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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73화 (173/187)

< 173화 휴전협정 >

요동성 전투를 대승으로 귀결한 연합군 내부에서는 설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수십만의 대군을 출병하여 우리를 위협할 겁니다.”

나하추였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강하게 주장했다.

“이대로 서진하여 연왕부를 점령해야 합니다. 하여, 명의 북상을 미연에 차단할 수 있는 전선을 확실하게 구축해야 합니다.”

요동성을 붕괴시킨 충격적인 전술은 분명히 연합군의 대승을 가져왔다.

전율 그 자체였던 연왕부의 위력을 완벽하게 무력화시켰으니 분명한 대승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주체를 요동성으로 유인하기 위하면서 정면충돌한 결과는 무척이나 혹독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나하추의 주장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요동성이 무너트리는 전술로 주체를 격퇴한 건 좋은 일이었으나 요동의 심장부가 사라졌다는 건 요동 전선이 더 광활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이럴 때 가만히 앉아서 명의 공세를 방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공세로 기세를 이어가는 게 좋았다.

특히 주력이 궤멸당한 연왕부다. 지금 연합군이 공격하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거다. 이리된다면 연합군이 구축한 전선은 광활한 요동이 아니라 연왕부로 국한할 수 있으니 오히려 유리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하추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전투는 이겼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다.

전투는 전술이 큰 힘을 발휘하지만, 전쟁은 전략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명은 고려, 북원, 여진을 압도하는 엄청난 국세를 가진 나라다. 만일, 지금 요동 전선을 연왕부까지 확대한다면 양측 중 한 곳이 완벽하게 몰락할 때까지 전쟁은 이어질 것이다.

요동에서 싸운 것처럼 수성의 형세가 아니라 완벽한 정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거다. 현재 연합군의 병력은 15만 수준이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만일 그리되었을 때 결과는?

전쟁은 종전되기 전까지 함부로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연합군은 지독할 정도로 시린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한다는 거다.

왕선은 나지막한 어조로 짧게 말했다.

“연합군에게 명과 사생결단의 총력전을 펼칠 여력은 없소.”

아주 지극한 사실이었다.

싸워서 이길 수 있으면 싸울 거다.

하지만 이기는 게 버겁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총리님. 지금까지 우리는 연전연승을 일궈냈습니다. 어찌 그렇게 나약한 말씀을 하는 겁니까.”

나하추는 주장을 굳히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고려와 북원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고려와 달리 북원은 어차피 명과 국운을 걸고 싸워야 할 주적이었다.

즉,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거다.

만일 이대로 연합군이 물러선다면?

명이 요동을 포기하더라도 북원을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요동 점령은 되려 북원이라는 나라가 북방의 큰 근심이라는 걸 분명하게 각인시킨 결과로밖에 귀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절박해진 거다.

그러나 왕선은 단호했다.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게 옳소.”

“명이 응할 이유가 없습니다. 괜한 시간만 뺏기는 겁니다.”

“귀공의 말대로 연왕부를 점령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렇소. 그러나 명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소.”

왕선이 괜히 주체를 세뇌한 게 아니었다.

만일 명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면 뭐하러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쳤겠는가.

그를 대명 외교의 단초로 사용하려고 한 거다.

“귀공은 본국에게 군권을 이양했소. 그러니 이번에도 따르길 바라오.”

“총리님.”

“더는 이견을 제기하지 마시오.”

너무나도 단호한 왕선.

나하추는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일 외교가 어려워진다면 공세로 전환하겠노라고 약조해주십시오.”

그건 당연한 일.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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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작은 미동도 없었다.

어떤 생각에 잠긴 걸까?

아니면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지금 굉장히 집중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미 오래전에 인기척이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니까.

더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주체는 고개를 틀었다.

“허.”

“깊은 생각에 잠겼더군.”

왕선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꽤 됐네.”

“말씀하지 않으시고요.”

안 불러봤겠는가.

수차례 불렀는데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왕선은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기다린 거다.

“뭐. 자네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네.”

“송구합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한참이나 잡담이 이어졌다.

“이제 이리 찾아오신 연유를 이르시지요.”

“음. 명과 협상하고자 하네.”

“······.”

