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이이제이의 정석 >
사방이 난리였다.
변방을 몽골 기병이 타격했다.
그런데 북방의 주력군은 요동 경계에서 이옥의 고려군에게 잡힌 상태였다.
최영의 수군이 산동성에 상륙하자 중앙군이 출병했다. 그러자 고려 왜구 정지가 남경을 급습했다.
그리고 명의 주력 수군은 왜국 정벌에 나섰다.
천하 대국 명의 사방이 누란(累卵)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가히 ‘오랑캐’의 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 수준이었다.
“연왕 전하. 전격적인 북상을 단행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명의 변방이 너무나도 위태롭습니다.”
“예. 대명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야만 오랑캐들이 물러날 겁니다.”
장수들이 목이 터지라고 진군을 청했다.
하지만 연왕 주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제장(諸將)의 말대로 북상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소?”
북방의 명장으로 이름 높은 연왕 주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필시 담고 있는 뜻이 있을 터.
장수들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군이 요동에서 혈전을 펼치는 순간 사방의 오랑캐가 득달같이 달려올 것이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요동 전선이 어찌 될 거라고 보시오?”
“연왕 전하께서 이끄는 대군의 힘이 어찌 오랑캐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허. 이 사람이 오랑캐를 두려워해서 지켜만 보는 거 같소?”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
“잘 들으시오. 대명을 공격하는 무도한 무리가 천한 오랑캐에 불과하다고 하여 가볍게 상대할 수는 없소.”
“하면, 몽골족을 상대할 원군이라도 출병해야 합니다.”
“허. 이보시오.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이뤄야 할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거요.”
분명한 목적.
연왕 주체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도 이남 변방을 몽골족이 어지럽히지만, 그 수가 요동에 주둔한 고려군과 비교할 수는 없소. 몽골족의 패악질은 고려군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외다. 이때 연왕부의 병력이 몽골족을 요격하고자 움직인다면 호시탐탐 남하를 노리는 고려군이 어찌 나올 거 같소?”
“······.”
“내가 몽골족을 요격하러 출병하는 순간 남하하는 고려군에게 연왕부는 단번에 함락당할 것이외다.”
“······.”
“어디 그뿐이오? 산동 지역은 고려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최영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공격하고 있소. 이때 연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소란스럽게 움직인다면 오랑캐는 대명의 내륙에서 감당할 수 없는 패악질을 단행할 것이외다.”
일목요연하게 연왕부의 상황을 정리하는 연왕 주체.
장수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몽골족의 위협은 해당 지역의 군관들이 알아서 격퇴할 수밖에 없소. 어차피 엄청난 대군도 아니오.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외다. 산동성을 공격하는 고려군은 중앙군이 북상하여 격퇴한다고 들었소.”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연왕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단호함이었다.
“요동의 고려군을 억제하는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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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산동 지역의 해안가를 타격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고려 수군이 대대적인 상륙을 감행하여 내륙 지역을 휩쓸자 일대는 충격에 휩싸였다.
명군은 잘 준비된 병력을 출병하여 고려군을 격퇴하려고 했으니 주력군이 산발적으로 흩어진 전력으로는 최영의 5만 대군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렇듯 어려운 산동 지역의 사정은 중앙군이 북상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장군. 명의 대군이 지척에 다가왔습니다.”
경계를 담당한 이원계의 보고.
“적장은?”
“목영입니다.”
일찍이 대륙을 진동시킨 무장이었다.
그 이름은 고려에도 전해졌을 만큼 대단한 공을 세운 숙장이었다.
“적군의 규모는?”
“20만의 대군입니다.”
목영이 지휘하는 20만의 강군.
실로 두려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최영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회전을 준비하게.”
여태껏 고려군이 펼친 건 유격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최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명령은 정면충돌이었다.
장수들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아무리 명이라고 할지라도 10만 단위의 병력이 무너지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네.”
명의 국력은 대단했다.
쉬지 않고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그 능력은 실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부담이 없을 수는 없다.
단기간에 누적되는 국력의 소모는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심대한 위기였다.
“또한, 이곳은 변방이 아니라 명의 내륙. 만일 여기서 아군이 대승을 거두면 명나라는 내부에서부터 크게 흔들릴 걸세.”
그랬다. 최영의 판단은 정확했다.
같은 20만 명이라고 할지라도 변방에서 패배하는 것과 명의 내부에서 패배하는 건 파급효과가 달랐다.
만일 산동지역을 공격한 고려군에게 중앙군이 대패한다면 명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명은 아직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다.
그러니까 지금 명의 국력은 온전히 명의 것이 아니라 중원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나오는 자생적인 능력이었다. 아직 이 엄청난 힘을 명이 소화한 건 아니었다.
뿌리가 얕은 거다.
이럴 때 명 스스로가 오랑캐의 난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대한 위기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신생국가 명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거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절대 태풍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대승을 거둔다면 명나라도 더는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네.”
최영은 단호하게 외쳤다.
“반드시 이길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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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왜구의 기습으로 군선을 모두 잃은 직후 화가 하늘까지 치달은 동구왕 탕화의 공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명군의 맹위는 순식간에 왜국의 구주 지역을 휩쓸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과연 동구왕 전하이십니다.”
