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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72화 (172/187)

< 172화 주체 세뇌(제목 수정) >

천지가 개벽한 이 놀라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본 왕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으나 참았다.

그런 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는 거니까.

하지만 웃음만은 참지는 않았다.

작전이 성공했다.

명나라 황제에게 목을 들이미는 일은 없는 거다.

환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

걸음을 옮기면서 정신없었던 요동성을 떠올렸다.

*****

요동성에 잔류한 왕선은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직접 요동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독려했다.

“어서 움직이게.”

혼자만이 아니었다.

선탄과 신조를 비롯한 법국의 승려가 총동원되어 요동성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가옥에서는 백성들이 다급하게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왔다.

“신조.”

“예. 총리님.”

“자네는 백성들을 통제해서 곧장 법국으로 이동하게. 한꺼번에 출발하면 혼란이 가중될 걸세. 지금 출발하면 한 명씩 행렬을 뒤따르면 될 것이니 무리는 없을 것이야.”

“총리님께서 요동성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 역시 곧 뒤따를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어서.”

왕선의 재촉에 신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왕선의 등이 보였다.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고 합장했다.

고개를 들자 엄청난 수의 요동성 백성들의 눈과 마주쳤다.

“나를 따르시오.”

신조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백성들이 바쁘게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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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님.”

“아. 대사.”

가쁜 숨을 내쉬면서 땀을 닦던 왕선은 웃으면서 선탄을 바라봤다.

“대사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때려치웠을 거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진심이외다. 그동안 대사가 민심을 휘어잡지 못했다면 요동성 백성들이 따르기나 했겠소이까.”

괜한 말이 아니었다.

엄청난 수의 요동성 백성이다.

이들을 통제해서 성 밖으로 데려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남옥을 격퇴할 때도 느꼈지만,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

선탄이라는 승려가 요동성 백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참으로 고생하셨소. 그런데 앞으로 더 고생해주시구려.”

“허어. 이거 왜 이러십니까?”

왕선은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니외다.”

“음.”

“정 궁금하면 나중에 최영 장군에게 물어보면 알 거요. 잘 설명해줄 거니까.”

선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금세 자애롭게 미소지었다.

“안 물어보게끔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습니다.”

역시 고승은 고승인가보다.

왕선의 말에 담긴 묘한 의미를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저 옅게 웃으면서 다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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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모인 건가?”

“예. 총리님.”

“다 진행했나?”

“예. 요동성 곳곳에 화약을 설치하고 맹화유궤를 흘렸습니다.”

밀교원을 대표한 천리의 보고였다.

그랬다.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약을 이번 작전에 투입한 것이다.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참으로 고생했네.”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 이곳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이제 남은 건 주체가 명군을 이끌고 요동성에 들어오는 거였다.

바로 그 순간 요동성은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

“총리님.”

상념을 깨우는 참으로 반가운 목소리.

피 칠갑한 최영이었다.

왕선은 고약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따뜻한 물에 목욕부터 하시지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최영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한걸음 내디뎠다.

“그나저나 죽지 않아도 되겠군요.”

“아쉽습니다. 죽어도 됐는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부드러운 최영의 목소리.

왕선은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네. 왕선. 지금 이 순간만은.”

“······.”

왜 그랬을까?

최영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들은 왕선의 평정심이 단번에 와락 무너졌다.

“하아.”

결국,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최영은 차분하게 자세를 낮춰서 왕선의 손을 잡았다.

“애썼네.”

“고맙습니다.”

“자네가 죽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네. 그 약조를 지킨 걸세.”

“감사합니다. 죽음을 피하게 해줘서.”

왕선의 붉어진 눈시울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실은 무척이나 두려웠거든요.”

“알고 있었네.”

최영은 왕선을 토닥였다.

“큰 산 하나 넘었네. 참으로 애쓰셨네.”

“우리가 이겼지요?”

“아니지. 이기고 있는 거지.”

그래. 이기고 있다. 이긴 게 아니었다.

그랬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왕선은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최영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준비됐습니다. 총리님.”

“예. 대미를 장식해야지요.”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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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다.

바로 옆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어둠이었다.

대체 무엇이 이런 어둠을 만들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상당한 시간 동안 공기조차 침묵하게 만든 공간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진한 어둠조차 숨길 수 없는 엄청난 부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연합군을 공포로 몰았던 연왕 주체였다.

잠깐 꿈틀대던 주체는 힘겹게 눈을 떴다.

“······.”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주체는 의구심이 치밀었다.

그리고 요동성의 참혹함이 떠올랐고

“허윽. 큭...”

엄청난 고통이 뒤늦게 온몸을 지배했다.

그때였다.

“누구인가?”

기괴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체의 볼이 씰룩였다.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통역? 하면, 명나라 사람이 아니다.

주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연왕부의 주인 연왕 주체다. 너는 누구길래 이토록 무엄한 것인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위압감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순간 소리가 들렸던 방향에서 불이 붙었다.

