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썩은 동아줄 내리기(2) >
정지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얼룩졌다.
마천목은 히죽거렸다.
“장군.”
“···말하게.”
“진심으로 아기발도가 환생한 줄 알았습니다.”
“자네 죽고 싶나?”
마천목은 흠칫했다.
그 정도로 정지의 목소리에는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정지의 손이 칼자루로 움직이자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송구하면 자네가 하게.”
“그럴 수는 없지요. 총사령은 장군이신데.”
“끙.”
정지는 한탄하듯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봤다.
그랬다. 지금 정지의 몰골은 과거 고려를 공격한 왜장 아기발도의 복색과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같았다.
특히 얼굴을 가린 황금빛 철 가면은 가히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기발도였다.
평생 왜구와 싸운 정지로서는 대표적인 왜장을 흉내 낸 것이니 고통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이 잘 풀리면 좋은 거지요.”
지금 정지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명나라 측에서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축맹이다.
그는 과거 고려로 사신단의 정사로 왔다.
재상이었던 정지를 기억할 가능성이 컸다.
하여, 정지는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자 아기발도의 그것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를 예측한 삼봉 장관도 보통은 아닙니다. 대단한 사람이 분명해요.”
“···개경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따질 것이네.”
“하하하. 반드시 그래야지요. 그나저나 명나라가 급하긴 급했나 봅니다. 왜구에게 협상을 제안하다니.”
“토벌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지가 이끄는 위장 왜구는 진짜 왜구와는 결이 달랐다.
철저하게 포구만 타격하고 명군과는 어떤 경우라도 싸우지 않았다. 출병 소식만 들으면 곧장 퇴각하여 인근 포구를 타격한 거다.
이는 종래 호전적인 공세를 견지했던 왜구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기에 명군으로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화약 병기를 이용한 사상 초유의 왜구이기도 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만큼 북방의 전선이 아군에게 유리하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걸세. 다만, 확실하게 하고 싶겠지.”
명 조정이 볼 때 정지의 목적은 완벽한 노략질이었다.
해서,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거다.
“아. 이제 저기 오는군요.”
마천목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축맹이 보였다.
한편, 축맹은 심기가 불편했다.
왜구 따위와 협상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마당에 장소가 포구 지척이었다.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협상하지 않겠다는 엄포 때문이었다.
축맹은 격하게 흥분하며 협상을 내던지고 당장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가볍게 일축됐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나오게 된 거다. 대명의 위신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오늘 협상 자리에서 대명의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
회담 장소에 왜장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도착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때였다.
“어서 오시오!”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포구에 정박한 왜선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왜장 옆의 역관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자! 이제 회담을 시작하겠소이다!”
...지금 이대로?
자리를 마련하여 얼굴을 맞대서 논의하는 게 아니라 육지와 군선에서 각자 서서 고함을 지르는 말인가?
하늘 아래 이렇게 격조 없는 회담이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천자국의 사신이 왔는데도 제대로 예의조차 차리지 않는 저 무뢰배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왜놈이로다. 짐승보다 못하도다.
축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군선에서 그 모습을 본 정지와 마천목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축맹의 낯빛이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자는 본국에서도 설치다가 개처럼 끌려나갔지요?”
“저 스스로는 외교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형편없는 인사일세.”
“그래도 꼴에 대국의 사신이라고 위세는 부렸던 거 같습니다.”
“큭. 그렇지. 그런데 천한 왜구 따위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죽고 싶을 걸세. 치욕스러워서 말일세.”
“치욕이요?”
“그렇지.”
“···우리처럼요?”
“···그렇지.”
두 사람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정지가 군선에서 축맹을 맞은 이유는 혹시라도 위장 왜구인 사실이 밝혀질까 우려해서다. 축맹의 말을 전할 역관이 고려말로 말하면 미친 짓이다. 그런데 왜국말로 할 수도 없다. 정지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외쳐대는 왜국말은 몇 가지만 속성으로 외운 거니까.
“역관. 시작하게.”
“예.”
정지의 명령.
역관은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보시오!”
대놓고 요구했다.
한눈에 봐도 축맹은 열 받아서 덜덜 떨어댔다.
그리더니 마구마구 외쳐댔다.
“뭐라고 하는가?”
“음. ‘지척에 황상의 대군이 집결했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더는 죄를 추궁하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살펴 가라고 전해주게.”
역관은 다시 외쳤다.
“살펴 가시오!”
“!!!”
“협상은 결렬이외다!”
“이, 이보게!”
다급한 외침.
그리고
“원하는 걸 말해보게!”
“군량 5만석!”
“!!!”
“군량 6만석!”
“그건 무리일세!”
“요즘 명나라 북방이 시끄럽더이다?”
“!!!”
“군량 7만석!”
“자, 잠시만 기다리게!”
“군량 8만석!”
“내가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가 없네!”
“군량 9만석!”
“!!!”
정지가 손짓하자 역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국의 태도에 따라서 우리의 군선이 돌아갈 곳이 바뀔 것이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고려는 괜찮은 낙원이었다오.”
축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상황 파악을 했다.
왜놈들이 갑자기 남경을 타격한 이유.
고려의 후미를 위협하겠다는 약조를 빌미로 군량을 대량으로 갈취할 생각이 분명했다.
어림도 없다.
“대명은 자네들의 도움 없이도 고려 따위는...”
“10만석!”
“좋네! 10만석! 참으로 적절하네!”
