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천목아, 미안하다 >
“이런.”
술맛을 떨어지게 만드는 마성의 목소리.
왕선은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왔으면 그냥 앉으시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왜 혼자서 청승맞게 술을 마십니까.”
정도전은 혀를 차면서 앉았다.
“군사가 늦게 왔다는 지극한 사실을 떠올리는 건 무리겠지요?”
“소생은 늦을 거라고 미리 말씀드렸다는 지극한 사실을 떠올리는 건 무리겠지요?”
“어쨌거나 나는 참으로 맛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덕분에 술맛이 떨어졌다는 걸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겠구려.”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는 걸 소생이 말하기 전에 깨닫는 건 불가능하셨겠지요.”
...요즘 따라 한 마디도 안 진다.
왕선은 일격을 가하기로 했다.
“자고로 진정한 주당은 혼술에 능하오. 물론 왕따는 이를 이해하지 못 할거요. 왜? 왕따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니까.”
“주당과 혼술이라.”
“도솔촌이외다.”
“오늘도 새로운 걸 알게 되었군요.”
어? 이게 아닌데?
왕선은 아차 싶었다.
“요즘 들어서 도솔천의 언어가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
“자 그러면 소생도 혼술을 해보지요. 한 잔 주십시오.”
“···혼술은 혼자 먹는 술이외다.”
“응? 혼을 뺄 정도로 맛있는 술이 아니고요?”
“···그러면 주당은 뭐라고 생각하오?”
“당당한 술.”
“······.”
“제왕의 품격?”
...말을 말자.
왕선은 포기한 듯 술이나 따랐다.
정도전은 방긋 웃으면서 벌컥벌컥 술을 마셔댔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워낙 바빠서 금주 아닌 금주를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 아주 신이 난 듯 마셔댄다.
“그동안 고생하셨소.”
“음. 왜 이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갑자기 술을 사주시는 것도 이상하군요.”
왕선은 자연스레 술병을 내밀면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더 잘해보자는 의미? 그런 거요.”
“음.”
“이제 힘든 고비는 다 넘겼지 않소이까.”
“명나라가 있습니다.”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명나라와 전쟁이 발발한 가능성은 적소.”
“이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북방의 동맹은 탄탄하오. 우리가 선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명이 공격해 올 일은 없다고 보오.”
정도전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가늘게 떴다.
-갑자기? 왜?
왕선은 술병을 내밀었다.
“다 끝났으니 오늘만큼은 가볍게 마시는 거요.”
“음. 명이 북원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군사동맹이 있소.”
“하지만 위태로움은 늘 존재하지요. 이미 국세가 많이 꺾인 북원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차하면 북원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형세도 위태로워지겠지요.”
“우리는 압록강만 잘 키면 되오.”
덧붙였다.
“명이 우리 고려를 강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 되니까.”
“음.”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압록강을 누구도 넘보지 못할 통곡의 장벽으로 만드는 거요.”
“하긴. 그렇게만 해도 충분하지요. 무리해서 북방 영토를 확보하려는 건 우매한 짓이니까요.”
“과연.”
“뭐. 그래도 외교 기조는 지금처럼 가져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당연하오. 명나라가 위협을 느낄수록 우리는 유리하니까.”
“과연 합당하십니다.”
그 뒤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왕선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취하는구려.”
“벌써요?”
“허. 군사는 멀쩡하오?”
“끄떡없습니다.”
“허.”
“매번 말씀드렸지만, 소생은 술 마시다 죽는 게 소원입니다.”
뭐. 이제 정도전이 술 마시다가 죽을 일은 없겠지? 이방원 보냈으니까.
왕선은 피식 웃으면서 술병을 내밀었다.
“한데, 이색에게는 왜 그렇게 모질게 한 거요?”
“그럴 만했으니까요.”
“음.”
정도전은 쓰게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포은 때문에 그랬습니다.”
“포은?”
“예. 소생이 그래야만 그 인사가 목은 이색 때문에 덜 괴로워하지 않겠습니까.”
“허.”
“포은에게 목은 이색은 하늘이고 태산입니다. 한데, 그가 역적이 됐다? 포은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태산이 가라앉은 일이지요.”
“해서, 그 원망을 대신하려고 한 거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원래 소생은 속이 좁다 터져서요. 분풀이나 한 거죠.”
“그건 아오. 한데, 포은은 군사를 노비로 몰아서 내치려고 했소만.”
“···괜찮습니다. 만일 소생이라도 포은이 분명한 정적이었다면 그리했을 겁니다.”
...아니. 당신은 안 그랬어. 제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포은만은 살리고자 했으니까.
그러나 왕선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포은 정몽주를 위하는 정도전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음. 그나저나 이제 말씀하시지요?”
“응?”
“우리밖에 없습니다.”
“아.”
주변을 돌아보니 정도전의 말대로다.
“괜히 소생을 불러서 북방의 일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심지어 기존에 우리가 세운 작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말입니다.”
일찍이 수립한 북진의 초안은 선제공격이었다.
그건 지금까지 절대로 수정하지 않은 대명제였다.
“우리 뒤에 있던 사람들.”
“잘 생긴 사람들이요?”
“미쳤소? 딱 봐도 명나라 정보원처럼 생겼는데.”
