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미륵, 요동성에 하생하다(1) >
좌 장군 남옥의 충격적인 패배로 명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남옥은 복귀 즉시 대로하며 요동 성주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치열한 혼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좌 장군. 고정하시오.”
풍승은 애써 남옥을 말렸다.
“다 이 사람의 탓이오. 섣불리 그들을 믿다니.”
“아니외다. 이는 불가항력이었소. 누가 법국(法國)의 수립을 고려국의 계책이라고 생각했겠소이까.”
그건 그랬다.
고려 전역에서 대대적인 종교탄압이 진행됐다. 진나라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상의 모진 탄압이었다.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한 승려들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었다.
철저한 검증 끝에 법국(法國)의 수립을 허락했다. 법국(法國)을 수립한 이후에도 요동의 통치에 순응하며 많은 도움을 줬다. 심지어 이번에는 고려군의 기병을 격퇴하는 전공까지 올렸다.
어디 하나 의심할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치밀한 대계(大計)였던 거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실로 오랜 세월 고려가 요동을 도모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다.
풍승과 남옥은 작금의 상황이 황도의 변방이자 북방의 거점을 둘러싼 단순한 이합집산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다.
그만큼 상황은 엄중했다.
“어쨌거나 전황이 급박하오. 대승을 거둔 적군이 요동성을 완벽하게 포위했소.”
풍승의 말대로다.
남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예상하기 어려운 대계(大計)였다고는 하더라도 작금의 수세는 자신이 대패하여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 장군. 고려가 수립한 계획은 이게 마지막이겠지요?”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소. 하지만 아군이 농성전을 철저하게 고수한다면 난관에 봉착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더라도 성을 굳게 지킨다면 더는 농락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풍승의 말은 일리 있는 것이었다.
남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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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왕 탕화의 추격은 참으로 집요했다.
출병 소식을 접한 고려 군선이 곧장 퇴각했건만 물러나지 않고 뒤쫓았다.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토벌하겠다는 결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왜선의 양식을 따라 한 고려 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크기의 명 군선의 추격은 실로 위압적이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정지와 마천목의 미소는 진해졌다.
“어찌 됐나?”
“물러났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듯 도주했다.
그렇게 명 해안을 벗어나자 추격이 멈춘 거다.
동구왕 탕화가 대외 원정을 각오하지 않은 이상 계속 추격하는 건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명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병력이었으니까.
“음. 아쉽군.”
실망감이 가득한 정지의 답변.
마천목 역시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군.”
“어쩌실 생각입니까.”
“원안대로 해야지.”
“남경 말고 다른 포구를 찾아서 포격해야겠군요.”
“그러면 동구왕 탕화가 다시 반응할 걸세.”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꼭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쫓아왔으면 좋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다네.”
“이동하지.”
“예. 장군.”
신들린 듯 도주하던 고려 군선은 뱃머리를 돌렸다. 이번 목표는 남경이 아니라 인근의 군소 포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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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왕 탕화는 헛웃음을 삼켰다.
“다시 나타났다고?”
“예.”
“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의 출병 소식을 듣자마자 도주한 왜구들이다.
그런데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났다.
추격을 중단한 직후였다. 심지어 출몰한 곳은 남경 근처의 군소 포구였다.
이는 애초 퇴각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저 오는 비를 잠시 피한 것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조롱한 거다.
“당장 출병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동구왕 탕화의 군선 300여 척이 다시 바다로 출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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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네.”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총리님.”
법국(法國)의 일을 진두지휘한 신조는 맑게 웃었다.
왕선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재가화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손쉽게 적을 압박하지 못했을 걸세.”
왕선 역시 남옥과 풍승이라는 숙장이 이끄는 20만 대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제대로 자웅을 겨뤘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거고, 설령 이겼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요동성을 도모하기 어렵다.
이 요동이라는 땅은 공략하는 것보다 사수하는 게 백배는 어려운 거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직 공략의 시기다.
진짜 본판은 점령 이후 시작될 명나라의 집요한 공세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결국 공성전이 됐습니다.”
가장 좋은 수는 남옥의 좌군과 풍승의 우군을 동시에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풍승의 우군은 요동성에서 잔류했기에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남옥의 좌군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하지도 못했다.
재가화상의 기습과 몰아치는 최영의 공세가 맹렬했으나 남옥은 빠르게 대군을 통제하고 피해를 최대한 막으면서 퇴각에 성공한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지휘력이었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면서 신조를 지그시 쳐다봤다.
“걱정하지 말게.”
“예?”
“가장 좋은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네들이 탓이 아닐세. 그러니 약조는 반드시 지킬 것이네.”
“아.”
신조는 어색하게 웃었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공성전에 나서보도록 하지.”
“소승들도 거들겠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면서 생색내지 말게.”
“하하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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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에 잠입한 밀교원 천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제 고려군이 대대적으로 요동성을 공격할 것이다. 바로 그때야말로 그동안 준비한 대계(大計)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여,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꼼꼼하게 치밀하게 일을 진행했다.
