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제국의 통치(1) >
왕선을 비롯한 원정군의 귀국 행렬은 개경이 아니라 서경이었다.
정몽주와 조준을 비롯한 내정가들이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하여, 가능했다.
또, 기묘했다. 북진의 대업이 완수된 날 북진의 전초기지였던 곳으로 천도한 것이니 말이다.
하여, 경계했다.
북진이 완수되었기에 고려의 가치가 더는 치열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강이 흐트러진다면 북진의 성과물은 후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하여, 경계함이 마땅했다.
“논의를 시작하지.”
서경에 축조한 본궐에 위치한 총리실에는 고려 최고의 내정가 3명이 왕선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상태였다.
바로 정도전, 정몽주, 조준이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볼멘 목소리의 정도전이었다.
“너무하다니?”
“쉴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십니까?”
“한가하오?”
벌써 정신줄 놓고 있다.
그래서 딱 잘라서 말하기로 했다.
“지금 우리 고려가 무슨 천하 대국이라도 된 줄 아시오?”
“농이었습니다.”
“국방성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한가한 농이나 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송구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언제 상실해도 이상하지 않은 영토라는 걸 항상 각인하라는 말이외다. 제국(帝國)을 지키려면 제대로 하시오.”
제국(帝國).
왕선은 북진을 완수한 고려를 제국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정도전은 입맛을 다셨다.
정몽주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분명히 영토는 넓어졌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전선이 광범위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진족의 터전이었던 동북면 이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상도를 비롯한 북원의 영토는 언제 변고가 터질지 모르는 곳입니다. 총리님의 말씀대로 제국의 유지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요.”
정확한 핵심.
지금 고려는 말 그대로 단군 이래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실로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지금부터 잘 준비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붕괴할 가능성이 컸다.
가장 위협적인 대적은 역시 명이었다.
아무리 연왕 주체가 충실한 미륵의 신도라고 하더라도 명의 황제는 여전히 주원장이다. 그가 미친 척하고 친정이라도 하는 날에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눈앞의 위기가 도래하지 않더라도 1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났을 때 내실이 튼튼하지 않다면 대고려국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하여, 작금의 정세는 북방 전쟁 당시보다 더 엄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왕선은 정몽주를 슬쩍 쳐다봤다.
-완산공 왕선의 고려에 협조하는 게 합당하겠지.
우호적이다.
물론 무조건은 아니다.
-황제의 친정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적어도 권세를 탐하고 국정을 어지럽히는 건 아니니까.
언제라도 재상 총재제를 공격할 수 있는 인사다.
여전히 정몽주는 근황파니까.
그래도 이 사람과 함께 내정을 논의한다는 건 무척이나 듬직한 일이었다.
정도전이 공세적으로 일을 펼치는 유형이라면 정몽주는 빈틈을 메꾸는 성향이니까.
그리고 천천히 뒤따르면서 빠진 걸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에 확장한 영토에 수령을 파악하여 정확한 호구(戶口) 따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바로 조준이다.
이 세 명이 함께하는 내정은 무척이나 튼튼할 예정이었다.
“몽골족과 여진족의 처우도 신경 써야 합니다.”
정몽주.
“넓어진 전선의 효율적인 방비가 최우선이지요.”
정도전.
다만 문제가 있다면 각자 중시하는 영역이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다 옳은 말이었기에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리할 필요는 있다.
“북진으로 확보한 영토에 새로운 통치의 기초를 세워야 하오.”
“예. 하여, 수령을 파견하여 호구(戶口)조사를 해야 합니다.”
“몽골족과 여진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군비를 확충하여 대군을 양성해야 합니다.”
실수했다. 같은 말을 반복한 상황이 돼버린 거다.
물론, 이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원론적인 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정책이니까. 사실 세 사람 중에서 실무 경험이 가장 풍부한 사람은 조준이다. 지금 한 말만 따져봐도 구체적인 실무를 언급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왕선은 정확하게 상황을 이르기로 했다.
“고려 본토의 역량으로 지킬 수 있는 범위는 압록강까지가 한계요. 물론 앞으로 더욱 풍족해지겠으나 지금은 그렇소.”
일단 현실을 짚었다. 고려인에게 이는 무척이나 뼈아픈 말이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고려국은 와해할 수밖에 없다.
“즉, 고려 본토의 역량으로는 제국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동북면 이북과 북원의 거점에서 최대한 힘을 끌어내는 것이외다.”
“그러면 일단 대동법의 세율을 정상화하는 게 우선입니다.”
조준이었다.
본토를 넘기자고 했는데 대동법을 언급했다.
이는 괜히 걸고넘어지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점령지 통치 계획을 수립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랬다.
사전 1결당 쌀 500두라는 엄청난 조세는 일시적으로 재정을 탄탄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생산력의 저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무거운 조세로 인해서 토지 이탈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물론이외다. 그리해야 하오.”
“소생이 볼 때 고려 본토는 이 문제만 처리하면 될 거 같습니다.”
고려 본토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사전혁파가 완성단계이고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는 계구수전에 버금가는 제도가 집행되고 있다. 진행 중인 전제 개혁을 점검하면 된다.
이러하니 작금의 고려 본토로서는 추가적인 개혁 요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산을 뚫어서 도로를 설치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세 사람의 입에서 구체적인 안건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남상을 요동으로 진출시키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예. 그들을 보내서 가장 먼저 요동성을 중건해야 합니다.”
