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북진을 역사의 무덤으로 >
명나라는 대국(大國)이다.
그러니까 명실상부 천하제일의 강국이다.
지금 요동성을 두고 발발한 전쟁만 봐도 그렇다.
반 명 연합군에 속하는 고려, 북원, 여진족은 모든 국력을 투입한 상태다. 그러니까 삼국은 국운을 걸고 요동에서 고군분투하는 반면 명은 그렇지 않았다.
명이 볼 때 요동은 중요한 거점이지만 변방에 불과했다. 즉 삼국과는 달리 한결 여유롭다.
그랬다.
그것이 지금 확실하게 증명됐다.
“연왕 주체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습니다.”
요동 총병관 양문의 10만을 물리쳤다.
풍승, 남옥의 20만을 격퇴했다.
그런데 또 20만이 온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동원되는 대군.
끝을 보이지 않는 엄청난 군수물자의 향연.
이것이 대국(大國) 명나라의 진정한 힘이었다.
“음.”
왕선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영원히 요동에서 싸워야 하는 거 아닐까?
한쪽이 몰락할 때까지?
만일 이렇게 국력을 갉아먹는 전쟁이 지속하면 결과는 어찌 될까?
“어찌 되긴. 필패(必敗)지.”
그래도 이겨야 했다. 적의 급소를 완벽하게 취하는 대승을 거둬야 한다.
그렇게 이기지 않을 거면 진작에 사대(事大)했을 거니까.
“세월이 가도 좁아터진 반도 땅에서 10만 이상을 요동으로 보내지 못했어. 지금이 최고이자 마지막 기회. 당당하게 싸운다.”
자신 있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반드시 이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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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20만?”
“예. 연왕 주체가 20만을 이끌고 북상 중입니다.”
나하추는 헛웃음을 지었다.
명의 반격은 예상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님.”
문 하라부카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가득했다.
“고려군은 어찌한다고 하더냐.”
“아직 별다른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아직 논의가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음.”
“아버님. 지금부터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물러서자는 말이 아니었다.
대명 연합군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하자는 말이었다.
“네 말이 옳다. 연왕 주체의 20만 대군을 격퇴하더라도 아군의 피해가 크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없다.”
“예. 요동성을 장악하더라도 온전히 통치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같은 생각일 거다. 고려군이나 여진족도 섣불리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을 거니까.”
“그럴 테지.”
고심이 깊어졌다.
“내가 고려국 총리를 만나보지.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일 거다.”
“그게 좋을 거 같습니다.”
나하추는 곧장 왕선의 거처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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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나하추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후일을 위해서 판을 준비하는 건 바람직하다.
어쨌거나 연합군으로 구성된 상태니까.
그런데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다.
당장 직면한 적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런 수작을 펼친다?
그건 너무나도 섣부른 행동이다.
백 보 양보하여 내부에서 분탕질하더라도 외부의 위협이 모두 일소된 다음에서야 해야 한다.
고려군 역시 그때를 대비해서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총리님.”
“그래. 어쩐 일이시오?”
“연왕 주체의 대군이 북상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방책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펼친 거 거처럼 기묘한 수가 있는지 묻는 거다.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없소.”
“음.”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밖에 없소.”
“음.”
곤혹스러운 나하추.
왕선은 코를 긁적이면서 깨달았다.
대륙을 장악했던 강대한 원이 초라하게 몰락한 이유를.
싸우기도 전에 주눅이 들어서야.
그랬다. 최고 지휘부에 속하는 인물들의 정신상태부터 나약한 거다.
“본국과 귀국 그리고 여진족이 잘 단합하여 작전을 짜야 할 것이외다.”
“물론입니다. 그래야지요.”
“일단 세력별로 작전을 수립하지요. 그런 다음에 최종안을 도출합시다.”
다소 비효율적인 체계였다.
그러나 군권이 통일된 상태가 아닌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하추가 슬쩍 쳐다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군권을 합치는 건 어떻습니까.”
“아주 바람직한 말이외다.”
왕선이 흔쾌히 동의하자 나하추는 반색했다.
“하면, 본국이 군권을 가지겠습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왕선은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그렇소?”
“예. 어차피 요동성은 본국의 영토가 됩니다. 또한, 그동안 명과 가장 많은 일전을 치렀습니다. 그러니 본국이 군권을 들고 통제하는 게 가장 좋지 않겠습니까?”
“복잡하게 말하지 맙시다. 귀공은 고려군과 여진족을 화살 받이로 세우려는 게 아니오?”
“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원래 다국 연합군은 항상 그랬소.”
“그, 그렇습니까?”
왕선은 이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연합군의 한곳이 상국일 때 말이외다. 이를테면 과거 본국과 원이 왜국 정벌군을 꾸렸을 때처럼?”
“···총리님.”
“한데, 지금 귀국이 본국의 상국이오?”
“······.”
“잘 들으시오. 지금 귀공이 연합군의 신뢰를 깨는 중대한 과오를 범한 거요.”
“오해하신 겁니다.”
“양국은 명이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로 순망치한의 형세를 유지하고 있소. 이렇게 신뢰를 무너뜨리면 서로 좋을 건 없소.”
왕선은 화를 내거나 타박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했다.
왜? 지금 성질대로 나하추를 겁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를 설득해야 한다.
아직은 명의 위협이 실존하니까.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러나 귀국과 여진족을 화살 받이로 사용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대군을 잘 운용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이오. 잘 알고 있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군권을 통일하는 건 필요한 일이외다.”
“···그렇습니다.”
