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목숨을 걸다 >
선혈이 난무했다.
사방에 몸과 떨어진 팔다리가 가득했다.
또한, 주인을 잃은 말들은 울음이 지천에 깔렸다.
그리고
-차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앙!
병장기 마찰음이 모든 걸 압도하고 있었다.
그랬다. 지금 나세의 기병이 목숨을 걸고 명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부아아아아아앙!
지척에서 휘둘러지는 칼을 피한 나세는 곧장 언월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여유롭게 움직이면서 반격했다.
물러선 나세는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노려봤다.
연왕 주체였다.
“양백연 장군과 우인열 장군의 한을 갚겠다.”
그러자
“천한 오랑캐의 입에서 역겨운 말이 새어 나오는군. 적어도 대명의 말을 배운 다음에 지껄여야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릿한 조롱이라는 건 확실했다.
나세는 싸늘하게 노려보면서 언월도를 고쳐잡았다.
“오늘 반드시 네놈을 죽이겠다.”
“시끄럽군.”
주체는 비웃으면서 칼을 휘둘렀다.
나세는 곧장 언월도로 대응했다.
실로 놀라운 수준의 대장전이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이 달랐다.
나세는 온 힘을 다해서 언월도를 휘둘렀다. 그러니까 대장전에 모든 심력을 투입한 것이다.
반면 주체는 아니었다.
그는 나세와 대장전을 진행하면서도 백병전을 펼치는 명군을 지휘했다.
그런데도 나세와 합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실로 큰 결과로 이어졌다.
점차 각개전투를 벌이던 나세의 기병은 일사불란한 지휘를 받는 명군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세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주체를 죽이고 전군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은 피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급해진 마음만큼 손발이 어지러웠다.
“이런.”
주체의 입에서 나온 느긋한 한 마디.
나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이제 가야겠군?”
주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나세는 직감했다.
...죽음이 다가왔다는 걸.
그러나 마지막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자 언월도에 온 힘을 실었다.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앙!
위력적인 화살이 날아왔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피하는 주체.
그런데
-부아아아아아아앙!
날카로운 창이 다가왔다.
마천목이었다.
“흥!”
이번에도 주체는 피했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고려군의 본진이 돌격해오고 있었다.
이옥과 마천목은 최영의 명령을 따라서 나세를 거들고자 먼저 단기필마로 달려온 것이다.
그걸 본 주체는 피식 웃었다.
“다 죽이면 될 일.”
세 명의 장수와 마주했음에도 주체는 여유로웠다.
그때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또 다른 함성이 일었다.
나하추와 호발도의 군세였다.
이리되자 주체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리고 나세를 향해서 조롱하듯 말했다.
“운이 좋군.”
그 말과 함께 물러났다.
그런데 그건 모든 역량을 지휘에 투입하기 위한 물러섬에 불과했다.
백병전에서 벗어난 주체의 놀라운 지휘력이 본격적으로 대군을 통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전장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전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병사들의 함성은 들리지도 않았다.
모두 가쁜 숨을 내쉬면서 창칼을 휘둘러대기만 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어 나감에도 고요할 정도였다.
진한 죽음의 기운이 사방을 에웠다.
그리고
“물러선다!”
마침내 주체의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고려군의 성공적인 돌격. 그리고 우회한 나하추와 호발도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연왕 주체의 명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고작 해낸 건 적이 한걸음 물러나게 한 것이었다.
심지어 추격을 감행하지도 못했다.
연왕 주체.
그 이름이 반명 연합군 장수들의 가슴에 무겁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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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고려군의 돌격으로 백병전이 펼쳐졌다.
해서, 일보 후퇴를 하긴 했으나 전장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곧장 전열을 재정비하여 총공세를 감행하려던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왕 주체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왜구가 연왕부를 타격했다?”
섭왕(葉旺)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남경 근처를 휘젓던 왜구가 북상한 걸로 판명됩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전하. 계속 이대로 진군한다면 연왕부의 피해가 커질 겁니다.”
“노략질만 하고 물러나는 왜구가 아니다?”
“예. 회군하셔서 격퇴해야 합니다.”
주체는 헛웃음을 지었다.
요동성 수복이 눈앞이었다.
양문이 빼앗기고 남옥, 풍승이 대패한 적이 상대로 말이다.
이대로만 가면 연왕부의 이름이 천하를 울릴 것이다.
대명의 개국 이래 최대 위기를 극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왜구 때문에 대군을 물려야 한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요동성을 수복한 다음에 왜구를 격멸하겠소.”
“전하.”
“연왕부를 노략질하는 왜구의 위협 따위는 요동을 점령한 오랑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소.”
“하지만 연왕부는 전하의 거점입니다. 요동성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간곡한 섭왕의 말.
그러나 주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장군. 내 말 잘 들으시오. 지금 적들은 본격적으로 보급에 문제가 생길 거요. 조금 더 압박하며 와해할 수밖에 없소.”
“······.”
“잘 보시오 오랑캐들이 요동성을 점령했소. 이를 바로 격퇴하지 못하면 저들의 지배는 공고해지게 될 거요. 그러면 수복하는 건 더 어렵소. 지금은 적들에게 원정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분명한 수성이 될 것이기 때문이외다. 해서, 지금 내가 갈 곳은 연왕부가 아니라 요동성이오.”