“자네가 힘을 좀 써줄 수 있겠나?”

“설마 소인더러 명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허.”

주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눈에 봐도 가길 싫어하는 기색이다.

“소인은 미륵의 신도입니다.”

“알고 있네.”

“한데, 어찌하여 미륵의 곁을 떠나라고 강요하십니까.”

“강요가 아닐세.”

“억지로 떠미는 것이 강요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거 세뇌가 너무 제대로 된 거 같다.

왕선은 한숨을 쉬면서 괜히 역관의 눈치를 살폈다.

과거 연왕 주체의 무시무시했던 위력을 봤던 역관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악업을 일삼았습니다.”

“누구나 악업을 일삼을 수는 있네.”

“심지어 미륵의 군대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재수없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그때는 자네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때. 괜찮네.”

“이제 겨우 참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데, 다시 악업의 자리로 돌아가라니요?”

“이보게. 미륵의 깨달음은 장소와 상관없네.”

“참으로 박하십니다.”

...그게 아니라니까.

왕선은 진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압니다. 소인이 아직 미륵불을 곁에서 보좌할 자격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게 아닐세.”

“해서, 내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아닐세.”

“하여, 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지 말게.”

주체는 참담한 낯빛으로 결연하게 말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

급기야 가부좌를 틀었다.

“옴마니 반메홈.”

“······.”

“옴마니 반메홈.”

“······.”

“죽는 순간만큼은 진실한 미륵이고 싶습니다.”

이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다. 진심으로 이러는 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왕선은 알 수밖에 없다.

지금 주체의 속은 야단법석이었다.

...미륵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서 막 울고 있었다.

왕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겨우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나서지 않으면 내가 죽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지 않은가. 명이라는 나라가 가진 힘을 말일세.”

“음.”

“아닌가?”

“앞으로 100만은 거뜬할 겁니다.”

“그러니까.”

“만일 그걸 막으시면 한 번 정도는 더 일으킬 수 있습니다.”

“뭘?”

“100만이요.”

“······.”

“만일 요동 전선이 연왕부로 옮겨지면 100만이 더 동원될 수도 있고요.”

...잘났다. 잘났어.

왕선은 헛웃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솔직하게 그 엄청난 대군을 막을 여력이 없네.”

“음. 하여, 소인이 막아달라는 겁니까?”

“그렇지.”

“하지만 대명의 군권은 지엄하신 황상 폐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소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어쩌라고.

아무리 세뇌가 됐더라도 명에 대해 자부심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왕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단 명과 협상할 것이네.”

“이미 하신 말씀입니다.”

...기본적으로 싹수없는 것도 그대로.

“자네를 인질로 삼을 것이네.”

“대명의 북진을 멈추는 조건으로 말입니까?”

“그렇지.”

“음.”

“안될까?”

“당장 치고 올라올 대군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예. 아무리 대명의 국세가 강하더라도 50만이 날아갔는데 아무런 타격이 없을 수는 없지요. 소인의 목숨을 담보로 외교를 부활하자고 한다면 괜찮은 명분이 될 겁니다.”

“얼마나 갈까?”

“길어야 1년이지요.”

지금부터 본론이었다.

왕선은 진중한 눈빛으로 주체를 바라봤다.

“연왕부가 완충지대가 되어주게.”

“설마 연왕부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라는 겁니까? 무리입니다.”

그건 주원장 죽으면 하자.

왕선은 고개 저으면서 말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북방의 일을 연왕부가 전담할 수 있다면 무리는 없을 걸세.”

“명분이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주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인은 이미 크게 패배했습니다. 그런데도 북방을 책임지려면 그 패배를 상쇄할 만큼의 공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설마 소인더러 다시 미륵께 창칼을 겨누라는 겁니까?”

“아닐세.”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이 충실한 신도를 바라봤다.

그리고 머릿속에 세운 대계의 마지막을 일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존 최고의 군사 지휘관 주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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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이죽거리면서 이 반가운 인사를 쳐다봤다.

“오랜만이군.”

바로 축맹이었다.

왕선은 내심 놀랐다.

