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단군 이래 최대 판도(2) >
충격에 휩싸인 나하추의 핏발선 눈은 때마침 도착한 왕선에게로 향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 않습니까?!”
“······.”
“총리님!”
“진정하시오.”
“본국의 황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어찌 진정할 수 있습니까.”
최영이 발끈하여 나서려고 하자 왕선이 만류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된통 당한 거 같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휴전협정이 요동 전선만 통용되는 거 같소.”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격하게 따지는 나하추.
왕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보시오. 나 역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외다.”
“허.”
“무엇보다 이럴 시간이 있소? 한시라도 빨리 귀국의 황도로 달려가야 할 거 같은데.”
핵심을 찔렀다.
나하추는 굳은 안색으로 머리를 환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너무 무례했다는 걸.
지금 고려군이 지원하지 않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걸.
“송구합니다. 너무 황망하여 실언했습니다.”
“아니외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하면, 원군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왕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답했다.
“당연하오. 즉각 출병 준비하겠소.”
나하추는 안도했다.
“하면, 먼저 가겠습니다.”
“곧장 뒤따르겠소이다.”
나하추는 즉시 대군을 이끌고 상도로 달려갔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최영과 장수들을 바라봤다.
“북진의 완성이 목전에 왔군요.”
“과연 그렇습니다.”
“누가 대업의 쐐기를 박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명에게 쏠렸다.
북진. 그 위대한 이름을 끝낸다.
그 엄청난 일의 마지막은 당연히 최영이었다.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하하하.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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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破竹之勢)
연왕 주체의 진군은 오직 이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북원의 병력은 추풍낙엽처럼 쓸렸다.
심지어 북원은 주력군이 요동에 몰려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체의 진군을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질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연왕 전하. 나하추의 군세가 회군을 감행했습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주체는 히죽이면서 말했다.
“무시한다.”
“예?”
“아군은 이대로 상도를 점령한다.”
부관은 당황했다.
여차하면 나하추에게 후미를 잡힐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전하. 고려군도 나하추를 돕기 위해서 곧장 뒤따르고 있습니다. 요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요격?”
“예.”
“해야지. 그런데 상도를 점령하고 하면 될 일이지.”
연합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상도를 점령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단 한 번의 공세를 상도를 점령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 내포된 거다.
그런데 이 말을 내뱉은 사람이 연왕 주체다.
하여, 만용이 아니라 확신이 짙게 담긴 자신감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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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도 곧장 뒤따르고 있다.
재결성된 연합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이 주체에게도 전해졌을 거다.
하면, 어쩔 수 없이 요격 준비에 나설 것이다.
하여, 조금은 안도했다.
그렇다고 이 엄중한 정세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진군했다.
그랬다. 통탄함을 숨길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어이 주체를 몰아내고 요동을 경략한 대국의 면모를 갖출 것이라는 희망찬 내일을 그리고 있었다.
힘을 키운다. 더 강한 힘을 키워서 오만한 명과 대륙의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룰 생각이었다. 반드시 그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총력을 다해서 진군했다.
지금 당면한 위기. 주체의 공세만 격퇴한다면 과거의 영광을 구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 상도가 점령당했습니다!”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졌다.
설마 주체가 요격이 아니라 공성전을 할 줄은 몰랐다.
대군이 칼을 갈면서 후미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가.
진정 미친놈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진정한 비보는 따로 있었다.
“화, 황상 폐하께서 생포 당하셨습니다.”
“!!!”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상도가 점령당한 것도 부족해서 황제가 생포되었다.
이는 북원의 명맥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걸 의미했다.
망연자실한 나하추는 주저앉았다.
“아버님!”
그나마 이성의 끈을 유지한 문 하라부카가 외쳤다.
“황상께서 승하하신 게 아닙니다.”
“······.”
“이대로 주체를 격퇴한다면 황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적들이 황상의 안위로 겁박할 것이다.”
