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57화 (157/187)

< 157화 고려국 총리 왕선 >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관.”

“예. 영공전하.”

“군사.”

“예. 주공.”

“허튼 생각하지 마시오.”

정도전은 화들짝 놀란 시늉을 하면서 답했다.

“허튼 생각이라니요?”

“잔말 말고 내놓으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귀신을 속여야지.

발뺌하는 정도전을 뚫어질 듯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륜이 들고 다니던 조작 문서.”

“그런 게 있었습니까?”

“선대 황제가 이인임한테 내렸다고 공갈친 문서.”

“없습니다.”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맙시다.”

“음.”

정도전은 요리조리 눈알을 굴렸다.

입술을 수차례 들썩이면서 코를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들썩이던 입술이 언어를 만들어 내려고 할 때 왕선이 선수쳤다.

“안 하오.”

단호한 말.

동시에 느닷없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문형이 아니었다.

“어째서요.”

“아. 했구려. 왕 하라고 했는데 지금 왕이잖소.”

“농이라면 아주 재미없군요.”

왕선은 손사래를 치면서 딱 잘라서 말했다.

“황제. 안 할 거요.”

정도전은 입술을 잘게 깨물면서 눈치를 살폈다.

잘 알고 있다. 더 나아가면 불호령이 내릴 수도 있다는 걸.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때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안 한다고 했소. 백번은 더 말했소.”

“언제까지 황제의 패악질을 보실 겁니까.”

“미쳤소? 말조심하시오.”

“주공.”

“내가 황제가 되면? 재상 총재제를 포기할 거요?”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외다. 누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직에 오를 거요?”

“소생을 믿지 못하신다면 포은도 있습니다. 사실 소생보다는 포은이 집정 대신으로서 더 적합하지요. 소생은 무너뜨리는 걸 잘하지만 포은은 쌓아 올리는 데 능하니까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구려.”

“예?”

왕선은 정도전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건 조금 전까지 가볍게라도 농을 던지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확실한 선례를 만들어서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으로 삼으시려는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유는 맞소. 그러나 전부는 아니오.”

“예?”

이게 무슨 말인가.

일전에 그토록 강력하게 선례를 설파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희한했다.

정도전의 눈에는 큰 의구심이 내렸다.

왕선은 입맛을 다시면서 간단하게 내뱉었다.

“아. 됐소.”

“왜 그럽니까.”

“듣고 싶소?”

“예.”

“나는 재상 총재제야 말로 현시대에 가장 걸맞은 정치체제라고 생각하오.”

“압니다. 그래서 법전도 만드시는 거 아닙니까.”

“나는 권력이 좋소.”

“예?”

생각지도 못한 말.

정도전은 당황했다.

“황제가 됐는데 재상 총재제 하면 허수아비 신세가 되는 거요. 나는 싫소.”

“······.”

“재상 총재제를 구현할 결정적 시기. 이는 나의 이상이기에 해낼 것이외다. 그러나 개인의 욕심은 권력. 이 또한 포기할 생각이 없소. 그래서 용상은 관심 없소. 뭐하러 허수아비를 자처하오?”

“···농이지요?”

“진심이오.”

왕선은 재상 총재제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정치가 구현될 수 없는 시대에서 군주 세습제를 대체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선은 대한민국의 정점에 오르려고 했던 사람이다. 한때 대권의 문턱까지 갔었다. 불의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대권을 움켜쥐었을 거다.

그랬다. 왕선은 아주 충만한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넘치고 흐를 만큼의 권력욕을 가진 것이다.

또한, 이를 사유화하여 국정을 농단하는 우매한 짓을 자제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다.

당혹스러운 낯빛을 숨기지 못한 정도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약조하리다. 내가 황제가 되면 재상 총재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요.”

“허.”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을 보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왕선이 해온 일.

사대부의 관직 진출을 박탈하고, 북방의 일을 위해서 종교탄압을 단행했다.

정도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시오.”

“주공.”

“선택하시오. 내가 황제가 되는 것과 재상 총재제의 시작.”

“······.”

“군사의 말대로 하리다.”

...이걸 선택해야 한다?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유능한 군주 한 명을 보고 포기할 만큼 정도전이 꿈꾸는 필생의 신념인 재상 총재제는 가볍지 않다.

명군이 아니라 암군을 대비한 것이 재상 총재제가 아닌가.

그러니 답은 뻔했다. 그런데도 아쉽다.

그래서일까? 정도전은 쥐어짜듯 힘겹게 말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공전하.”

“합당하오.”

“영공전하의 권력의지. 그것은 후대에 이르러서는 다르게 평가될 겁니다. 권력을 초월한 명재상으로 말입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거요.”

“실상은 다르지만요.”

“뭐. 어쨌거나.”

정도전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평소 모습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강안전을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리다.”

“음. 죄인들은요?”

“일단 그대로 두시오. 내가 직접 국문에 임하리다.”

말하고 나니 궁금한 게 있다.

“아.”

“예?”

“재상들 몰골은 왜 그렇소?”

“아.”

“팼소?”

“예.”

“음.”

“건방지더라고요.”

“뭐. 어련하겠소. 한데, 국방성은 왜 불탔소?”

“아.”

“불 질렀소?”

“예.”

“그건 당신 녹봉에서 차감하리다.”

“이런.”

“인과응보.”

“허.”