덧붙였다.
“어차피 왜구가 연왕부를 점령할 것도 아니오. 남아 있는 병사들이 최대한 노략질을 방어할 거요. 요동성을 수복한 직후 회군하면 능히 물리칠 수 있소.”
그때 부관이 달려와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했다.
“연왕 전하. 왜선 일부가 요동성에 군량을 보급했습니다.”
“···뭐라?”
주체와 섭왕은 헛웃음을 삼켰다.
...갑자기 왜구가 왜 고려군을 지원한다는 말인가.
그 순간 빠르게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설마 왜구가 아니라 왜군?”
“···고려, 북원, 여진족만이 아니라 왜국도 결합한 겁니다.”
“하.”
“전하.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연왕부를 점령할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불편한 진실.
섭왕의 어조는 다급했다.
“전하. 최악의 상황입니다. 연왕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노략질은 물자의 피해다.
그러나 점령은 거점의 초토화를 의미했다.
연왕 주체의 안색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쩔 방도가 없다. 피가 새어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회군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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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 주체의 회군 소식을 접한 왕선은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휴.”
실로 압도적인 대적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곧장 돌격해 왔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겨우 한숨을 돌린 거다. 여전히 주체의 위협은 실존했다. 연왕부를 타격한 정지의 병력은 곧장 퇴각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총리님.”
고단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최영이었다.
“연왕 주체.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요.”
“총리님.”
“말씀하세요.”
“마지막 수. 성공 가능성은 얼마나 보십니까.”
“모릅니다. 그래도 해야지요.”
“음.”
최영은 숨을 크게 쉬면서 물었다.
“마지막 한 수가 실패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왕선은 쓰게 웃었다.
“철군해야지요.”
“···명의 보복이 있을 겁니다.”
“뭐. 북원은 멸망할 겁니다. 그들은 원래 명의 주적이었으니까.”
“여진족도 멀쩡하지는 못하겠지요.”
“우리 고려도 고생길에 들어가겠지요.”
“······.”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일 실패하여 철군한다면 장군께서 고려를 잘 이끌어주십시오.”
“예?”
“국방은 장군이 사활을 걸고 챙기고, 내정은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일임하면 될 겁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덜덜 떨리는 최영의 목소리.
왕선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명의 외교적 보복은 감내해야지요. 그러나 군사 행동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론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격하게 만류하는 최영.
왕선의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일 거다.
“총리님.”
왕선은 옅게 웃으면서 최영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합니다. 지랄병이 걸린 게 확실한 명 황제를 달랠 사람이 말입니다. 내 목숨이면 명나라도 더는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
만일 패배할 경우 왕선은 직접 명나라로 넘어가서 죽음으로서 사죄를 청할 생각이었다.
최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총리님!”
“이 하찮은 목숨으로 일국의 살릴 수 있다? 이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하찮은 목숨이 아니군요. 그러니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길입니다.”
“소장이 대신 하겠습니다.”
“하하하. 이거 미안해서 어찌합니까. 장군의 목숨값은 별로 무겁지가 않아요.”
이번 전쟁의 책임자는 왕선이었다. 명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의 목숨으로 일을 매듭지으려면 반드시 왕선의 목숨이 필요했다.
최영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격분한 그를 달래고자 적당히 농을 섞은 거다.
최영은 참담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왕선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길 수도 있습니다.”
“······.”
“그러니까 이깁시다.”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아직 죽기 싫습니다.”
또 죽기 싫었다.
죽음. 그건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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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부를 휘젓던 왜군은 주체의 본진이 당도하자 즉각 도주했다.
적의 계책이라는 걸 깨달은 주체는 격분했다.
해서, 연왕부의 수비병력을 보강한 뒤 곧장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북상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빠르게 요동성으로 전해졌다.
왕선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모든 병력을 이끌고 요격하겠소.”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계책을 전해 들은 모든 장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총리님.”
나하추였다.
그를 지그시 쳐다본 왕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하오.”
“허. 총리님.”
“하면, 귀공이 연왕 주체를 격퇴할 계책을 꺼내보시오.”
“······.”
“잘 들으시오. 연왕 주체를 물리치지 못하면 본국과 귀국 모두 걷잡을 수 없는 화에 처하게 될 것이외다.”
옳은 말이다.
나하추 역시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왕선이 입안한 계책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실패할 가능성도 컸고, 성공하더라도 달갑지 않았다.
“달갑지 않다?”
“예?”
“하. 지금 연왕 주체를 격퇴하는 것보다 달가운 일이 어디 있소?”
...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나하추는 당황했다.
그러나 왕선은 신랄하게 몰아쳤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러나시오. 대신 승전 이후 요동에서 한 치의 땅도 가지지 못할 거요. 가지고자 한다면 그때는 본국과 전쟁해야 하오. 아시겠소?”
“···송구합니다. 단지, 우려가 되어 그랬습니다.”
나하추가 한발 물러섰다.
왕선은 그를 달래듯 말했다.
“대적이 공격해오고 있소. 내부에서 다툼이 발생하면 자멸하고 말 것이외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외다.”
나하추는 크게 사죄하며 물러났다.
왕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 국운을 건 싸움이 시작된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반드시.
< 170화 목숨을 걸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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