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86화 (186/187)

< 186화 영세불변의 조종성헌(完) >

“오랜만일세.”

“예. 미륵 성하.”

“음. 이제는 대명의 황상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그저 속세의 호칭일 뿐입니다. 저는 충실한 미륵의 신도입니다.”

왕선은 옅게 웃었다.

주체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한데, 왜 머뭇거렸나.”

“······.”

“허. 설마 내가 모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건가?”

“···오해가 있으십니다.”

“오해라. 그래. 부황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니 충분히 고민할 수도 있지.”

“과연 미륵이십니다.”

“한데, 탕화의 대군은 왜 기다렸지?”

왕선은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대군이 당도하면 일거에 북상하려고 했겠지.”

“아닙니다.”

“하여, 대명의 힘을 보이고자 했겠지.”

“아닙니다.”

“천한 오랑캐에게 짓밟히는 위대한 한족의 땅을 지키고자 했겠지.”

“아닙니다.”

“내 말이 맞다.”

“제가 싸우고자 했다면 제국이 화북을 도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로 압도적인 자신감.

대륙 최고의 군사 지휘관다운 패기였다.

주체는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덧붙였다.

“아닙니까?”

왕선은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응수했다.

“자네는 내게 졌어.”

“다시 해보실 생각 있습니까?”

“그 시작은 자네의 수급으로 하겠네.”

“이런.”

주체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도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미륵 성하께서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다른 이들은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

“저도 살아야지요.”

“한데, 왜 남은을 탐낸 거지?”

“탐나는 건 탐나는 거지요. 그렇다고 강제한 건 아닙니다.”

여기까지.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정리하지.”

“제국의 제후가 되는 건 무리입니다.”

“그렇겠지.”

과거 송이 금나라에 조공을 바쳤지만 황제국이었다.

지금 제국이 명에게 칭제 건원을 내려놓고 제후가 되라고 하는 건 대단한 무리수다.

만일 그랬다가는 명의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할 거다.

그러면? 제국은 휘청거릴 수도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여기서 적당한 타협을 하는 게 합당했다.

“조공은 명이 제안한 수량으로 하겠네.”

“감사합니다.”

“단,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은 볼모로 보내게.”

거센 반발이 있을 거다.

그러나 관철될 것이다.

명의 신하들은 이를 악물면서 인정하게 될 거다.

그리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부르짖을 것이다.

“기간을 정하지요.”

“최소한 1년.”

“미륵의 신도가 되는 겁니까?”

“물론일세.”

“알겠습니다.”

이러면 되는 거다.

어차피 힘을 이용한 압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미륵의 권능은 정상적인 질서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주체.”

“예.”

“천하의 권력은 어디서 나오지?”

“황도에서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게.”

“서경에서 나옵니다.”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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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대륙 원정은 마무리됐다.

반면, 대륙의 정세는 실로 어지러웠다.

남경을 거점으로 한 주체의 명이 곧장 체제 정비에 나섰으나 사방에서 거병이 일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주체는 역량을 집중하여 토벌을 진행했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군웅들이 합종연횡을 일삼으면서 주체에게 대항한 결과였다. 또한, 그들은 앞다퉈 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외교적으로 안위를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왕선의 방침은 단호했다.

불간섭주의.

철저하게 방관하기로 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건 제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대륙의 판도를 획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지만 그럴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현재 제국은 하북을 소화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단지 점령지가 아니라 제국의 영토로 확고한 통치기반으로 삼고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듯 소화불량에 걸려서 제 밥상의 반찬이 남은 상태에서 옆집 밥상을 탐내는 건 실로 우매한 짓이었다.

그리고

“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전에 윤소종이 완성한 법전이었다.

한 장씩 넘기면서 꼼꼼하게 읽었다.

물론 민주 공화정에서 대권을 넘볼 수준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사람의 눈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훌륭했다. 당대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건대 실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 시대에 투표로 정치인을 선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이는 지금 가능했다.

그러나 윤소종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었다.

왕선은 한참이나 미동도 없었다.

...어찌해야 할까.

그냥 묻어버릴까? 그렇게 하더라도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을 거다.

당대인은 물론이거니와 후대에서도.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역사의 흐름과 제국의 앞날을 저해할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왕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딱 10년이구나.”

웃음은 쓴 미소로 바뀌었다.

“아쉽군. 너무 아쉬워.”

