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무제한 타격 작전(1) >
“오랜만일세?”
“그렇습니다. 총리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상 백거마였다.
보지 못한 세월 동안 그는 많이 변했다.
외관이 변한 게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진 거다.
일전에는 남상의 팽창을 그리는 도전적인 상인이었다면, 지금은 내일을 내다보는 거상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과연 제국을 대표하는 상단의 상단주 다운 모습이었다.
왕선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요동성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을 거라고 믿겠네.”
“아. 총리님.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상단주.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을 기어이 하겠다면 남상에 투자한 내 재물을 모두 거두겠네.”
남상이 전주 인근을 오가던 군소 상단에 불과했을 때 이뤄진 투자 정책.
이는 남상의 성장에 엄청난 촉진제가 됐다. 또한, 이 시기 왕선의 초기 투자 재물은 남상이 전국 상단으로 발돋움했을 때 제국의 황도 서경을 구축하게 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하물며, 북방을 아우르는 제국의 상권을 거머쥐게 된 현재 그 가치는 말로 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백거마는 헛웃음을 삼키면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총리님. 인부들의 임금을 낮출까 합니다.”
“아. 그건 알아서 하게. 거기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네.”
조정에서 손을 댈 부분이 있고, 할 필요가 없는 영역이 있다.
지금 백거마가 언급한 부분은 상단과 인부들이 알아서 조율한 문제다.
“그런데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
“어찌 아셨습니까.”
“백 상단주.”
“예. 총리님.”
“요동성 축조에 발을 걸치고 있는 군소 상단을 내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네.”
“음.”
“만일 그리하면 내가 개입할 수밖에 없네.”
고려 본토에서 아웅다웅할 때 남상을 전국 상단으로 만들었다.
이는 다른 군웅을 제압할 때 남상이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봉쇄령을 펼쳤을 때처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제국의 강역을 유지하고 내부를 다채롭고 튼튼하게 만들자면 남상의 독주만으로는 곤란했다. 각지에서 군소 상단이 성장하고, 다양한 경쟁이 발생해야 했다.
그러나 남상의 백거마는 고려 본토를 넘어서 제국 전체의 유일 상단이 되려는 움직임을 꾀하고 있었다.
그 시작점이 요동성 축조였다.
축조가 본궤도에 오르자 그동안 참여한 군소 상단을 밀어내기 시작한 건데 그중에는 상단의 인원이 10명이 넘지 않는 영세한 상단도 존재했다.
여기서 백거마라는 사람이 얼마나 지독하게 상단을 운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왕선의 경고.
백거마는 어색하게 웃었다.
“상계(商界)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지금 나를 가르치나?”
백거마는 한발 늦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지금 왕선은 전처럼 조율하는 게 아니었다.
명령을 내리는 거였다.
만일, 섣불리 버티면?
남상은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한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주, 개경, 서경, 요동, 상도 그리고 동북면.”
“······.”
“제국의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상업의 거점을 잘 구축하게.”
조금 전까지 싸늘하게 경고하던 왕선의 입에서 나온 말.
그러나 백거마는 눈치가 빠르다.
그가 제국의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의 5할 이상이 바로 이거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이런 걸 하게. 남상은 제국의 대표 상단답게 큰물에서 헤엄치라는 말이네. 작은 군현에서 아웅다웅하는 군소 상단을 치우려고 추한 몰골 보이지 말라는 말일세.”
“소인의 시야가 좁았습니다.”
“알면 됐네.”
잠시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그러나 백거마만 어색하고, 왕선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서역 상단은?”
“전주에 자주 오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들을 따라가게.”
“예?”
“그들을 따라가서 바닷길을 익히라는 말일세. 언제까지 좁은 바다에서 놀 건가? 큰물에서 놀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
그때
“부르셨습니까.”
부보상 백달원이었다.
급히 닦았음에도 얼굴에는 땀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정말 열심히 달려온 거다.
과거 이성계의 정보원 짓을 한 일로 완전히 소외되었던 부보상이다.
이럴 때 총리실의 호출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대가 크겠는가.
그런데 백거마가 있는 걸 보고 멈칫했다.
“음.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반면, 백거마는 백달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부보상 따위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여유에서 비롯한 거였다.
그의 행동은 백달원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럴 필요 없네. 어차피 알게 될 건데.”
백거마에 대한 진한 신뢰가 담긴 왕선의 어조.
이건 이대로 백달원의 속내를 아프게 했다.
이래서 사람은 선을 잘 타야 하는 법이었다.
과거 이성계가 아니라 왕선의 선을 탔다면 백거마의 자리에 자신이 앉았을 수도 있었을 거다. 속이 쓰렸다.
“이보게.”
“예, 예. 총리님.”
“요즘 부보상은 좀 어떤가.”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고 있습니다.”
“역적 이성계의 수족이었던 자네가 아직도 입에 풀칠하고 있다니 희한하군.”
“초, 총리님.”
왕선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건조한 안색이었다.
백달원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러나 희미한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기, 기회를 내려주십시오.”
벌할 거면 여기까지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것만을 믿고 있었다.
“자네 생각대로 일세.”