“어찌 됐나?”
“명하신 대로 모두 처리했습니다.”
천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요동성 곳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밀교원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반응은?”
“의구심이 가득했습니다.”
“의구심이 가득하다?”
“예. 그러나 그동안 선탄 대사께서 쌓은 공덕이 큽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의구심이 믿음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천리는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개입했다는 걸 아는 요동성 백성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천리는 요동성에서 제법 악명이 높았다.
선탄에게 설복되는 역할도 담당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또 다수의 밀교원도 마찬가지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하였다고 알려졌으나 괜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물론, 이 문제를 떠나서 애초에 이것이 알려져서는 곤란하다.
남옥과 풍승이 작은 기미라도 파악하면 모든 건 물거품이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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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문서?”
“예.”
부관의 보고에 풍승과 남옥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엄중한 시기에 요동성 내부에서 작은 분란이라도 발생하면 곤란하다.
“무슨 내용인가.”
부관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응? 이게 뭔가?”
“소직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최근 요동성 백성들 사이에 돌아다녔습니다.”
“음. 소지하고 있던 자를 잡아 왔는가?”
“예.”
“데려오라.”
그 즉시 덜덜 떨면서 눈치를 살피는 농민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일찍이 선탄을 만났던 명농부였다.
“자, 장군. 소인을 살려주십시오.”
“누가 죽인다더냐.”
“그, 그것이···.”
풍승은 한숨을 쉬었다.
그랬다. 백성에게 관부는 어렵고 두려운 곳이다.
그러니 이렇게 떨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거고.
“죄가 없으면 당연히 해하지 않을 것이다.”
“소, 소인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음. 좋다. 묻는 말에 이실직고한다면 탈이 없을 것이다.”
“아는 대로 모두 말하겠습니다.”
“이 괴문서의 정체는 무엇이냐?”
명농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괴문서’를 살폈다.
“네가 가지고 있었다던데?”
“맞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부적입니다.”
“부적?”
“예. 집안의 우환과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입니다.”
풍승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고작 부적 때문에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는 건가?
“최근 전쟁이 발생해서 백성들의 불안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부적을 너도나도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다고 효과가 있느냐.”
“워낙에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는지라 그렇게라도 하는 것입니다.”
풍승이 물어본 건 부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반면, 명농부는 부적은 원래 무당과 승려가 적어야 하지만 그럴 처지가 안되는지라 자신들이 옮겨 적었는데 그렇게라도 위안으로 삼았다는 말이었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풍승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더 묻지 않았다.
부적이라는 건 혹세무민의 일부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시절에 그조차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민심은 너무나도 불안해 할 것이다.
“더 묻겠네. 백성들이 많이 동요하고 있나?”
“실은 그렇습니다. 아군이 큰 패배를 당했다고 들어서. 소, 송구합니다.”
“됐네. 그래서 백성들이 이걸로 많은 위안 삼는다고?”
“예.”
“음. 무당이나 승려가 쓰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그저 그렇게 위안 삼는 겁니다.”
풍승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관을 쳐다봤다.
“100여 명 정도 인력을 투입해서 부적을 대량으로 만들게.”
“예?”
“백성들의 동요를 막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일세.”
옳은 말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우 장군.”
“그리고 자네 이름이 명농부라고 했나?”
“예, 예. 장군.”
“부적 가져가게.”
“감사합니다.”
명농부는 기뻐하며 부적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미 미륵께서 하생하셨노라]
[신도들은 미륵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니라]
[도솔천에서 이르기를 미륵은 동방에서 오신다]
그런 다음에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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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전투가 터지지는 않았으나 치열함은 피부를 날카롭게 벨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반명 연합군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남옥과 풍승은 성벽에서 적군을 노려봤다.
최영과 나하추 그리고 호발도가 선봉에 보였다.
당장이라도 총돌격을 감행할 기세였다.
남옥과 풍승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철옹성 요동성의 성벽에서는 위력적인 화약 병기가 빠르게 배치됐다.
명령만 내려지는 즉시 이 무기들이 적군을 모조리 도륙할 것이다.
고려군도 제법 뛰어난 화약 병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감히 대명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은 농성, 적은 공성이지 않은가?
애초 상대가 될 수 없다.
점차 적군은 다가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풍승과 남옥은 화약 병기의 사정거리를 계산하면서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적진에서 백마를 탄 사람이 선두에 섰다.
“사신?”
사신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와중에 저렇게 다가올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와서?
“설마 항복을 청하려고?”
“이거. 오랑캐들에게 단단히 무시당하고 있구려.”
“기가 막히는군.”
이를 갈았다.
그런데 다가오던 사신이 멈췄다.
딱 화약병기의 사정거리 밖이었다.
그리고
“我是誰?! (내가 누구인가?!)”
갑자기 외쳐댔다.
...명나라 말로.
< 165화 미륵, 요동성에 하생하다(1)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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