진심으로 감탄한 어조.
남은이었다.
동구왕 탕화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군선을 모두 잃었네.”
“군선이야 왜국 토벌 이후 조달하면 될 일이지요. 보급도 현지에서 가능하고요.”
“그건 자네 말이 맞긴 하지. 다만, 이후 황상께서 어찌 반응하실지 모르겠군. 고작 왜구를 토벌하는데 군선 2천여 척을 잃었으니.”
“군선을 잃은 거지 병력을 잃은 건 아니지요. 더욱이 대승을 거뒀는데 어찌 역정을 내시겠습니까.”
“허. 자네 황상의 성정을 모르는가?”
생각도 하기 싫은 듯 고개를 몸서리를 치는 동구왕 탕화.
그런데 생각과 달리 남은의 표정이 심각하다.
“이 사람아. 농을 한 건데 그렇게 반응하면 어쩌자는 건가.”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다.
탕화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음. 심각한 내용인가 보군. 어서 말해보게.”
“연왕 전하가 요동을 수복했습니다.”
“오. 과연 연왕 전하시군.”
탕화는 껄껄 웃으면서 남은을 흘겨봤다.
“자네 생각보다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있군. 이런 희소식을 전하면서 괜히 긴장하게 하다니.”
“이로써 대명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오랑캐는 기세를 잃었습니다.”
“그렇지. 북원도 궤멸한 상황에서 고려를 무찔렀으니. 참으로 좋은 소식이네.”
“···한데, 동구왕 전하.”
“응? 왜 그러나?”
“황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상께서 후계구도를 올곧게 세우시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건 당연한 일일세. 한데, 왜 문제라는 거지?”
남은은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장차 차기 황상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을 제어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해보게.”
“목영, 이문충, 등유, 상우춘이 하옥되었습니다.”
“!!!”
“오랑캐의 위협이 정리되자 황상께서 개국공신의 숙청을 시작했습니다.”
동구왕 탕화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남은은 곧장 말을 이었다.
“작은 세력을 가진 공신들은 순식간에 참해졌습니다.”
“······.”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건가?”
“···의심 많은 황상의 성정을 잊으셨습니까.”
동구왕 탕화는 명 황제 주원장을 떠올렸다.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졌다.
“내게 이 사실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연왕 전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연왕부는 숙청의 대상이 아닐 건데?”
“북방의 근심을 일거에 정리한 연왕부입니다. 작금의 황상께는 둘도 없는 핏줄이지만 차기 황상에게는 새로운 근심이지요.”
“해서?”
“그저 후일을 도모하시겠다고만 이르셨습니다.”
동구왕 탕화는 매서운 눈으로 남은을 노려봤다.
“하여, 나더러 역모를 꾀하라?”
“역모가 아니라 후일을 기약하길 청하는 겁니다.”
“허. 황명을 거역하면 그것이 역모.”
“동구왕께서는 황명을 따라서 왜국을 도모하고 계십니다.”
“······.”
“누가 감히 허튼 생각을 하겠습니까.”
“왜국 정벌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라?”
“어차피 당장 돌아가실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
“그러다 보면 판단이 서실 겁니다.”
“······.”
“못내 찝찝하면 최선을 다해서 왜국을 토벌하여 대명의 위력을 증명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걸세.”
“어차피 판단은 동구왕께서 하시는 겁니다. 소인은 그저 말을 전할 뿐이지요.”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장고에 들어간 동구왕 탕화.
남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적당한 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
“예.”
“만일 연왕부에 숙청의 칼이 휘둘러지면 어쩐다고 하던가.”
남은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막아야지요.”
“막는다? 어떻게?”
“반격으로요.”
“···가보게.”
“예. 아무쪼록 무탈하십시오.”
남은이 물러난 뒤 동구왕 탕화는 이마를 누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왜국의 구주를 토벌했다.
이만하면 애초 목표는 달성한 거다.
그러니 군선을 건조하여 퇴각하는 게 옳다.
그런데 퇴각했을 때 기다리는 건 죽음이다.
명분? 명황제 주원장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개똥을 들이대면서라도 만들어낼 거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정벌에 2,000여 척의 군선을 잃었다.
명분은 너무나도 충분했다.
동구왕 탕화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한가지가 스쳤다.
...단지 장기전으로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은 괴이하게 이어졌다.
...30만의 대군이 내 손에 있다.
고민과 함께한 그날 밤은 참으로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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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와 나세 그리고 마천목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전에 없었던 말 그대로 돌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열심히 싸웠을 뿐이다.
악을 쓰면서 싸웠을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고려의 의복을 입고 왜놈들의 촘마개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발라당 벗어진 앞머리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 어떤 때보다 최선을 다했다.
그랬다.
1년 이상을 왜구로 살아왔던 고려 왜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앞을 막는 적을 도륙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악에 받친 그들의 힘은 가히 천군이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이건 몰랐다.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포구에서 여기까지 치고 들어온 거다. 눈 깜짝할 새에.
이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돌발 상황이었다.
그랬다.
지금 세 장수의 눈앞에 대명의 황도 남경이 보였다.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 182화 이이제이의 정석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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