“예, 예?”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기회를 내리고자 불렀네.”
“이르십시오.”
왕선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부지런하고 잘 걷는 부보상을 선출해서 상도의 서쪽으로 진출시키게.”
“상...도의 서쪽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길을 계속 따라가면 장사할 곳이 있지 않겠나?”
“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나는 지금 부보상에게 대외 무역의 길을 열어주는 걸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실망했던 백달원의 눈이 커졌다.
이제야 왕선의 말을 이해한 거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하게.”
“한데, 구체적인 지명이나 나라에 대해서 미리 알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알아서 하게. 일국의 총리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파악해서 자네에게 보고해야 하나?”
불쾌함이 잔뜩 담긴 어조.
백달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옵니다.”
“무역에 나섰다가 발생하는 어려움은 알아서 잘 해결하게.”
덧붙였다.
“단, 제국의 이름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작은 이익을 취하고자 제국의 깃발에 먹칠한다면 부보상은 모두 죽네. 알겠나?”
“어, 어찌 제국을 욕보이겠습니까.”
“그러면 이만 물러가게.”
“예. 총리님.”
물러나는 백달원을 본 백거마는 쓰게 웃었다.
“총리님께서 소인에게 참으로 큰 배려를 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래서 소인을 남기셨지요?”
“역시 눈치가 빠르군.”
“아이고. 그러면 눈치껏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반드시 서역으로 가는 바닷길을 파악하게.”
“소인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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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제국의 심장부 서경 본궐에 위치한 총리실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조금 전 당도한 한 장의 서찰 때문이었다.
[동구왕 탕화가 대마도 원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발신인은 연왕 주체였다.
“군사.”
“예.”
“명 수군의 규모를 파악했소?”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갈수록 일을 띄엄띄엄 하는구려.”
“음. 남은.”
“예, 예?”
“왜 이렇게 일을 띄엄띄엄하나? 제정신인가? 지금 정세가 어떤 정세인지 모르나? 명과 휴전협정이 끝났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뭐 하는 건가? 정신 못 차리나?”
갑자기 정도전이 불호령을 내리자 남은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왕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오?”
“제국이 구축된 이후 밀교의 일은 남은이 모두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여, 문책하는 거지요.”
“밀교의 교주는 군사로 알고 있는데?”
“초대 교주가 소생이었지요. 남은은 2대 교주고요.”
“나는 그걸 허락한 적이 없는데?”
“인수인계하고 있습니다. 허락이 내려질 때까지요.”
참으로 말발만큼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명군의 규모와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시오.”
그러자 정도전의 부라리는 눈과 마주한 남은이 황급히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군사.”
“밀교는 남은이 맡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끄럽소. 아군의 전력이나 말하시오.”
“음. 아쉽군요. 당연히 수군을 이르시겠지요?”
“물론이외다.”
정도전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500여 척의 군선이 준비된 상태입니다.”
“500여 척?”
“예.”
“하. 고작 그게 다요?”
실망감이 잔뜩 묻어 나오는 왕선의 목소리.
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이라니요.”
“말이 500여 척이지 그걸로 명 수군에 들이댈 수는 있소?”
“말이 500여 척이지 얼마나 힘들게 구축한 전력인지 아십니까?”
“뭐든 힘드오.”
“허.”
“어쨌거나 시끄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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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마천목 그리고 나세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정적 시간이 온 것이다.
정지는 치솟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명 수군이 출병했소.”
“그렇소. 오직 이날만을 기다렸소이다.”
“음. 나세 장군. 얼마나 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합니까.”
갑자기 끼어들어서 감정에 취한 나세에게 일격을 가한 마천목.
그러자 정지도 동의했다.
“마 대장의 말이 맞긴 하오.”
“허.”
“우리는 벌써 1년이 넘었소. 그러나 나세 장군은 몇 달에 불과하지 않소이까.”
“허. 이보시오.”
나세는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내 몰골을 보시오. 세월이 짧더라도 이 수치심과 무기력함이 없는 건 아니외다. 단 하루라도 이 꼴로 산다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라는 말이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지 장군과 마천목 대장이라면 언제라도 내 편을 들어야 하거늘. 내 말이 틀렸소?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음. 그건 맞는 말이외다. 내가 실언했소.”
“송구합니다. 장군. 소장이 실언했습니다.”
정지와 마천목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세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세는 진정한 듯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과하게 흥분했소.”
“아니외다. 장군의 말이 옳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는 장군의 손을 보듬어야 하오.”
“고맙소. 정지 장군.”
어색했던 공기는 어느새 훈훈해졌다.
나세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제 가야지요.”
“예. 실로 오랜만에 보게 되겠군요. 내 나라 고려의 바다를.”
그 즉시 고려 왜구는 전속력으로 회군을 시작했다.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명나라 해안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는 또 다른 작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시기 고려 벽란도에서 500여 척의 군선이 출병했고 명나라 남경에서 2,000여 척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의 군선이 출병했다.
고려 군선이 움직이는 바다의 끝에는 명나라가 있었고, 명나라 군선의 뱃머리는 대마도로 향했다.
< 179화 무제한 타격 작전(1)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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