진심으로 아쉬웠다.

참으로 아쉬웠다.

엄청난 권력의지가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뿌리쳐야 했다.

그래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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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황제 왕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연신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왕우의 반응을 백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금 내뱉은 말은 유사 이래 없었던 거였다.

왕선은 아쉬움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용퇴하고자 하옵니다.”

용퇴(勇退).

이 간단한 두 글자에 담긴 뜻은 간단하지가 않았다.

조금도 꺼리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물러난다. 혹은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스스로 관직 따위에서 물러남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 아름다운 미덕(美德)이다.

하여,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제 발로 물러난다?

그건 호랑이가 사람 말을 하는 세상에서나 존재했다.

하여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었다.

권력자는 용퇴하지 않고 끌려 내려오는 것이다.

해서, 지금 왕선이 꺼낸 용퇴는 용퇴가 아니다.

이는 정치적 압박이다.

왕우는 다급하게 말했다.

“와, 왕 총리. 짐이 혹시 실수한 거라도 있습니까?”

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왕선의 입가를 지배하던 아쉬움은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된 거다.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신은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알지요. 잘 알지요. 해서, 묻는 겁니다. 짐이 작은 실수라도 했다면 어서 말해주세요.”

일찍이 없었던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

이는 왕선이 일궈낸 거다.

만일 그가 마음을 먹으면 황제를 갈아치우거나 스스로 황위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다.

왕선 역시 황족이 아니던가.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위력을 가진 황족.

왕우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 폐위된 황제가 어떤 처지가 되는지 잘 알기에.

“어서요.”

“폐하. 신은 진심이옵니다.”

“왕 총리. 그러지 말고요.”

“신은 이제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아쉬움이 걷어진 목소리.

입가에 있던 희미한 미소도 없다.

왕우는 멈칫하더니 목울대로 침을 넘겼다.

“···진심입니까?”

“예.”

“왕 총리는 이제 막 이립을 넘었습니다. 한데, 용퇴한다고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이 이 자리를 고수한다면 그건 또 다른 군주제가 될 뿐이옵니다.”

“······.”

“재상 총재제의 완성은 총리가 임기를 가지는 것이옵니다.”

“···임기라고 했습니까?”

“오늘로써 신이 총리에 오른 지 10년이 되옵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했습니다. 권세가 10년을 넘기기 힘들 다는 뜻이지만, 바꿔보면 10년이 지나면 사람도 변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사옵니까. 하여, 신은 이제 용퇴하고자 하옵니다.”

왕우는 왕선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

“행여라도 친정을 담으셨다면 거두시옵소서.”

경고.

왕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

“말하세요.”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폐위되지 않습니다. 법전에서 규정한 황실의 법도를 짓밟거나 나라를 외세에 넘기지만 않는다면 황위는 승하하는 날까지 지킬 수 있사옵니다.”

“······.”

“마지막으로 충언을 하옵니다. 욕심내지 마시옵소서. 하면, 위대한 태조 황제의 후예이자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은 영원히 이 땅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사옵니다.”

왕선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사관은 임기를 가진 총리의 시작을 신이라고 기록할 것이옵니다.”

“······.”

“하오나, 이를 고수하고자 모든 걸 감내한 건 황상으로 기록할 것이옵니다. 황상께서 천년 고려의 시작이라는 것이옵니다.”

매듭지었다.

“사실상 제국 태조가 되시는 것이옵니다. 하오니 인내하소서. 그리고 버리소서. 하면, 후대의 황제들도 황상 폐하를 따를 것이옵니다.”

왕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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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상상도 못 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총리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모든 재상이 달려와서 왕선을 말렸다.

“제국은 이제 건설되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총리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용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왕선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내를 읽지는 않았다.

모두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이었다. 이들이 의도를 의심하면 무척이나 씁쓸했을 거다.

...사실 이 순간에도 아쉬웠다.

시공을 초월한 그의 권력의지가 쉽게 잠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짓눌러야 했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재상 총재제.”

시선이 집중됐다.

“이를 종신제(終身制)로 운영한다면 나는 왕이지 재상이 아니외다.”

“···제왕이신데요?”

뜬금포로 들어온 말.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정도전일거다.

대신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을 고쳤다.

“이를 종신제로 운영한다면 나는 황제지 재상이 아니외다.”

“다릅니다.”

단호한 정도전의 외침.

