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76화 (176/187)

< 176화 단군 이래 최대 판도(3) >

나하추는 위엄을 보이면서 왕선의 처형현장을 지켜봤다.

왕선은 그 순간까지 비굴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한심하군.”

참으로 비루한 작자가 아닌가.

더는 꼴도 보기 싫었다.

“참하라.”

그런데

“좋냐?”

왕선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한 마디.

나하추의 인상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

“좋아?”

그리고

“카아아아아악 퉷!”

왕선이 가래침을 뱉었다.

나하추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잠시 감았는데

-촤아아아아아악!

놀라운 일이었다.

저 먼 곳에서 가래침이 날아온 것이다.

“이놈!”

눈을 뜨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이놈?”

눈앞에서 왕선이 보였다.

“가, 감히!”

“감히?”

나하추는 허우적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

그리고 깨달았다.

“너 꿈꿨구나.”

모든 건 꿈이었음을.

“제대로 된 개꿈을 꿨나 보네?”

개꿈이었다.

그리고 나하추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윽!”

...뒤늦게 자신이 오물을 덮어쓴 걸 깨달은 거다.

왕선은 이죽거리면서 바라봤다.

“실실 쪼개면서 자길래 그냥 지켜보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왕선! 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저버리는 것이냐?”

“우호?”

“그렇다!”

“미쳤네. 너희 원나라 오랑캐가 본국에서 패악질한 게 50년이 지났나. 100년이 지났나.”

“!!!”

“너희는 불구대천의 원수야.”

“!!!”

“생각 좀 해봐. 고려의 입장에서 명나라가 찢어 죽이고 싶을지 너희가 찢어 죽이고 싶을지. 한 번만 생각해봐도 바로 답 나오지 않아?”

나하추의 눈동자가 격하게 일렁였다.

왕선은 비웃었다.

그리고

“미륵 성하.”

묵직한 목소리.

나하추의 고개가 자연스레 틀어졌다.

“!!!”

...연왕 주체였다.

심지어 왕선에게 극진한 예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양손을 합장하듯 모아서.

“아. 어서 오게.”

“음. 나하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데 미륵 성하께서 잡으셨군요.”

“잡았다기보다는 여기서 자고 있더라고.”

“잤다고요? 미쳤군요.”

“그러게 말일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나하추는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처음부터 다 속았다는 걸.

“이러고도 무사할성싶으냐?!”

그러나 그건 소리 없는 아우성.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고려군이 상도를 점령했습니다.”

“아. 전부 자네 덕분일세.”

점입가경이었다.

나하추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으나 목에서 느껴지는 이옥의 화살촉이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그게 아니더라도 주체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을 내리신 대자대비한 위력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자네는 참으로 충실한 신도일세.”

“옴마니 반메홈.”

갑자기 합장하는 주체.

왕선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화답해줬다.

“옴마니 반메홈.”

나 좋다고 이러는 건데 매몰차게 대하면 곤란하다.

더욱이 연왕 주체는 최대 자산을 가진 신도가 아닌가.

“모든 것은 미륵의 뜻으로.”

물론 조금 과하긴 했다.

주체도 과했고, 세뇌 과정도 과했고.

사실 이 시절에 속내를 들여다보는 관심법에 장기간 노출되면 정신이 온전할 수는 없다.

무조건 믿고 따르게 된다.

아무리 연왕 주체라도.

“북원 황제는?”

“무사히 잘 있습니다.”

명나라 입장에서 주체의 북진은 놀라운 성과였다.

분명한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북원의 황제를 생포했지 않은가?

이건 엄청난 쾌거였다.

“북원 황제를 잡아가면 미륵 성하께서 북원의 영토를 장악한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

대국인 명나라 입장에서 북원의 영토 따위는 별다른 관심사가 아니었다.

변방의 골칫거리를 처단하는 게 중요했다.

하여, 전쟁의 와중에 고려군이 기습적으로 상도를 점령한 건 주체의 전술적 판단으로 넘어가게 될 거다. 오히려 오랑캐끼리 싸우게 하여 연합군을 붕괴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계책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이번 북방의 대승을 거둔 주체의 연왕부는 북방에 대한 전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거야말로 이번 작전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었다.

멍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하추는 실성한 듯 웃었다.

“주공. 이 새끼 또 웃는데요?”

고개를 돌려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선은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의 공도 확실한 게 좋겠지?”

“무슨 말씀입니까?”

“나하추의 수급도 가져가게.”

“그건 도솔촌의 말로 ‘부록’이라고 하는 겁니까?”

“허. 자네 정말 습득력이 대단하군.”

“사은품이라는 말도 압니다.”

무릎을 '탁' 쳤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왕 주체, 연왕 주체하는구나.

왕선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옥 장군. 사은품 증정합시다.”

그 순간 이옥의 화살이

-퍼억!

나하추의 목을 관통했다.

“주체.”

“예.”

“훗날 다시 만날 것이네.”

“오직 그날만 기리면서 미륵의 가르침을 되새기겠습니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주체도 화답했다.

“옴마니 반메홈.”

그러다가 물끄러미 이옥을 쳐다봤다.

“자네는 왜 안 하나?”

“예?”

“옴마니 반메홈?”

고려의 숙장 이옥은 당황한 듯 버벅댔다.

지금은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이나 연왕 주체의 위력은 이미 온몸을 겪은 이옥이다. 하여, 황급히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왕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그러면 이제 사은품 챙기게.”

“미륵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동북면은?”

“이원계 장군이 기병을 이끌고 여진족을 제압했습니다.”

