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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84화 (184/187)

< 184화 474년 >

“뭐?”

너무 놀란 나머지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왕선은 황당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고려 왜장들이 어쨌다고?”

“명의 황도 남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허.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건가?”

“사실입니다.”

“허.”

눈을 껌뻑이면서 정도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역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최영 장군의 행보는?”

“산동 지역에서 목영의 대군을 묶어둔 상태입니다.”

합당한 결정이다.

“한데, 연왕 주체가 남하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세뇌가 풀린 건가?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급보를 전한 관리를 내보낸 정도전이 말했다.

“총리님. 정세가 급변했습니다.”

당혹감과 다급함이 공존하는 목소리.

“만일 고려 왜구가 남경을 점령하여 명 황제 주원장을 수급을 취한다면 모든 걸 일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연왕 주체의 세뇌가 풀렸다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해지겠지.”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째서?”

“연 왕 주체가 제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도 연왕부는 무주공산입니다.”

“음”

“최영 장군이라면 전격적인 총공세를 단행했을 겁니다. 어쩌면 지금쯤 이옥 장군이 남하하여 연왕부를 취하고 산동지역에서 목영의 대군을 압박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필시 그리되었을 겁니다.”

말을 이어가던 정도전의 눈이 번뜩였다.

“총리님.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정세입니다.”

“군사의 말은?”

“최영 장군의 권한은 요동의 이옥 장군과 몽골 기병이 전부입니다. 충분히 큰 효과를 볼 겁니다. 그러나 쐐기를 박는 건 아닙니다.”

정도전의 말은 곧장 이어졌다.

“지금이 아니면 명을 이렇게 흔들어댈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상상 이상의 저력을 가진 명나라다.

개국 초에도 이 정도의 역량을 내고 있다.

만일 안정되고 무르익는다면 그 힘은 실로 강대할 것이다.

중원이라는 옥토를 품은 대국이다.

지금 입은 피해는 오래가지 않아서 회복할 거다.

정도전은 이를 언급하고 있는 거였다.

“제국의 모든 힘을 움직여야 합니다.”

무주공산이 된 명나라의 북방.

만일 고려군이 전력으로 휩쓴다면?

비록 남경 점령이 실패하여 주원장이 멀쩡하더라도 명은 걷잡을 수 없는 피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국운을 부여잡더라도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만일 그게 실패한다면?

“제국의 힘으로 중원 땅에 군웅할거를 내리는 겁니다.”

정도전은 다시 덧붙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총리님.”

“국운을 걸어볼 만한 상황이군.”

“그렇습니다.”

“국방성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면?”

왕선은 곧장 말을 정정했다.

“내일을 보지 않고 모두 끌어내면?”

“내일을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정도전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제국본토에서 30만입니다.”

“몽골과 여진은?”

“10만입니다.”

“합쳐서 40만?”

“예.”

“보급은?”

“40만 기준 비축분은 2년입니다.”

“모두 징발하시오.”

“알겠습니다. 친히 나서시겠습니까?”

정도전의 눈이 반짝였다.

왕선은 단호하게 답했다.

“이번 총력전은 친정(親征)이오.”

친...정?

정도전은 멈칫했다.

“···친정이라고 하셨습니까?”

“위대한 태조 황제의 후예,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이신 황상께서 중원을 토벌하는 것이외다.”

“마음을 굳히셨습니까.”

“나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소.”

정도전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더는 입에 담지 않을 겁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군사.”

“재상총재제. 버리겠습니다.”

“······.”

“명군이 통치하는 제국을 선택하겠습니다. 하여, 마지막입니다. 진정 그리하실 겁니까.”

“군사.”

“예.”

“당신은 천재요.”

느닷없는 말.

심지어 극찬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선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정도전을.

정도전은 헛웃음을 지었다.

“예?”

“당신이 입안한 재상총재제는 동서고금에 없는 획기적인 정치체계요.”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바로 그것이야말로 천년 고려를 그릴 수 있기에 하는 말이외다.”

“······.”