“어떻소. 이 사람에게 맡겨주겠소?”
“······.”
“요동성 점령의 대계를 수립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 사람이었소. 믿어도 될 거요.”
“총리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나하추의 눈이 커졌다.
“어떻소?”
“허. 더는 기묘한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기묘한 수는 아니라서.”
“허.”
“군권. 이 사람에게 넘기겠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귀국의 병사를 내던지는 일은 없소. 귀공의 동의를 항상 구할 거고.”
“좋습니다.”
왕선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혈맹을 위하여.”
나하추도 답했다.
“혈맹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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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들의 온몸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싸고 있었다.
현재 연합군은 새롭게 결합한 북원의 연합군까지 더해도 20만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적군이 20만을 이끌고 온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이것만을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르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과연 이게 마지막일까?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그 뒤로는 또 얼마나 달려올까?
생각할수록 지긋지긋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수들의 속내를 읽은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하추만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지막하게 최영을 불렀다.
“도통사.”
생각에 잠겨있던 최영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예. 총리님.”
“방책을 마련합시다.”
이미 요동성을 장악하기 위해서 짜둔 대계는 모두 소진했다.
사실 그랬다. 대계는 요동성의 1차 점령까지 목표로 한 거다.
이는 추가적인 명군의 공세를 염두에 두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전략과 전술로 싸워야 한다.
“먼저 장수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최영은 좌우를 살폈다.
모든 장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나 역시 비슷하니까.”
“······.”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걸 생각할 상황은 아닐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올라오는 20만 뒤에 또 얼마나 올지.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세.”
“···어찌 떠올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의미 없는 짓이니까. 지금 우리가 봉착한 난관은 연왕 주체의 20만 대군일세.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면 되는 일이지.”
“하지만 차후를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발생할 전투의 결과가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요.”
“지금 자네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 명의 국세. 그걸 두려워하여 허둥지둥하는 것. 그걸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무엇입니까.”
최영은 강한 어조로 일갈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일평생 고려의 국방을 지켜온 백전노장의 입에서는 노기가 흘러나왔다.
“대국의 사신이 오면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인다. 사신은 거만하게 내려다보면서 제멋대로 떠들고 우리의 자긍심을 짓밟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말도 못 해. 왜? 고작 사신 따위가 두려운 게 아니지. 단 한칼이면 그자들의 오만한 세 치 혀를 잘라버리고 사지를 찢어버릴 수 있어. 그런데도 참고 고개를 숙이지.”
“······.”
“왜 그러는가? 바로 사신이 뒷배로 가지고 있는 대국의 위력을 생각해서 그러는 걸세. 이를 사대주의라고 하지.”
“······.”
“지금 자네들의 작태와 똑같지 않은가?”
“······.”
“당장 우리에게 칼을 들이미는 20만보다 그 뒤에 따르는 대국의 위력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을 사대주의라고 하는 걸세.”
“장군.”
불편함이 담긴 장수들의 항거.
그러나 최영의 단호한 말은 이어졌다.
“작금의 고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아.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라 명과 당당하게 싸울 힘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을 정복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개소리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네. 바로 지금 자네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
“10만을 격멸했고, 20만을 무찔렀네. 그리고 지금 우리는 500년의 염원이었던 요동성에 서 있네.”
“······.”
“보라. 우리의 고려가 천하에 대고 당당하게 포효하고 있지 않은가?”
“······.”
“이 순간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대적(大敵)은 명의 대군이 아니라 정신과 몸을 지배하고 있는 대국에 대한 두려움이며, 나약한 정신의 근원인 사대주의일세.”
처음 북진에 나설 때만 하더라도 고려의 숙장들이 이처럼 주눅 들지는 않았다.
자긍심을 가지고 전장에 나섰다.
그리고 이겼고 또 이겼다.
그런데도 또 밀려오는 적의 대군은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그리고 속에서 다시 똬리를 튼 거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대국에 대한 두려움.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사대주의.
이 두 가지 감정이.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모두 민망한 듯 고개를 떨궜다.
최영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옳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쉽게 결심이 서지는 않았다.
그만큼 상대는 강대했으니까.
“만일!”
최영의 호통은 끝나지 않았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오는 게 명의 연왕 주체가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난 최영은 울분을 토하듯 외쳤다.
“왜놈이었다면 자네들이 이러고 있었을 건가. 왜놈이 100만을 끌고 오더라도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 순간 고개를 떨궜던 장수들이 움찔했다.
“자네들이 나약함을 걷어내지 못한다면 명나라 황제가 기침만 해도 고려 전체가 덜덜 떠는 과거의 비루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네. 그래도 좋은가?”
마침내 장수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최영의 마지막 말이 장수들의 심장을 후려친 거다.
자신들이 얼마나 나약한 생각을 한 건지 드디어 깨달은 거다.
자신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은 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선은 싱긋 웃었다.
“내게는 꿈이 하나 있네.”
나지막하게 말했으나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고려의 국시가 더는 북진이 아니길 바라네.”
덧붙였다.
“500년의 염원이자 대업. 북진을 반드시 우리 대에 끝내길 바란다네. 그리하여 우리의 후대들은 새로운 국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한다네.”
그러자 장수들이 화답했다.
“기어이 우리 대에 북진을 완수하겠습니다.”
왕선이 손을 내밀었다.
“북진을 역사의 무덤으로.”
장수들도 손을 내밀었다.
“북진을 역사의 무덤으로.”
이 순간 사대주의는 완벽하게 소멸했다.
최영이 참으로 큰일을 했다.
< 168화 북진을 역사의 무덤으로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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