여진족은 언제라도 기회가 된다면 뭉쳐서 개길 거다.

아주 위험한 집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모두 죽일 수는 없다.

투항하는 부족은 모두 와해시켜 고려 영내로 강제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상도를 제압한 최영은 북원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특히, 나하추의 거점이었던 금산에서 저항이 제법 있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구심점이란 구심점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왕선은 물끄러미 지도를 내려봤다.

그리고 붓을 들어서 천천히 움직였다.

“······.”

요동에서 상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였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 판도라고 할 수 있었다.

반도에서 똬리를 튼 그 어떤 나라도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였다.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무릇, 수성은 창업보다 백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게 일시적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한마디로 이 엄청난 판도는 앞으로도 개고생이 훤하다는 걸 의미했다.

“아이고.”

웃픈 미소를 지었다.

“총리님!”

이옥이 달려왔다.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일갈했다.

“당장 내쫓게.”

“예?”

당황하는 이옥.

왕선은 거칠게 호통쳤다.

“삼봉 군사가 왔다는 말을 전하려는 게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쫓아내라는 말일세!”

“그, 그래도 됩니까?”

“당연하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불쾌함과 노여움이 가득 실린 목소리.

왕선은 환하게 웃으면서 반겼다.

“어서 오시오. 군사.”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군사를 반기고 있소이다.”

“소생이 지금 농을 하는 거 같습니까.”

“내가 알아야 하오?”

“허.”

왕선은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기분 나쁘면 군사가 총리 하시오.”

“용퇴하십시오. 소생이 그 자리에 냉큼 앉겠습니다.”

“내 발로는 못 물러나고.”

“오. 지금 소생더러 재주껏 차지해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군요?”

“당연하오.”

아슬아슬한 수위의 말이 격하게 오갔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참으로 감축드립니다. 총리님.”

정도전이 환하게 웃었다.

“기어이 500년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왕선도 싱긋 웃으면서 화답했다.

“내가 원래 좀 대단하오.”

“이 모든 건 소생이 고려에서 보급을 잘했기 때문이지요.”

“보급은 고려 왜장 정지와 마천목이 한 거고.”

“그 작전 수립한 게 소생이지요.”

“고려 왜구 작전은 내가 했소.”

“큰 틀만 던져놓고 모르쇠로 일관하셨지요. 세부적인 작전은 소생이 수립했습니다.”

이옥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왕선을 떠나서 정도전은 보통 인사가 아니었다.

고려에 누가 감히 왕선에게 저렇게 대놓고 덤빌 수 있을까.

실로 대단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됐고. 그냥 오지는 않았을 건데?”

정도전은 빙그레 웃었다.

“명분을 가져왔지요.”

“명분?”

정도전은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심양왕(瀋陽王)]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도전은 호기롭게 말했다.

“본국이 요동을 점유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명분이지요.”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쫘악!

서찰을 찢었다.

“명분은 무슨. 힘이 있으면 요동은 우리 땅이고, 없으면 뺏기는 거요.”

대놓고 질타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맛만 다셨다.

“다른 거 없소? 설마 이게 다요?”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진짜이길 바라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정도전이 다시 서찰을 내밀었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 하시오.”

“눈으로 보십시오.”

한 마디도 안 진다.

왕선은 고개를 저으면서 서찰을 펼쳤다.

[황도의 완성]

싱긋 웃었다.

“벌써 서경이 완공됐소?”

“물론입니다.”

“무척이나 빠르군.”

“설복시켰지요.”

정도전이 남상을 얼마나 쪼아댔을지는 충분히 상상됐다.

참으로 지독했을 거다.

“전쟁의 와중에 쉽지 않았을 건데.”

“소생 정도전입니다.”

“잘났소.”

“과찬입니다.”

상도에서 요동을 경유해서 여진족의 거점까지 장악한 고려는 대국의 위상에 걸맞은 황도가 필요했다.

이럴 때 황도 서경의 완공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개경은 새로운 고려의 황도로서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아. 정지 장군과 마천목 대장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응?”

“이제 회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명나라 수군이 대마도로 갔소?”

“아직 아닙니다.”

“허. 아직 목적도 이루지 못한 장수를 어찌 돌아오게 할 수 있소?”

“음. 그건 그렇군요.”

“냉큼 서찰을 보내서 더 노력하라고 하시오.”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얻은 정지 장군과 마천목 대장이 크게 기뻐할 겁니다.”

-----

정지는 온몸을 떨면서 울분을 토했다.

“나는 대 고려국의 장수일세.”

“압니다.”

“자네 또한, 대 고려국의 장수일세.”

“압니다.”

“한데,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는가!”

“소장도 모르겠습니다.”

정지의 말에 답하는 마천목은 체념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자네는 화가 나지도 않는가?”

“아주 많이 납니다.”

“한데, 어찌 이리도 침착할 수 있는가.”

“귀국하면 죽을 때까지 따질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이 모든 건 명나라 놈들 때문일세.”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요.”

“용서할 수 없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고려에도 있지만, 명나라도 용서할 수는 없지요.”

“죽을 때까지 이 한을 잊지 않을 걸세.”

“소장도 동의합니다.”

정지는 핏발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마 대장.”

“예.”

“시작하지.”

“그래야지요.”

고려 왜장 정지와 마천목은 오늘도 명나라 해안을 타격했다.

실로 처참할 정도의 결기를 보이면서.

< 176화 단군 이래 최대 판도(3) > 끝

ⓒ 날아오르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