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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85화 (185/187)

< 185화 진인사대천명 >

40만에 육박하는 고려의 대군이 남하했다.

이옥, 최영과 자웅을 겨루던 목영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로서 물러서지 않고 배수진을 치는 게 옳은 일이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게 가장 정도일 만큼 명의 상황은 어려웠다.

적군에게 황도가 기습당하여 황제가 승하한 사상 초유의 사태였기 때문이다.

“전군을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저 흉악한 고려 오랑캐에게 명의 모든 강토가 유린당하게 될 겁니다.”

장수들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러나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금의 명은 고려의 남하를 저지할 만한 역량을 동원할 수가 없는 상태다. 벌써 각지가 요동쳤다. 뿌리가 깊지 않은 대명의 한계가 여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강대한 오랑캐를 몰아내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황상께서 승하하셨소.”

목영은 참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황위는 단 하루도 비워둘 수 없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

그건 대명의 황제를 새롭게 옹립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지도력이 구축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장수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왕 주체에게로 향했다.

엄중한 누란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황제의 재목은 주체가 유일했다.

“연왕께서 황위를 이으셔야 합니다.”

“장군.”

“연왕 전하. 한시라도 빨리 황위를 굳건하게 하지 않으신다면 대명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목영은 이조차도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강대했던 원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원을 무너뜨린 명의 개국 공신으로서 내린 합당한 판단이었다.

이대로라면 명은 무너진다. 완벽하게.

“조만간 각지에서 군웅할거가 개막될 겁니다. 그건 오랑캐의 침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협입니다.”

“음.”

“연왕 전하. 황위에 오르십시오.”

연왕 주체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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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를 중심으로 명이 전열을 재정비한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주체가 황제가 됐다?”

“그렇습니다.”

왕선은 시선을 슬쩍 옮겼다.

대업의 일등 공신 고려 왜장 3명이 보였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잘 어울리는군.”

“허.”

“총리님.”

“형님!”

세 장수는 발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하마터면 공격 명령을 내릴 뻔했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소장들은 제국의 장수입니다.”

“이런 모욕을 들으려고 고려 왜장 노릇을 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핏대까지 세우며 격분하는 세 사람.

조금 더 약 올리면 눈물까지 흘릴 기세다.

왕선은 겨우 웃음을 집어넣었다.

“흠흠.”

“······.”

“그래. 주체가 도움을 줬다고?”

“예. 그가 아니었다면 남경을 도모하지 못했을 겁니다.”

“음.”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금부터 내릴 판단은 아주 중요했다.

정확하게는 제국이 어디까지 남하할지 결정해야 했다.

모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도전이 나섰다.

“많은 세력이 중원을 넘봤습니다. 성공한 사례도 많지요. 가깝게는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몽골족의 원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참담했다?”

“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했습니다. 왜? 중원이라는 땅은 단지 힘만으로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의 표정은 참으로 진중했다.

왕선 역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체한 게 아니라 먹고 죽은 겁니다.”

“해서?”

“제국은 북원과 여진의 영역도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과식하면 배 터져서 죽을 수도 있다?”

“예.”

결론적으로 정도전은 과한 영토 확장을 경계하는 거였다.

사실 이는 아주 바람직한 시선이었다. 중원이라는 땅에 들어가서 멀쩡했던 세력은 없으니까. 그러나

“200년 뒤를 걱정하면서 지금의 성세를 포기하는 건 아주 우매한 짓이오.”

그건 그때 고민할 문제다.

지금 제국의 위력은 사해(四海) 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중원을 점유하지 않고 중원의 나라를 상대한다? 이거야말로 미친 짓이오. 왜? 중원의 역량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이기 때문이오.”

“음.”

“지금은 군사가 이른대로 하늘이 내린 적기라고 할 수 있소. 이때 우리가 중원을 포기한다면 200년이 아니라 고작 20년 뒤에 제국은 중원의 대국과 싸워 패배할 것이외다. 안 그렇소?”

설령 중원을 갈기갈기 찢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로 뭉쳐질 것이다.

그때 제국이 고작 고려 본토와 북방의 일부만을 점유하고 있다면?

국가의 역량 차이가 너무나도 현격한 싸움이 아니겠는가?

“200년 뒤는 우리의 후대에게 맡깁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소.”

덧붙였다.

“하여, 제국은 최소한 하북(河北)지역은 취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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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주춤했던 고려군의 남하는 내부를 가다듬던 명의 위기를 크게 조장했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현 전황에서 하북지역을 일시적으로 고려군이 점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내하는 게 옳사옵니다.”

“인내한다? 언제까지?”

날카로운 주체의 물음.

목영은 그동안 고민한 결론을 말했다.

“머지않아 대마도 정벌에 나선 동구왕 탕화의 대군이 돌아올 것이옵니다.”

주체의 미간이 살짝 꿈틀였다.

“무려 20만 대군입니다.”

“또한, 대승을 거뒀으니 사기도 하늘을 찌르겠지.”