“좁은 땅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이오. 종래 군주의 통치를 받는 정치체계라면 고작 200년을 넘지 못할 거요. 그건 역사가 증명한 흥망성쇠(興亡盛衰). 그러나 재상총재제는 영원한 제국이라는 전인미답(佃人未踏)의 길을 열어낼 것이외다.”

비록 내부에서 정쟁(政爭)이 지속하고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전인미답의 길이다.

“하여, 나는 황위에 오를 수 없소. 내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그렇습니까?”

“해서, 당신은 천재요.”

왕선의 말은 진심이었다.

정도전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황제 왕선을 위해서 필생의 신념이었던 재상총재제를 포기했을 정도니까.

그 속을 들여다본 왕선은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약조하리다.”

“······.”

“나는 부패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을 거요. 당신이 옳았음을 보여주리다.”

“······.”

“하여, 천년 고려의 개막을 설계한 사람이 삼봉 정도전임을 분명하게 하리다.”

정도전은 힘없이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왕선 역시 더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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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전이었다. 대 혼란이었다.

기세등등하던 연왕 주체의 대군은 다급하게 퇴각했다.

어찌나 급했던지 보급물자를 버리고 갈 정도였다.

나세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물자를 본진으로 보낸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주체의 원군을 막아선다.”

그래야 주체에게도 명분이 있을 거니까.

나세의 판단은 참으로 대승적이었다.

그렇게 2만의 고려 왜구는 철통같은 경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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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연왕 전하. 왜구가 추격하지 않습니다.”

“뭐라?”

“아군이 던진 물자만 가져갔습니다.”

“허.”

연왕 주체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왜구의 선봉은?”

“아군의 황도 진입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허.”

작전의 실패다. 하여, 장수들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러나 누구도 주체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왜구의 행동이 예측 밖이었다.

“우회하여 황도로 진입할 방법을 찾는 게 좋겠군.”

“그렇습니다. 지금 저들과 싸울 상황이 아닙니다. 황도의 안위가 촌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그때 급보가 전해졌다.

“여, 연왕 전하.”

“무슨 일인가?”

“왜, 왜구가 아니었습니다.”

“뭐?”

“물자를 약탈해간 적군의 깃발이 바뀌었는데 고려군이었습니다.”

장수들의 충격을 받았다.

반면, 연왕 주체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 해안을 타격한 적이 왜구를 위장한 고려군이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장수들은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당장 돌격해서 저 오만한 오랑캐를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대명을 이렇게 희롱하다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왕 주체는 손을 내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 파악을 똑바로 하시오. 왜구가 아니라 고려의 강군이라면 무턱대고 상대할 수 없소.”

“하지만 연왕 전하.”

“그동안 왜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고려군이었다니.”

“연왕 전하. 어차피 적에 불과합니다.”

“섣불리 우회하다가는 덜미가 잡힐 것이외다.”

“하면 정면 돌파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물론이오. 이 사람의 경험에 의하면 고려군은 회전에 취약하오.”

“하지만 시일이 촉박합니다.”

연왕 주체는 자신감을 보이면서 말했다.

“잊었소? 이 사람은 고려군과 회전을 펼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소. 하지만 우회하다가 큰 패배를 당했소. 그만큼 고려군은 계책에 능하오.”

덧붙였다.

“고려군을 상대하는 가장 정도는 정면 돌파요.”

주체의 호언장담.

장수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연왕 주체의 대군은 총돌격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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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고려군의 화약 병기가 남경의 성문을 가차 없이 박살 냈다.

정지는 전황을 놓치지 않았다.

“마천목 대장.”

“예.”

“아군은 남경이 진입해서 주원장의 수급만 취할 것이네.”

“그 즉시 퇴각합니까?”

“지킬 힘은 없지. 안 그런가?”

“그렇지요.”

정지는 크게 심호흡하면서 덧붙였다.

“또한, 연왕 주체에게 남경을 넘겨줘야지. 그래야 그도 체면이 살지 않겠나?”

“큭. 그야말로 최고의 계책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네.”

그리고

“성문이 열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왔다.

정지는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총돌격하라!”

그 즉시 4만의 고려 왜구가 함성을 지르며 남경으로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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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는 이를 악물면서 언월도를 휘둘렀다.

