그것은 악귀들의 혼을 벼려내 만든 가시 형태의 창이었다.
촤악!
미간을 노리며 날아든 죽음의 창.
정도현은 고갤 확 꺾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의 뺨을 스치며 길쭉한 상흔이 남았다.
피를 닦을 여유는 없었다.
파바바밧!
공간이 연달아 일그러지더니 사방에서 창이 쏘아졌다.
정도현은 피하거나 튕겨내면서 어떻게든 나아갔다.
주문을 튕겨낼 때마다 칼은 부러지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검이 부러질 때마다 새로운 검으로 교체하며 꿋꿋이 버텼다.
“죽어! 좀 죽으라고!!”
유승혁은 한계에 달했다. 피를 왈칵 토하면서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정도현이 눈을 반짝였다. 조금만 버텨도 알아서 자멸할 것 같다.
‘그것도 어렵지만.’
이쪽은 주문 하나만 명중해도 죽거나 치명상이었다.
그렇게 십여 초가 지났다.
더는 공간이 찌그러지지도, 거기서 창날이 나오지도 않았다.
정도현은 거친 숨을 훅 몰아쉬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번엔 어떤 주문이 날아들까.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
촤르륵!
뭔가가 그의 발목을 칭칭 휘감았다.
마력으로 이뤄진 사슬이었다.
창을 막거나 피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미처 발아래를 살피지 못했다.
“드디어 잡았다, 이 날파리 같은 새끼!”
유승혁은 지팡이를 빙빙 돌려대며 마력 사슬을 조종했다.
쾅! 쾅!
사슬에 발이 묶인 정도현은 질질 끌려다니다 바닥에 마구 패대기쳐졌다.
“···컥!”
그의 HP가 10% 아래로 뚝 떨어졌다. 순간 등골이 부러진 줄 알았다.
정도현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서 포션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경고음이 들렸다.
[속박 상태입니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낼 수 없습니다.]
정도현은 욕설을 뱉으며 발목에 족쇄처럼 묶인 마력 사슬을 칼로 내리쳤다.
하지만 부러진 건 사슬이 아니라 그의 칼이었다.
그의 발악에 유승혁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죽어라!”
그도 남은 마력이 얼마 없는지 앙상한 마력 화살 몇 발을 생성했다.
하지만 그거면 숨통을 끊기엔 충분했다.
시커먼 화살들이 일직선으로 날아든다.
‘지금!’
정도현의 팔이 움직였다. 그는 부러진 칼을 투창 던지듯 힘껏 날렸다.
자신이 이겼단 생각에 완전히 방심 중이었던 유승혁. 그는 반응조차 못 했다.
푹-!
반쪽짜리 칼날이 유승혁의 복부를 뚫고 허리 뒤로 머릴 빼꼼 내밀었다.
“끄아아악!”
술사의 집중력이 무너지자 날아오던 마력 화살과 발목의 사슬이 사라졌다.
속박 상태에서 풀려난 정도현은 포션을 사용하고 일어났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끝날 때까지 방심하면 안 되지.”
“크, 크으···. 개, 새끼가···.”
유승혁이 피를 질질 토하며 땅바닥을 기었다. 이걸로 결착이 났다.
그새 체력을 전부 회복한 정도현이 그의 앞에 서며 말했다.
“친구 곁으로 보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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