정지가 다시 손짓하자 역관이 외쳤다.
“가져오시오!”
“일단 군선을 물리시게!”
“오? 11만...”
“당장 준비하겠네! 나를 믿게!”
정지는 빙그레 웃었다.
“과연 축맹은 뛰어난 협상가로군.”
“대업이 끝나면 공신 책봉을 해줘야 할 수준입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어떻습니까. 총리님께 청해볼까요?”
“응당 그래야지. 저토록 큰 공을 세운 이를 홀대할 수는 없으니까.”
두 사람은 웃으면서 느긋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
“······.”
...잠시 잊었다.
지금 타인을 보고 웃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
양문은 초조했다.
갈수록 고려군과 나하추의 압박이 거세졌다.
점차 피해는 누적됐다. 물론, 지속해서 반격했으나 매번 패했다.
언제부터 탈주병도 생겼다. 이대로 간다면 내부에서 자멸할 게 뻔했다.
풍습과 남옥의 지원군이 도착하는 건 여전히 요원하다.
지금 믿을 건 호발도의 2만 기병이 양백연과 우인열을 돌파하는 것만이 유일했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다.
일이 틀어진 걸까?
왜 이다지도 소식이 없는 것인가.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때
“총병관님! 호발도로부터 급보가 왔습니다.”
드디어?!
양문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말하게!”
“진군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군도 대응해달라는 청이 왔습니다.”
됐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포위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호발도의 기병이 우인열과 양백연의 군세를 무력화시킬 때 결합하여 단번에 요동성으로 진군하면 된다.
그때 후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은 호발도가 감당하게 하면 된다.
이미 고려를 배신한 호발도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대명의 위대한 승리에 공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므로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진군 준비를 하게. 단번에 돌격할 것이야.”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처리하면 된다.
“요동 성주.”
“예.”
“적의 공세를 막을 수 있겠나?”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은 아주 간단했다.
본진이 호발도와 결합할 때 고려군과 나하추가 배후를 타격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으라는 거다.
요동 성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건 무척이나 위험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죽을 가능성이 아주 컸다. 본진이 움직이는데 적군이 얼마나 기를 쓰고 달려들겠는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요동 성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소, 송구합니다. 소직이 해내겠습니다.”
“자네를 믿네.”
양문은 곧장 군막을 나섰다.
홀로 남은 요동 성주의 머릿속으로 스치는 말이 있었다.
[화를 당하게 될 겁니다.]
...선탄의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말대로 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요동 성주에게 뒤를 맡긴 양문은 곧장 대군을 이끌고 진군했다.
총력을 다해서 달렸다.
“총병관님!”
저 멀리서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호발도의 군세입니다!”
양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보아하니 벌써 고려군을 돌파한 게 분명했다.
“좋다. 이대로 결합하여 곧장 요동성으로 돌격할 것이다.”
“예!”
부관과 병사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들 역시 포위진이 지긋지긋했다. 차라리 요동성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다.
양문은 호기롭게 말을 타고 가장 앞에 섰다.
호발도의 공을 크게 치하해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후미를 맡기고 요동성을 탈환할 것이다.
“하하하! 참으로 고생했어. 호발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외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천천히 다가오던 호발도의 기병이 갑자기 속도를 냈다.
“!!!”
돌격?! 돌격이 분명했다.
양문은 당황하여 크게 외쳤다.
“나, 날세! 요동 총병관 양문일세!”
그때 양문의 눈에 보인 건 날이 선 언월도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무장이었다.
입을 벌린 채로 눈을 한번 껌뻑였는데
“나는 미륵의 위타천.”
어느새 그가 지척이었다.
“대 고려국의 장수.”
“!!!”
“나세다.”
“!!!”
그 순간
-부아아아아아아아앙!
나세의 언월도가 휘둘러졌고
-터억
양문의 목이 떨어졌다.
동시에 나세가 언월도를 치켜들었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앙!
-부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대라 소리가 장내를 집어삼켰다.
나세가 이끄는 1만 기병의 대라 소리는 지축조차 두려움에 떨게 했다.
실로 장엄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세의 1만 기병과 호발도의 1만 기병이 총돌격을 감행했다.
-----
10만 석의 군량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빼곡하게 배에 실리는 걸 확인한 정지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역관을 쳐다봤다.
그러자 역관은 배에 힘을 준 채로 외쳤다.
“다 됐소이다!”
“약조는 지키시게!”
축맹의 화답.
그리고 이어지는 역관의 외침.
“명국이 본국에 바친 조공품은 잘 받았소!”
...조공품?
축맹의 표정이 기괴하게 틀어질 때
“조공품을 받았으니 하례를 하는 것이 지극한 예법!”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고요하던 남경 포구는 화약 병기의 굉음으로 뒤덮였다.
수차례 공격당한 탓에 이제는 잿더미만 보일 정도였다.
“ウハハハハハ! (우하하하하하!)”
“ウハハハハハ! (우하하하하하!)”
병사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間抜けなやつら!(멍청한 놈들!)”
한껏 조롱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화약병기의 거센 위력은 무려 10만 석의 군량을 실어온 수레와 마차를 박살 냈다.
축맹은 기겁하며 도주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주변을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왜구에게 무려 10만 석의 군량을 헌납했다는 걸.
오늘 왜구의 무도함이 대륙에 짙게 새겨졌다.
가히 쌍놈이었다.
< 162화 썩은 동아줄 내리기(2) > 끝
ⓒ 날아오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