그러나 왕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논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외다.”

“무슨 말씀입니까.”

“잠시 후 황상께서 선인전에 납실 거요.”

“황상께서요?”

“2대 총리를 임명하실 거요.”

“이런!”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거 아무래도 의도를 의심했나 보다.

황제가 2대 총리를 임명한다는 말에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 거고.

특히 정도전. 아니, 유일하게 정도전.

마지막까지 재수 없다.

“호, 혹시 2대 총리가 누구입니까.”

“그건 황상께서 결정할 일이오만?”

“그, 그렇겠지요.”

“누구일 거 같소?”

“···포은이겠지요.”

-나,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정말 솔직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왕선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자. 어서 선인전으로 갑시다.”

그리고 왕선은 성대한 퇴임(退任)식을 했다.

조촐하게 해도 되는데 성대하게 했다.

이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황도 서경을 떠나서 과거 나하추의 거점 금산에 마련된 법국으로 향했다.

미륵 성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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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왕선은 오랜만에 황도 서경에 모습을 보였다.

갓을 깊게 눌러쓴 덕에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고래 등만 한 기와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검소할 줄 모르는군.”

괜히 툴툴대면서 외쳤다.

“이리 오너라!”

“허. 누구시오?”

“이리 오너라!”

“이보시오! 여기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총리님의 사가요!”

이곳은 2대 총리의 사가였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냉큼 총리 오라고 하게.”

“허. 당신이 누구길...!!! 미, 미륵 성하?!”

왕선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소란을 들은 제국의 2대 총리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나왔다.

“기별도 없이 왜 왔습니까?”

바로 정도전이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술 한잔 사주시오.”

“내가 왜요?”

“하하하. 감사히 먹겠소.”

“끙.”

잠시 후 조촐하게 차려진 주안상을 바라본 왕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다요?”

“검소해야지요.”

“기와집부터 초가삼간으로 바꾸고 그런 말 하시오.”

“하하하. 이곳은 제국 총리의 관사(官舍)입니다.”

“허. 미쳤군. 관사 따위나 만들다니.”

“제국을 책임지는 총리입니다. 치부에 힘쓰지 말고 나랏일에 집중하게 배려한 거지요.”

“누가?”

“황상께서요.”

“웃기고 있구려. 황상께서 무슨 권한으로 관사를 내리시오?”

“황명이 내려졌지요.”

“장난하오?”

정도전은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재물이 부족한 이가 총리로 임명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품위를 갖추려면 이 정도 대우는 해야지요. 백성들 보는 눈도 있고, 타국의 사신도 오가는데.”

“그렇게 정색하면 내가 좀 어색하오.”

“다행이군요. 소기의 성과를 얻었으니.”

“미쳤소?”

“음. 계속 탓을 하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왕선은 10년간 법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10년 만에 만난 거다.

그런데도 변한 건 전혀 없었다.

“황상께서는 어찌 지내시오?”

“내탕금을 부족함 없이 책정했습니다. 사냥과 연회 그리고 외유를 하시면서 그야말로 황제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각으로는 쳐다도 안 보십니다. 언제부터는 선인전도 총리가 주관하라고 하십니다.”

“다행이구려.”

“그나저나 정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토록 청해도 황도로는 쳐다도 보지 않으신 분이.”

“아. 10년 됐길래.”

“소생의 임기를 이르십니까?”

“그렇소.”

“음.”

“왜 그러오?”

“매력적인 자리더군요.”

“허.”

“제국의 총리라는 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정도전은 술병을 들었다.

“더하고 싶습니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술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오. 군사. 해보자는 거요?”

총리가 아니라 군사.

왕선이 도발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소생 옛날에 미륵 성하 뒤치다꺼리하던 정도전 아닙니다.”

“이거 기대되는군.”

“기대로 끝나게 해드릴까요?”

“사양하오.”

“그러니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세월이 빨리 지났소.”

“그러게 말입니다.”

“해서, 3대 총리는 누가 될 거 같소?”

“아. 법전을 좀 손봤습니다.”

왕선의 눈길이 일순간에 싸늘해졌다.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을 손봤다? 죽고 싶소? 진짜? 다 엎어 줄까요?”

이건 진심이었다. 그리고 가능했다.

만일 지금이라도 왕선이 복귀하면 모든 걸 한순간에 틀어쥘 수 있었다.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왕선이 누구던가.