“예. 그때 대대적인 반격을 한다면 오랑캐의 기세를 꺾을 수 있사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느닷없는 주체의 말.

그건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예?”

“아. 아니외다.”

주체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고려군의 남하를 차단할 방어선을 구축하시오. 동구왕의 대군이 당도하는 즉시 반격할 것이외다.”

“참으로 합당한 결정이옵니다.”

“진인사대천명.”

목영은 다시 들린 그 말이 참으로 기묘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작금의 전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진인사대천명’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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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이 동구왕 탕화를 기다리며 방어선을 구축할 동안 고려군은 하북지역을 순탄하게 점령했다. 주력군이 와해하거나 남쪽으로 철군한 상황에서 제대로 대항하는 적군은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정규군의 문제였다.

왕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거 골치 아프군.”

최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쓰게 웃었다.

“예.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명의 뿌리는 얕았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뿌리는 깊었다.

거란, 여진 그리고 몽골까지.

강대한 오랑캐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침략한 오랑캐 고려.

명으로서는 미증유의 사태였으나 하북의 한족으로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는 수백 년 만에 되찾은 위대한 한족의 자긍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그들은 곳곳에서 자체적인 유격전을 펼쳤다.

“기병 중심으로 산재하여 토벌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광범위한 범위라서 시일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저항 수준은?”

“자체 무력이 강한 건 아닙니다.”

“군현 차원에서 저항하는 곳은 없습니까?”

“소수에 불과하지만 존재합니다.”

왕선은 볼을 씰룩였다.

이대로 시간이 지속하면 하북을 도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다.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

잠시 머뭇거렸다.

그새 최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항하는 지역은 모두 몰살시키겠습니다.”

유화책만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강경책 즉 철혈 정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최영이 먼저 이를 언급한 거다.

“···장군.”

“이는 소장의 결정입니다.”

최영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총리님은 정치인이지만 소장은 장수입니다. 전장에서 피를 보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지요.”

“······.”

“모든 부담은 소장이 안고 가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면, 즉시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부담을 최영에게 넘길 수 없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몽골 기병에게 연락을 취하세요.”

“하면···.”

“평소 그들이 하던 대로 하라고 하면 됩니다.”

모조리 도륙하고 짓밟으라는 명령이었다.

최영은 만류하지 않았다.

왕선의 결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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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조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지, 지금 뭐라고 했나?”

“뭐, 뭐가 어쨌다고?”

철통같이 믿고 있던 동구왕 탕화의 소식이 전해진 탓이었다.

그 내용이 실로 가관이었다.

“도, 동구왕 탕화가 왜국의 영토에서 개국을 선언했다?”

“그렇습니다. 국호는 ‘오’입니다. 귀국에 정식으로 이를 통보하는 바입니다.”

“갈!”

목영은 노기로 가득 찬 대갈성을 질렀다.

“네놈이 지금 누구를 희롱하는 것이냐! 동구왕은 만세에 남을 충신이거늘!”

“편할 대로 생각하십시오. 이 사람은 사실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네, 네 이놈!”

목영은 당장이라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을 죽이면 본국의 대군이 귀국을 공격할 겁니다.”

“!!!”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 황상께서는 20만의 강병을 이끌고 계십니다.”

“!!!”

“보아하니 귀국은 최고의 누란에 처했는데 적을 새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이놈!”

“음. 사신을 이렇게 겁박하면 무척이나 곤란할 겁니다.”

“그만.”

지켜보면 주체의 개입.

“국호가 ‘오’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황상 폐하.”

“심지어 칭제를 했고?”

“20만의 강병을 이끌고 있사옵니다. 황제국이 적합하지요.”

그는 지속해서 20만을 강조했다.

이건 위기에 빠진 명을 압박하려는 수작이었다.

주체는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짐을 따로 보겠나?”

“영광이옵니다.”

그리고 모든 신하가 물러났다.

주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네 이름이 남은이었나?”

“기억하고 계셨사옵니까?”

“기억하고 있어야지. 요동에서부터 자네의 활약은 대단했으니까.”

남은은 빙그레 웃으면서 주체를 바라봤다.

“늦었지만 황위에 오르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됐네. 그나저나 동구왕의 개국도 자네 솜씨인가?”

“그림은 소인이 그렸으나 구상은 총리님께서 하셨지요.”

“어쨌든 화가는 자네였지.”

“그건 그렇사옵니다.”

“탐나는군.”

“소인을 이르시옵니까?”

“그렇다네.”

남은은 히죽 웃었다.

당연히 농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주체의 표정이 참으로 진중했다.

그제야 남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상 폐하. 소인은 총리님의 사람입니다.”

“알고 있네. 내가 자네를 해한 것도 아니고 단지 탐을 냈을 뿐일세. 문제라도 있나?”

“···그건 아니옵니다.”

“그나저나 팔다리가 완벽하게 잡혀버렸으니 남은 건 하나겠군.”

“예. 항복을 선언하시옵소서.”

“그래야겠지.”

주체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진인사대천명이니까.”

< 185화 진인사대천명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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