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요동성의 하루 >
대륙을 휘어잡은 명나라의 군대는 강군이었다.
말 그대로 최강의 정예군이었다.
거기다가 이를 이끄는 지휘관의 역량이 실로 대단했다.
남옥과 풍승이 그러했다.
두 장수는 악을 쓰며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도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여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훈련이 잘된 강군이라고 할지라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두 숙장의 정예군이라고 할지라도 성 안팎에서 몰아치는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이긴다는 건 말 그대로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명군의 위력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다.
“대단하군.”
왕선은 입에서는 자연스레 감탄사가 나왔다.
이토록 반항이 거셀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일 뿐이다. 이미 기울어진 전황의 흐름은 뒤바꿀 수 없다.
마침내 명군은 패퇴했다.
백마를 탄 왕선은 침착하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표정은 진중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총리님.”
“고생하셨소. 대사.”
“아닙니다.”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소승만 믿으십시오.”
“물론이외다.”
선탄은 자애롭게 웃으면서 왕선보다 한걸음 나섰다.
그리고 외쳤다.
“요동성의 중생들이여.”
성내에서 호응했던 백성들의 시선이 선탄에게 쏠렸다.
피 칠갑을 한 채로 흉흉한 기세를 보였던 이들이었으나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요동성에서 선탄이라는 승려가 가지는 위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미륵께서 하생하셨소!”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백마 탄 왕선에게로 향했다.
선탄도 등을 돌려서 왕선을 바라봤다.
“우리의 미륵이시외다.”
차분한 흥분이 장내를 지배했다.
점차 고조됐다.
선탄은 적절한 시점에 외쳤다.
“옴마니 반메홈.”
마침내 요동성의 모든 백성이 화답했다.
왕선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미륵의 글자를 익힌 이는 미륵의 권능을 받은 것이니라.”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답하라. 미륵의 신도들이여.”
“미륵이시여!”
“내가 누구인가!”
“미륵이십니다.”
“또 다른 미륵이 있는가?”
“미륵은 오직 유일합니다.”
“내가 너희들의!”
“미륵이십니다!”
그리고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나를 믿는 자. 영원한 극락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라.”
“미륵이시여!”
“이곳이 바로 불국정토이니라.”
“과연 그렇습니다.”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랬다. 지금 요동성은 반 명 연합군이 아니라 미륵의 신도들이 장악한 거다.
나하추와 호발도는 이 기괴한 현상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가 왕선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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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이제 약조를 지키십시오.”
호발도의 목소리는 불안하고 급했다.
남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약조는 지킬 것이네. 그러나 지금은 아닐세.”
“요동성을 점령하지 않았습니까.”
“요동성을 점령했지. 그런데 요동성을 장악한 건 아닐세.”
이건 무슨 말인가.
호발도는 입술을 깨물면서 물었다.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고려국이 요동을 지배하려는 겁니까?”
“말 똑바로 하게. 본국은 여진족의 상국일세.”
“···지금 돌아가는 사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허.”
“소인도 눈이 있고 귀가 있습니다. 요동성의 백성이 모든 총리님을 연호했습니다. 지금 상국의 병력이 요동성에 똬리를 튼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나?”
“예?”
남은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자네는 지금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나?”
“···무슨 말씀입니까.”
“명이 이대로 요동을 포기한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걸세.”
“······.”
물론 아니다. 명이 이대로 물러 날리는 없다.
그런데도 불안함을 견디지 못한 거다.
호발도는 어물쩍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 이럴 때 우리가 물러나면 자네가 홀로 명을 감당할 수 있나?”
“······.”
“봐서 알 것이네. 본국이 이번 북진에 얼마나 치밀한 대계를 준비했는지.”
“······.”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남은의 타박.
호발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더 설명이 필요하나?”
“···예.”
“뭐?”
“대감의 말씀대로 상국은 엄청난 준비를 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
“당연합니다. 준비 정도보다 상국이 가져가는 게 없으니까요.”
“요동은 자네가 차지하게 해준다고 했네만?”
“만일 그 말씀이 거짓이라면 상국은 가져가는 게 아주 많지요.”
“자네가 요동을 차지해서 명을 잘 막아내게.”
...이건 겁박이 아닌가.
고려군의 철수를 꺼내 들어서 겁박하는 거다.
호발도는 입술을 와락 깨물며 따지듯 말했다.
“대감.”
“영원히.”
“대...예?”
당황한 호발도.
남은은 부연설명을 했다.
“다 안다고 하니까 말하는 걸세. 요동을 굳건히 지켜 본국의 방패가 되게. 이게 진짜 원하는 걸세.”
“······.”
“이 정도면 본국이 이번 북진에 이토록 공을 들인 이유가 설명되는가?”
“······.”
“이 또한 의심한다면 더 할 말이 없네.”
요동을 차지하는 순간 명과 국경을 마주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적대적인 관계로.
잠시 망각했으나 분명한 현실이며 대가였다.
호발도는 자세를 고쳤다.
“송구합니다.”
“제대로 말하게.”
“죄송합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분명히 알아두게. 본국 역시 국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일세. 자네도 여진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호발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불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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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하라부카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아버님. 이대로라면 고려에게 요동성을 뺏길 수가 있습니다.”
“······.”
“설령 고려군이 철군하더라도 요동성 백성은 고려 총리의 백성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거점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라면 가치는 하락합니다.”