“장군! 적의 공세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부관의 외침.

그랬다. 연왕 주체의 대군은 실로 위력적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나세가 악을 쓰면서 막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직 본진으로부터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탓이다.

만일, 여기서 철군하면 주체의 대군이 남경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손으로 대계를 망치는 거다.

그렇다고 주체도 물러설 수는 없을 거다. 그 역시 연왕으로서의 입장이 있을 거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퇴각을 염두에 뒀던 부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나세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

“알겠습니다!”

나세는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면서 사자후(獅子吼)를 내질렀다.

“오직 고려를 위하여!”

전군이 악을 쓰며 화답했다.

“오직 고려를 위하여!”

오랜 세월 왜구로 살아왔던 고려 병사들의 입에서 마침내 고려의 국호가 터져 나왔다. 고려의 깃발 아래서 고려를 외치는 건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기세는 충만했다.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나세의 어지러운 눈에는 종횡무진 칼을 휘둘러대는 주체가 보였다.

언제봐도 하늘이 내린 무장이었다.

“주체!”

대갈성을 질렀다.

진하게 미소 짓는 주체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세의 뇌리로 스치는 게 있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으면서 격한 어조로 외쳤다.

“전군! 퇴각한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걸 깨달은 거다.

더 버티는 건 전멸을 자초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전인사대천명.

아니, 나머지는 미륵의 안배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물러서는 나세의 눈에 남경 점령의 신호가 보였다.

땀과 피로 범벅된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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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주체의 대군은 남경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실로 침통했다. 대국 명의 황도 남경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주체를 입술을 덜덜 떨면서 외쳤다.

“황상! 황상 폐하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모두 황상 폐하를 찾아라!”

핏발선 눈을 한 주체의 외침.

장수들도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연왕 주체는 지휘관의 위치로 돌아갔다.

“고려군은?”

“전군 퇴각했습니다.”

“참으로 무도한 무리로다.”

“즉각 추격하겠습니다.”

“응당 그리해야 하오.”

명령을 내렸다.

“나는 황상 폐하를 찾을 것이니 제장들이 추격하시오.”

“반드시 적을 도륙 내겠습니다.”

그 즉시 주체는 수색에 전념했다.

병사들과는 따로 움직였다.

무너진 황궁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그때 그의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

돌무더기에 깔린 사람의 손이었다.

그리고 손목까지 내려진 그의 의복.

실로 짙은 황색이었다.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을까?

그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주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읊조렸다.

“나는 연왕으로서, 미륵의 신도로서 최선을 다했다.”

괴이한 어조였다.

“미륵의 신도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목영의 대군을 격멸하거나 남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면, 연왕으로서 최선을 다했다면 고려군은 모두 죽었을 거다.”

그의 입가는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러나 어찌 한 가지만 할 수 있겠는가. 진인사대천명이다. 하여, 나는 미륵의 신도로서 고려군에게 물자를 내주었고, 연왕으로서 총돌격을 감행했다.”

걸음을 멈췄다.

“만일 남경이 내가 올 때까지 버텼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등을 돌려서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또한 미륵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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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 폐하.”

“오. 왕 총리.”

왕우는 빙그레 웃으면서 왕선을 바라봤다.

그 웃음의 한쪽에는 긴장감과 떨림이 공존하고 있었다.

“드디어 짐의 대에 대업이 완수되는 겁니까?”

“그렇사옵니다. 이는 오직 황상께서 하신 일이옵니다.”

왕우는 실로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생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신 왕선. 황망함을 금할 수 없사옵니다. 거두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짐에게 이곳에 선 것은 오롯이 왕 총리의 공입니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선은 옅게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엄한 황명을 내리소서.”

그리하여

“천하의 패권은 오직 제국의 의지로 결정된다는 지극한 천명을 선언하소서.”

바야흐로 황제가 친정하는 제국의 대군이 대대적인 남하를 시작했다.

태조 왕건이 북진을 기치로 황도 개경에 터를 잡은 지 474년이 되던 해였다.

< 184화 474년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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