이 사람의 목이 아직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고려 외교를 파국으로 만들고 정지에게 10만 석을 조공한 이 무능한 외교관을 그대로 쓰는 주원장의 머릿속이 궁금할 정도였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불쾌한 듯 노려보던 축맹은 외교적 수사를 생략했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이며 히죽였다.

“본국의 동구왕께서 귀공의 동맹을 타격할 겁니다.”

“뭐?”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축맹은 비웃었다.

“감히 대명의 황도의 앞마당을 공격하고 무사할성싶었습니까?”

“음.”

“분명히 이르지요. 본국의 위대한 수군이 귀공의 동맹 왜국의 대마도를 불바다로 만들 겁니다.”

대마도 말고 왜국 본토를 공격하면 좋은데.

왕선은 미친 듯이 웃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정지의 작전이 아주 제대로 먹힌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헛다리를 짚으면서 위협하는 거다.

그래서 왕선도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오늘은 협상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예. 협상이지요. 그러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

“천하의 대국 우리 대명은 요동과 바다. 두 곳에서 동시에 전선을 펼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이러면 협상이 파국인데?”

“바라던 바입니다.”

“책임질 수 있나?”

“이 사람은 황상의 대리인입니다.”

“······.”

“이제 아시겠습니까? 귀공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

왕선이 침묵하자 축맹은 기세를 올렸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왕선은 오만 죽을상을 지으면서 힘겨운 척 말했다.

“···말하게.”

“포로를 조건 없이 넘기세요.”

“대마도를 공격하는 건 위협이 아니라 현실이지 않나?”

“물론입니다.”

“이미 나의 동맹이 위기에 처했네. 그런데 조건 없이 포로까지 넘긴다면 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네.”

왕선의 완곡한 거부.

축맹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죄를 청하고 물러나시면 됩니다.”

“어쩔 수 없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허.”

왕선의 한마디.

축맹의 표정이 굳어졌다.

-젠장.

만일 이대로 전쟁이 재개된다면 승패와 관계없이 축맹은 또 실패하는 거다. 연이은 외교의 실패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반면, 그의 속내를 훤하게 들여다보는 왕선은 여유로웠다.

물론 겉모습은 심각했다.

“종전을 원하네.”

“허.”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국경은요?”

“지금 이대로.”

“말도 안 됩니다.”

그래. 이건 꿈이지.

왕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말했다.

“휴전은 어떤가.”

“휴전이요?”

“그렇지. 만일 동의해주면 연왕 주체를 풀어주겠네.”

휴전은 일시적인 거다.

아무리 명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전쟁을 지속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잠시 쉴 틈이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체면 때문이라도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때 휴전이라는 단어는 마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음.”

“어떤가?”

“휴전의 기간을 정해야겠군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그러지 않으면 종전이지요.”

“음.”

“아. 휴전하더라도 대마도 공격은 진행될 겁니다. 감히 황도를 어지럽힌 왜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요.”

“허.”

“즉, 휴전은 요동전선에 국한하겠다는 겁니다.”

은근슬쩍 위협하는 축맹.

왕선은 당황하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정해야겠군.”

“1년으로 하지요.”

“너무 짧네.”

“더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허.”

“선택하세요. 1년의 안락과 내일의 파멸 중에서 말입니다.”

“허.”

왕선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고심하는 척했다.

현재 고려의 북진은 군웅할거가 촉진한 기묘한 축복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난세가 유발한 폭발적인 군세의 팽창과 군현의 생산력 증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있는 힘, 없는 힘을 쥐어짜서 움직인 거다.

거대한 대륙을 도모할 체계적인 준비는 없었다.

지금 거론된 1년.

이 시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고려가 남경을 도모할 힘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명의 공세를 요격할 준비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연왕부가 아군이다.

하여, 차고도 넘쳤다.

이렇게 버틴다.

그리하여 훗날 주원장이 죽고 연왕 주체가 명의 옥새를 거머쥐는 날.

그때 고려는 대륙의 패자로 거듭나게 될 거니까.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대 고려국 총리 완산공, 연합군의 대표 왕선은 휴전협정에 합의하는 바이네.”

연합군의 명운을 걸었던 전쟁의 휴전이 시작됐다.

그건 딱 1년이었다.

< 173화 휴전협정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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