“협상 또한 기회입니다.”
그리고 문 하라부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협상이 엎어진다면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길?
그 짧은 단어에 담긴 의미는 실로 무궁무진했다.
가장 보편적인 뜻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거다.
그러나 다른 뜻도 있다.
직접 용상에 앉는다.
혹은 북원의 대통을 끊고 새로운 초원의 패자가 된다.
나하추는 떨리는 눈으로 문 하라부카를 바라봤다.
“아버님. 모든 걸 벌써 재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주체를 격퇴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상도를 수복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그 이후에 정하면 됩니다.”
문 하라부카의 말은 충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나하추를 구했다.
“네 말이 옳다.”
“예. 고려군과 연합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고려국 총리도 과거 자신들을 괴롭힌 북원보다 아버님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나하추는 답하지 않았으나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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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공격으로 북원의 심장부 상도를 점령한 주체는 곧장 요격 준비에 나섰다.
“아버님. 주체가 요격에 나섰습니다.”
“농성이 아니라?”
“예. 성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볼수록 미친놈이군.”
“그렇습니다. 또한, 팔도 도통사 최영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주체의 병력은 5만.
반면, 북원군은 4만, 고려군까지 합치면 10만.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주체의 지휘력과 용맹이 부담스럽지만, 공성전이 아니라 회전이다.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좋다. 고려군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작전을 수립하지.”
“예.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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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의 서찰을 받은 최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주체와 회전을 펼치자고 하는군.”
“음. 설마 다른 계책은 없습니까?”
“없네. 단지 전면전만 말하고 있네.”
나세는 헛웃음을 지었다.
주체의 위력은 이미 경험했다.
아무리 수적 우위가 분명하더라도 부담스럽다.
그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치밀한 작전을 수립하는 것이다.
한데, 대놓고 백병전을 펼치자고 한다.
“제 황제가 생포된 나하추로서는 최대한 빨리 승부를 봐야겠지.”
“한 마디로 우리더러 타국의 전쟁에서 피를 흘리라는 거군요.”
“아주 바른 말일세.”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런다고 하면 되지 않겠나?”
“하하하. 우문현답입니다.”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농일세. 작전대로 해야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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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내용은?”
문 하라부카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매복을 맡겠다고 합니다.”
“매복? 우익이 아니라?”
“아무래도 정면충돌은 부담스러운 거 같습니다.”
“하. 그게 아니라 요동 전선이 아닌 곳에서 전력을 낭비하기 싫은 거겠지.”
나하추는 불쾌한 듯 내뱉었다.
문 하라부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하추를 설득했다.
“아버님. 함께 총돌격을 감행하는 것도 좋지만 매복이 성공하면 한 번으로 전투를 끝낼 수 있습니다. 고려군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닙니다.”
“하긴, 고려군도 전쟁이 오래 지속하는 건 탐탁지 않을 거니까.”
“그렇습니다. 그들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내부 역량을 다독이고 싶을 겁니다.”
“그게 그들의 속셈이지. 본국이 요동에서 명과 대립할 동안 내부 역량을 키우는 것.”
“지금은 소국인지라 요동을 탐내지 않고 넘겼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검은 속내를 꺼낼 겁니다.”
나하추는 크게 웃었다.
“그 작은 땅에서 국력을 키워봤자 얼마나 키우겠느냐. 위험하더라도 요동이라는 옥토를 가진 본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게 소국의 한계입니다. 정작 위험한 일은 피하려는 거지요.”
“그렇지. 바로 거기서 대국과 소국의 운명은 결정되는 법.”
황도가 점령당하고 황제가 생포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미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게 웃을 뿐이었다.
“먼저 움직인다.
“좋아. 이제 총돌격을 감행한다.”
“예.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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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함성이 뒤덮은 전장은 실로 치열했다.
그 치열함의 중심에는 역시 연왕 주체가 있었다.
그는 실로 놀라운 무위를 선보이면서 나하추의 병력을 짓밟았다.