“역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인부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남상이 요동성 중건처럼 큰 토목 공사를 진행하게 된다면 요동의 백성에게 큰 호응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요동성과 상도를 연결하는 교역로도 구축해야 합니다.”
“본국의 백성을 선출하여 요동으로 이주시켜야 합니다.”
“몽골족과 여진족도 적절하게 이주시키는 게 옳습니다.”
“농업이 가능한 지역은 대대적으로 농토를 개척하고 목축업이 가능한 곳은 크게 확장한다면 큰 효과가 있을 겁니다.”
“과거 시험을 크게 열어야 합니다. 새 영토에 보낼 수령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가장 우선해야 할 건 고려의 백성이 더는 말과 풍습이 같은 동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몽주의 말.
왕선은 논의를 중단시켰다.
모두 쳐다보자 답했다.
“지금 한 말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서.”
그러자 정몽주는 묘하게 웃었다.
-과연.
그 역시 왕선과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
“그동안 고려는 좁은 땅에서 적은 수의 백성을 다스렸네. 그 백성은 모두 말이 통하는 동족이었고. 그러나 이제 고려의 영토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새롭게 생겼지.”
“그렇습니다. 이는 변방에서 귀순하는 소수의 여진족과는 결이 다른 문제입니다.”
“옳네. 그들에 대한 방침을 잘 잡아야 하네.”
“만일, 귀순정책과 같은 방침을 세운다면 반드시 탈이 날 겁니다. 그때는 외부의 오랑캐였으나 지금은 내부의 고려인이기 때문입니다.”
광대한 영토의 가장 큰 난제는 몽골족과 여진족이다.
만일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침입이 없어도 무너지게 될 거다.
당장 고려의 성세가 이어진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러나 지금 주춧돌을 잘못 쌓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모순의 폭발은 빨라질 거다.
하여, 대 고려국을 유지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하며 우선해야 할 건 편입된 이질적인 무리에 대한 통치 방침이었다.
“아주 합당하군.”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수시중.”
“예. 총리님.”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여 집행 안을 만들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아. 몽골족과 여진족의 교화는 제외하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방법이 있습니까?”
“물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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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으셨습니까. 총리님.”
“어서 오시오. 대사.”
왕선은 이 자애로운 승려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선탄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소승이 해야 할 일이 있나 보군요.”
“이런. 벌써 눈치를 채셨소.”
“총리님을 만난 지 벌써 한세월입니다.”
“하하하.”
“편히 이르시지요.”
왕선은 이마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실은 대사가 해줄 일이 있소.”
“총리님?”
괜히 미안해서 뜬구름을 잡은 거다.
왕선은 금세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몽골족과 여진족.”
“그들을 고려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게 불교가 힘을 써달라는 것이군요.”
“실은 그렇소.”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들이다.
영원히 고려의 깃발 아래 살 수만들 수 있을 줄은 모르더라도 최대한 오랜 세월 동안 고려에 적을 품게 해야 했다.
하여, 고민했다.
강경책을 펼쳐서 그들을 억제할지.
아니면, 품을지.
치열한 고민의 끝에서 나온 결론은 이거였다.
“몽골족과 여진족을 품으려면 그들과 문화적 동질성을 강화해야 하오.”
“그들의 말과 풍습을 고려에 전하고, 고려의 말과 풍습을 그들에게 전하려는 것이군요.”
“조정의 관리가 강제하면 효율적이지만 반발이 생길뿐더러 지속하기 어렵소. 그러나 대사와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만난다면 느릴 수는 있으나 오랜 세월 지속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외다.”
“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들을 통치하는 가장 기본을 글자로 하고자 하오.”
“···미륵의 글자를 보급하실 생각입니까?”
“그렇소.”
“총리님. 미륵의 글자는 고려군의 군사전략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왕선은 단호하게 답했다.
“미륵의 글자로 그들을 제국의 백성으로 만들 것이외다. 또한, 이보다 중요한 군사전략은 없소. 그들을 품을 수 있다면 자연스레 고려제국의 국방은 강화될 것이니 그야말로 가장 위력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외다.”
“음.”
“대사.”
“법국의 승려들이 무척이나 바빠지겠군요.”
승낙의 뜻이었다.
왕선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고맙소.”
“고려 본토에서 무너진 불교의 기반을 재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자 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요.”
북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면서 대대적인 불교 탄압이 진행됐다.
그 결과 고려 본토의 평지에서는 사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작전이었으나 불교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
왕선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괜찮습니다. 담아두지 마십시오.”
“대사.”
“일찍이 미륵 성하께서 미륵사에 오셨을 때 이르셨지요. 이 땅의 모든 승려는 땡중이라고.”
“······.”
“그 죄를 씻어내리는 고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언제라도 필요한 모든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것이외다.”
“그 또한 괜찮습니다.”
선탄은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합장했다.
이후 법국의 모든 승려는 몽골족과 여진족의 거점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또 다른 고행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고려의 통치에 복무했다.
이로써 고려 본토의 평지에 사찰을 새로 짓고 불교를 재건할 시간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고려 본토의 평지 사찰의 재구축은 요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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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님. 연왕 주체가 사람을 보냈습니다.”
“연왕 주체가?”
갑자기?
왕선은 괜히 긴장됐다. 그러나 그건 괜한 짓이었다.
“소인이 가진 모든 기술을 고려국에 전하고자 왔습니다.”
연왕 주체가 보낸 사람은 명의 화약 기술자였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참 잘했다.
아주 바람직했다.
< 177화 제국의 통치(1)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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