주체는 눈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겨우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했을 때

“내가 누구인가?”

다시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그는 오른손의 손바닥을 보이며 바로 세웠고, 왼손 손바닥을 보이며 밑으로 세우고 있었다.

바로 왕선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같은 물음.

노기가 치민 주체가 일갈하려고 할 때 갑자기 사방이 환해졌다.

횃불이었다.

그리고

“미륵이십니다.”

수백 명의 승려가 합장한 채로 서 있었다.

주체의 눈이 철렁였다.

“이, 이 무슨···.”

“내가 누구인가?”

같은 물음.

“미륵이십니다.”

같은 대답.

“내가 누구인가?”

“미륵이십니다.”

왕선은 주체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묻노라. 내가 누구인가?”

“닥쳐라!”

사실 왕선과 주체가 대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주체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다.

심지어 몸과 정신이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상태다.

왕선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오른손 검지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 검지는 땅을 가리켰다. 항마촉지인의 자세였다. 그러더니 동서남북 사방을 각각 일곱 걸음씩 걸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계의 위와 천계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곧바로 오른손의 손바닥을 보이며 바로 세우고,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밑으로 세웠다. 이는 미륵불의 자세였다.

“나는 미륵이니라.”

“갈!”

“내가 누구인가?”

끝없는 물음.

“미륵이십니다.”

승려들의 답변.

왕선은 다시 항마촉지인을 취했다.

“내가 누구인가?”

“다, 닥쳐라!”

왕선은 미륵불의 자세를 취하면서 승려들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인가.”

“미륵이십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됐다.

가뜩이나 크게 다친 주체는 마음은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묻노라. 내가 누구인가.”

“······.”

왕선의 시선이 승려들에게 향하려던 찰나

“미, 미륵이십니다.”

주체의 다급한 외침.

왕선은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이놈아. 귀신을 속여라.

왕선은 매섭게 노려봤다.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

“과연 너는 마군이로다.”

“무, 무슨.”

“승려들은 들어라.”

“예. 미륵이시여.”

“이 마군이를 벌할 것이다.”

벌한다?

주체의 안색은 딱딱해졌다.

이제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이들은 연합군의 일원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명군의 기밀을 파악하고자 고문을 시작한다는 말일 거다.

그런데

“네가 알고 있는 명군의 기밀 따위는 필요 없다. 주체.”

왕선의 비웃음.

주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릴 때

“징벌을 시작하라.”

“예.”

그때부터 시작됐다.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연꽃 속의 보석이여.”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승려들은 주체를 둘러싸고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주체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가 징벌?

절대 굴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느껴지는 육신의 고통만 참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인생에서 내린 가장 큰 오판이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다.”

“······.”

“이런 것들이 공의 상태이므로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

······

“갔네. 갔네. 피안에 갔네. 피안에 완전히 갔네. 깨달음이여, 아! 기쁘구나.”

...가히 끝을 알 수 없는 승려들의 말.

주체는 미칠 듯 고통스러웠다.

정신이 너무나도 피폐해졌다.

그야말로 극강의 고통이었다.

“그, 그만. 제발 그만.”

“묻노라. 내가 누구인가.”

“미, 미륵이십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부상을 회복하면 도주하겠다?”

“!!!”

“가르침을 내리도록.”

“!!!”

주체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얼룩졌다.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연꽃 속의 보석이여.”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렇게 수일이 지났다.

왕선은 주체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누구인가.”

주체의 눈동자는 반쯤 홀린 상태였다.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미륵이십니다.”

“옳다.”

“오. 미륵이시여.”

“속세에서는 나를 다르게 부른다.”

“일러주십시오.”

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대 고려국 총리, 완산공 왕선.”

“!!!”

“들어봤나?”

-치, 침착해야 한다.

“침착? 그런 거 하지 말고.”

“!!!”

“음. 아직 멀었군.”

“!!!”

“다들 뭐하는가. 다시 가르침을 내리게.”

“제, 제발···.”

“이 자리의 머리에서 똥 냄새가 가득하다. 마군이를 내쳐야 할 것이야.”

“!!!”

주체의 안색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다시 수일이 지났다.

“나는 누구인가.”

“미륵이십니다.”

“너는 누구인가.”

“미륵의 신도입니다.”

“속세에서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대고려국 총리이시자 영공전하이십니다.”

“옳다. 참으로 옳다. 마침내 마군이가 사라졌도다. 마침내 똥 냄새가 없어졌어.”

주체는 멍하게 쳐다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미륵이시여.”

“옳다.”

“미륵이시여. 이 부족한 자를 구하소서.”

“오. 너는 깨달음의 마음이자 시작하는 마음. 보디치타(Bodhichitta, 다른 모든 존재의 유익을 위하여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를 가지게 되었도다.”

“미륵이시여.”

“참으로 기쁘도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주체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진실한 미륵의 신도.

왕선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연왕 주체를 완벽하게 세뇌시켰다.

< 172화 주체 세뇌(제목 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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