나하추는 볼수록 감탄스러웠다.
어찌 인간이 저토록 뛰어난 무위와 지휘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바로 오늘 주체의 이름이 걷어질 것이다.
나하추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전열을 갖추면서 물러선다.”
“예.”
치열한 백병전을 펼치던 나하추의 병력은 일사불란하게 작전상 후퇴를 감행했다.
후미를 확인한 나하추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과연 주체는 저돌적으로 돌격해오고 있지 않은가.
손에 힘이 실렸다.
“더 속도를 내라!”
이미 후미는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이건 작전상 후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고려군이 매복한 작전 지역에 도착한다.
바로 그때 주체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그다음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더 힘을 내라!”
있는 힘껏 외쳤다.
어느새 매복 지역이 눈에 보였다.
“힘을 내라!”
병사들을 다독이면서 속도를 냈다.
잠시 고개를 돌려 후미를 확인했다.
미친 듯 달려오는 주체의 대군이 보였다.
악귀 같은 주체는 선봉에서 칼을 휘둘러댔다.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도륙당했다.
한 걸음만 더.
한걸음 만 더.
멈추지 말라.
이제 다 왔다.
수백 번을 되새기며 달렸다.
그 순간 나하추는 매복 지역을 통과했다.
됐다!
여기다. 바로 여기서 고려군이 주체의 측면을 타격할 것이다.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전군! 반격하라!”
찰나였다.
이 모든 건 실로 찰나였다.
북원군은 이를 악물면서 반격에 나섰다.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명군은 주춤했다.
나하추는 미친 듯 웃으면서 외쳤다.
“모조리 도륙하라!”
북원군은 그간의 한을 풀 듯 돌격했다.
예상하지 못한 반격 때문일까?
명군이 조금 전까지 보이던 위력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주체는 곧장 기세를 회복하여 저돌적인 돌격을 보였다.
전장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치열함의 극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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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의 대군은 위용을 보이면서 상도로 입성했다.
“무혈입성(無血入城)이라는 건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군.”
나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하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장군.”
최영은 짓궂게 웃었다.
“지금 나하추는 뭐 하고 있을 거 같나?”
“기겁한 채로 괴성이나 지르고 있을 겁니다.”
“그냥 거기서 죽으면 바람직할 건데 말일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세는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늘 아래 가장 흉악한 분이 그곳에 가셨습니다.”
“하하하. 참으로 적절한 표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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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주체를 격퇴했다.
도주하는 주체를 잡아서 사지를 찢었다.
배신한 고려군은 처절하게 응징했다.
왕선을 붙잡은 나하추는 준엄하게 일렀다.
“내 너를 신의로 대했거늘 어찌 이런 패악질을 할 수 있는가?!”
“요, 용서하십시오.”
“하. 용서?”
“부디 용서하십시오. 하면, 고려는 귀국의 영원한 제후가 될 겁니다.”
“우습도다. 나는 이제 초원의 패자로 등극할 것이다. 너희처럼 간교한 나라를 제후로 둔다면 천하가 웃을 것이다.”
나하추의 분노가 담긴 일갈이 쏟아졌다.
“고려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 그 더러운 역사를 끝장낼 것이다.”
“하, 하면 이놈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큰 공을 세워 보은하겠습니다.”
“추악하도다!”
“부, 부디 살려주십시오.”
“고려가 소국인 이유는 너 같은 무뢰배를 집정 대신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비굴하게 빌어대는 왕선.
나하추는 싸늘하게 외쳤다.
“사지를 찢어서 죽여라!”
“!!!”
“그리고 전군을 이끌고 고려를 없앨 것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비굴하게 외치는 왕선.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나하추 역시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비웃었다.
....
“주공.”
이옥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왕선을 쳐다봤다.
“나하추. 이 새끼 웃는데요?”
“미쳤네.”
< 175화 단군 이래 최대 판도(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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