“그래서 지금 고려와 척을 지자는 말이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단지, 분명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거 같아서 그럽니다.”
나하추는 문 하라부카를 만류했다.
“아서라. 괜한 말로 동맹의 신의를 깰 수 없다.”
“하지만···.”
“물론 네 말대로 고려가 검은 속내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지금 급한 일이 아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은 공통의 적을 상대로 강고하게 뭉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지.”
“······.”
“본국과 고려. 양국 모두 단독으로 명을 감당할 수 없다. 이게 현실.”
“일단 명을 물리친 다음에 논의할 문제라는 말씀입니까?”
나하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을 패권을 두고 고려와 다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차후의 문제야. 아직 대적이 눈앞에 있는데 괜한 말로 내부의 분란을 만드는 건 우매한 짓이지.”
“음.”
“알겠느냐? 지금은 양국은 서로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다.”
“송구합니다. 소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다. 나 역시 네 말대로 고려가 단지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는 전쟁에 저 정도의 준비로 임했다는 부분에 의심이 가고 있으니까.”
북원과 동맹을 체결하는 순간 명과 적대국이 된 거 사실이다.
그러니 북원이 승리해야만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고려가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고려의 대계는 그런 수준을 넘었다.
고려의 흑심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선 본국에 사람을 보내서 최대한 빨리 원군을 보내라고 해야겠지. 요동에 비축된 우리의 힘이 강할수록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니까.”
“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때였다.
“고려국 총리가 만남을 청합니다.”
나하추와 문 하라부카는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나 안 만날 수는 없다.
“어서 오십시오.”
“하하하. 이거 괜히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나하추는 적당한 예를 취하면서 착석을 권했다.
왕선은 방긋 웃으면서 편하게 앉으면서 두 사람을 살폈다.
그리고 더 진하게 웃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느닷없는 말.
나하추와 문 하라부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압록강 이북, 요동성 동쪽에 법국을 세울 땅을 적당히 내주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본국도 전리품을 챙겨야 하지 않겠소?”
대놓고 말하는 속내?
이리 나오자 조금 전까지 고심하던 나하추와 문 하라부카의 표정은 한결 편해졌다.
자고로 속이려는 상대는 까다롭지만, 욕심을 보이는 사람은 대처하기 편한 법이다.
“본래 요동성은 본국에 귀속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오해하지는 마시오. 지금 수준이면 충분하오.”
“···지금 수준이라고 하시면 군현 한, 두 개의 규모를 이르시는 겁니까?”
“그렇소.”
“음.”
어렵지 않다.
광활한 요동 땅에서 그 정도는 티도 나지 않는 일이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듣고 결정 내려도 되겠습니까?”
왕선은 흔쾌히 답했다.
“당연하오.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일괄 타결하기 위함이니까.”
“하면 말씀하시지요.”
“본국은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을 걱정했소.”
“근심이라고 하시면.”
“여진족이외다.”
“!!!”
“요동 전투가 끝난 직후 본국은 여진족을 모조리 격멸할 생각이외다.”
“허. 그들은 귀국에 복속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복속된 채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음.”
왕선은 느긋하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를 전하지 않은 건 귀국이 본국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오.”
“······.”
“왜? 본국의 힘을 과소평가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봤을 거요. 본국은 귀국에 이 정도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국력을 가졌다는 걸.”
이번 요동 쟁탈전의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지금 왕선은 이를 정확하게 각인시키며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자 그러면 정식적으로 제안하리다.”
왕선은 나하추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하면서 말했다.
“요동을 취하고 여진족 섬멸을 거드시겠소?”
나하추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는 선택할 필요가 없는 문제니까.
“양국의 우호는 영원할 겁니다.”
“원하는 답변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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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본국은 전투가 끝난 뒤 여진족을 격멸할 것이네.”
“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격앙하는 호발도.
남은은 손을 내저으면서 덧붙였다.
“북원은 이렇게 알고 있다는 말일세.”
“예?”
“자네도 하는 생각을 나하추가 못하겠나?”
“아.”
“오랫동안 본국의 변방을 어지럽힌 여진족을 격멸한다. 하여, 고려는 변방의 안정을 꾀한다. 북원과 연합해서. 어떤가. 이 정도면 말이 맞지 않겠나?”
호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의 말씀대로입니다.”
“잘 듣게. 때가 되면 양군은 협력해서 나하추를 공격할 걸세.”
“예?”
“어차피 요동성에서 그들을 밀어내려면 무력 충돌은 불가피하니까.”
남은의 말을 들은 호발도의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하면, 북원을 도모하시려는 겁니까?”
남은은 자세를 고쳐 잡은 채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본국은 오랜 세월 북원에 수모를 당했네. 갚아야지 않겠나?”
“허.”
“이것이야말로 이번 북진의 진정한 목적. 이쯤 하면 본국이 얻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겠나?”
요동은 여진족이 취하고, 고려는 북원을 취한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계획이다.
호발도는 남은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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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왕선의 거처를 찾았다.
“총리님.”
“어서 오게. 결과는?”
“이르신 대로 했습니다.”
왕선은 싱긋 웃었다.
사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조금 전 오는 길에 호발도와 잠시 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속내를 확인했다.
호발도는 남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요동성의 하루가 이렇게 끝났다.
< 167화 요동성의 하루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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