전주에서 시작하여 제국을 꾸린 거인(巨人)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를 누가 막겠는가.

그러나 정도전은 여유로웠다.

할 말이 있어서다.

“서찰 보내드렸습니다. 알아서 하라는 답변도 받았고요.”

“응?”

“안 읽어보고 답변하셨나 보군요.”

“음.”

“그럴 줄 알았습니다.”

“험험.”

정도전의 눈가가 아주 많이 가늘어졌다.

“타당한 사유였습니다. 모두 동의했고요.”

왕선은 멋쩍게 웃었다.

“내용이나 들어봅시다.”

“생각해보니 황상이 무능하면 총리를 제대로 임명하기 어려울 거 같아서요.”

“해서?”

“당상관 이상의 재상이 총리를 선출하게 했습니다. 임기는 5년. 연임할 수 있고요.”

왕선은 묘하게 웃으면서 바라봤다.

“하면, 붕당이 생길 건데?”

“사람이 정치하면서 갈라지고 뭉치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이건 천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모두 같은 생각으로 정치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아. 가능하긴 하오.”

“허. 그럴 리가요.”

“3대 정도 세습하면 되오.”

“세습하는 인간들이 썩었군요.”

“그러니까요.”

“그 밑에서 아웅다웅 대는 인간들이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지요.”

“그래서 한 번쯤은 가보고 싶소. 오래 있기는 싫고 잠시 갔다가 들여다보고 오고 싶소.”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요.”

실없는 농이 잠시 이어졌다.

참으로 격의 없는 자리였고, 편한 대화였다.

왕선은 편하게 자세를 고치면서 물었다.

“한데, 연임을 정해두면 그건 그대로 문제가 될 건데?”

“중임(重任)입니다.”

“5년씩 2번? 그러니까 10년?”

“예.”

“왜 하필 10년이오?”

정도전은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권력에 초탈한 누군가를 기리는 거지요.”

“과연. 나답소.”

“됐습니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갔다.

“하면, 누가 유력하오?”

“유력 후보는 포은과 남은 그리고 우재입니다.”

“음. 남은은 총리의 직계군.”

“예. 소생이 미는 후보지요.”

남은이 3대 총리가 되면 정도전의 방침은 유지될 거다.

어쨌거나 정치에서는 우정보다는 신념이었다.

정도전이 정몽주가 아니라 남은을 지지한 걸 보면 딱 그랬다.

“포은과 우재는 성향이 비슷한데 따로 나왔소?”

만일 정몽주나 조준이 3대 총리가 되면 제국은 팽창을 멈추고 내정에 집중할 거다.

“예. 덕분에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되겠군.”

“예.”

정도전의 확신.

그러자 왕선은 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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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8년이 지났다.

왕선은 미동도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언제 오셨습니까.”

제국의 2대 총리 정도전이었다.

이 굳센 인물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후학을 양성하던 그에게 찾아온 병마는 작금의 의술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말을 아끼시오.”

정도전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공.”

왕선은 멈칫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군사.”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나 또한 즐거웠소.”

“남아로서 이보다 완벽한 인생은 없을 겁니다.”

정도전의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목소리도 잔뜩 젖었다.

“딱 하나 후회하고 있습니다.”

“말 하시오.”

“성불하지 못한 겁니다.”

“허.”

“도솔천.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군사.”

“예. 주공.”

“도솔천에서 봅시다. 먼저 가서 기다리시오.”

정도전은 희미하지만 밝게 웃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주공. 천천히 오십시오.”

“그리고 군사.”

“예.”

“나 또한 즐거웠소. 진심이오.”

“영광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주인이시여.”

왕선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나 역시 영광이었소. 나의 영원한 제일 군사여.”

왕선은 천천히 정도전의 손을 잡았다.

“영원한 제국을 위하여.”

“천년 고려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소.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왕선은 이제 마지막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여, 정도전의 뇌리에 제대로 각인시키고 싶었다.

“삼봉 정도전. 당신은 제국의 입안자로 기록될 겁니다. 이는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으로 새길 겁니다.”

그러자 정도전은 만족한 듯 눈을 감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왕선. 오직 당신을 위하여.”

그렇게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왕선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진정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때는 제국이 반석에 오른 4대 총리 정몽주 집권기였다.

< 186화 영세불변의 조종성헌(完)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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