“잘 생겼...허. 명나라 정보원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정도전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제 왕선의 행동이 이해가 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은 강성해지고 북원은 쇠약해질 거다.
아무리 고려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꺾이기 시작한 국세를 어찌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럴 때 지나치게 시간을 끄는 건 명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해서, 왕선과 정도전은 줄곧 선제공격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수립했다.
“기존의 작전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신 거군요.”
“그렇소. 단지 선수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위태롭소. 우리가 요동을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명의 추가적인 움직임은 엄청날 거니까.”
“해서, 일종의 위보를 흘린 거군요.”
“그렇소.”
“명나라가 오판하게끔 말이지요?”
“바로 그거요. 현재 대륙의 정세를 분명하게 봐야 하오. 우리는 명의 주적이 아니오.”
“명의 주적은 북원이지요. 우리는 곁다리고.”
“그런데 우리가 끼어들어 분탕질하니까 골치 아플 거요.”
“이때 우리가 수세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하면?”
“최대한 빠르게 대륙을 정리하려고 할 거요.”
“그때 친다?”
“바로 그거요.”
“성공만 한다면 명의 추가적인 공세를 미리 차단하는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북원은 애를 먹겠지만.”
“거기까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요.”
역시 정도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정도전은 시원하게 화답했다.
“어차피 최후의 승자는 우리 고려가 되어야 하니까요. 천하는 고려와 명 양강체제로 개편될 겁니다.”
옳은 소리.
그래서 격하게 칭찬해주기로 했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시오.”
“응? 그걸 왜 마십니까? 세상에 맛난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본전도 못 찾았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미안하오.”
“술이나 드세요.”
“그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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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이 서경에 당도했습니다.”
이건 당연한 소식.
“요동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군마를 조련하고 군량을 확보하는 중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거야말로 기다리던 소식.
왕선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여태껏 해온 일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명나라가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고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건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최악의 경우 칭제건원을 거두고 사대하면 되니까.
그러나 왕선이 선택한 길은 그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
대륙의 패자를 공격하는 걸 넘어서 조롱하는 게 목표다.
자신 있다. 그러나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북방의 패권을 장악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전역에 전쟁의 참화에 노출될 가능성도 크다.
“주공.”
상념에서 돌아오게 한 목소리.
정도전, 남은, 마천목, 이옥.
서경으로 간 나세를 제외하고 지금의 왕선을 존재하게 한 역전의 인사들이 쳐다보고 있다.
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봤다.
그들의 목울대가 울렁이는걸.
그리고 들었다.
그들의 마음 한쪽에 거대한 불안함이 있다는 걸.
그리고 알게 됐다.
그것의 원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
대명 선전포고를 한 이후 이들이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걸 보지 못했다.
정세의 변화와 함께 다가온 결정적 시기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왕선 본인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못난 모습을 보였구려.”
“아시니 다행입니다.”
웃음이 담긴 정도전의 목소리.
조롱하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내뱉은 농이었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정도전의 재치를 띄웠다.
“거. 갈수록 건방지오?”
“도솔천의 법도.”
“허.”
“가보고 싶습니다.”
모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해야겠지?”
“예. 딱 지금이 적기입니다.”
“대사헌 남은.”
남은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진족의 호발도와 접선하겠습니다.”
“절대 호발도가 경거망동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지금부터는 작은 틈이라도 생긴다면 모두 무너질 거니까.”
“일이 도모될 때까지 소생이 호발도와 함께 하겠습니다.”
“적절하군.”
북원은 알아서 사람을 보내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최영이 능동적으로 잘 대처할 거고.
그러면 남은 건 한 가지다.
오랫동안 전주의 전녹생이 준비하고, 정지가 화룡점정을 찍은 일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번 대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원할 사람이 있나?”
왕선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이옥과 마천목이었다.
...그런데
“하하...”
“험험.”
두 사람 모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왕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중차대한 일이네만.”
그런데도 나서지 않는다.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마천목 대장이 적합할 거 같습니다.”
“구, 군사님!”
다급한 마천목의 외침.
그러자 이옥이 곧장 끼어들었다.
“소장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처럼 중차대한 일은 소장보다 마천목 대장이 어울립니다.”
“자, 장군! 왜 이러십니까?!”
“늘 생각했네. 자네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소장은 겨우 제 앞가림을 하지만 장군은 고려 숙장의 반열에 계시지 않습니까.”
“자네도 숙장일세.”
염제신의 목숨을 거둔 이후 이옥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전에는 거의 웃지 않고 무표정했는데 최근 들어 농도 하고 미소도 많이 보였다.
“형님! 소제보다는...”
“내 생각에도 자네가 어울릴 거 같네.”
“!!!”
“나는 자네를 믿네.”
“!!!”
마천목의 표정은 측은지심이 느껴질 정도로 일그러졌다.
“혀, 형님.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형님을 보좌한 건 소제입니다!”
“알지.”
“하, 한데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왕선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위로했다.
“가거든 정지 장군에게도 사정을 잘 말하게.”
“!!!”
쐐기를 박았다.
마천목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렸다.
...미안하다. 천목아. 그래도 네가 가장 적임자다.
왕선은 시선을 돌렸다.
< 159화 천목아, 미안하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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