왕선은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정도전이 옅게 웃으면서 손을 잡으려고 할 때

“지금 뭐하오?”

“예?”

“됐고. 하륜이 들고 다니던 문서나 내놓으시오.”

“예?”

“위조문서 달라고요.”

“······.”

정도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역시 황제의 재목은 아니로다. 내가 잠시 미친 거였어.

왕선은 싱긋 웃었다.

-----

-쾅!

강안전의 문은 초라할 정도로 박살 났다.

황제 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떨리는 손가락을 용포로 감추는 거였다.

그리고 왕선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습을 보였다.

“···완산공.”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사옵니다.”

“···완산공.”

“이 나라의 모든 영광을 폐하께 바치겠노라 약조했사옵니다.”

사색이 된 왕우의 눈동자는 애잔함을 느낄 정도였다.

“짐이 경솔했습니다.”

“아니옵니다. 신이 안일했사옵니다.”

“아닙니다. 짐이 부덕한 탓입니다.”

“아니옵니다. 신이 안일했기 때문이옵니다. 폐하.”

내심 안도하던 왕우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왕선의 어조가 참으로 묘한 거였다.

불안함이 솟구쳤다.

...설마?

다급함이 치솟았다.

“와, 완상공.”

“이르시옵소서.”

“모두 하륜의 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가 재상 총재제라는 해괴한 법전을 가져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겁니다. 짐을 이해해 주세요. 황제국 고려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불암함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겁니다.”

“맞사옵니다.”

“그, 그렇지요? 짐을 이해...”

“재상 총재제. 그거 맞사옵니다.”

“!!!”

“왜 그렇게 놀란 시늉을 하시옵니까. 알고 계셨던 사실이 아니옵니까.”

감정의 고조가 느껴지지 않는 왕선의 목소리.

왕우는 덜덜 떨었다.

지금 이 순간 왕선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인제야 깨달았다.

왕선이 원한다면 황제의 목숨 따위는 한순간에 날아간다는 걸.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이 지금일 수도 있다는 것도.

“와, 완산공.”

간절함이 가득한 왕우의 목소리.

그러나 왕선은 답하지 않고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황상께서 신돈의 핏줄임을 증명한 적힌 선대 황제의 유훈이옵니다.”

“!!!”

“폐가입진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와, 완산공.”

“정창군 왕요를 용상에 올리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떠들었사옵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짐은 위대한 태조 황제의 후손,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입니다.”

“그렇사옵니까?”

“!!!”

무미건조한 왕선의 목소리.

왕우는 거센 충격에 빠졌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그 모습은 참으로 비루했다.

“이제 아시겠사옵니까?”

“와, 완산공.”

“황상 폐하께서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말이옵니다.”

“지, 짐은 선대 황제의 핏줄입니다.”

“예. 그런데 저들이 권력을 잡았다면 황상께서는 신돈의 핏줄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

“그게 바로 정치라는 생물이 가지는 힘이옵니다.”

어쩌면 군주로서 재목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인임 집권 시절부터 지금까지 용상을 지켜온 왕우다.

역량을 떠나서 눈치가 빨랐다.

해서, 지금 왕선의 말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싸움의 승자가 왕선이기에 용상이 보존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완산공. 고맙습니다.”

“다시 고하겠사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시옵소서.”

“꼬, 꼭 그러하겠습니다.”

“음.”

“완산공.”

“이렇게 하겠사옵니다.”

“마, 말씀하세요.”

왕선은 왕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렴청정을 거두겠사옵니다.”

갑자기?

찰나 왕우의 눈동자가 변했다.

그러나 싸늘한 왕선의 눈과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오늘부터 신은 수렴청정이 아니라 재상 총재제에 근거하여 선인전을 이끌 것이옵니다.”

“!!!”

“그러니 이제 선인전에 납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강안전에 계시옵소서.”

“!!!”

그동안 수렴청정의 명목으로 국정을 총괄한 왕선이다.

하여, 왕우는 아무 역할이 없더라도 꼬박 선인전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그동안 왕우는 나름대로 조정의 운영방식을 귀담아들었다. 훗날 친정을 대비한 학습인 거다.

그런데 이제 그조차도 하지 말라는 거다.

이는 영원히 친정의 길이 막히는 걸 의미했다.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를 구현하겠사옵니다.”

왕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시겠사옵니까?”

거절하면?

...폐위당할 수도 있다.

폐주가 되는 것보다 이렇게 강안전에 있는 게 백배는 낫다.

이 자리에 있으면 적어도 부족함 없이 모든 걸 누릴 수 있으니까.

...실제적인 권력 빼고.

선택의 여지는 없다.

“···완산공의 뜻대로 하세요.”

“하옵고, 황제의 위상에 부족함이 없도록 내탕금은 꾸리겠사옵니다.”

내탕금? 꾸린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 살림을 꾸릴 때 황상께서 사용하실 1년 예산을 책정한다는 것이옵니다. 더는 지금처럼 흥청망청 쓰실 수 없사옵니다.”

왕우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선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오직 군림만 하시옵소서. 군림의 정도는 숨만 쉬는 것이옵니다. 부디 명심하소서.”

“···알겠습니다.”

-----

왕선은 곧장 선언했다.

[대 고려국은 재상 총재제로 운영된다.]

그리고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직을 신설할 것이며 총리라고 부른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하지 못했다.

다 떠나서 반대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재상은 모두 하옥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여, 순탄했다.

바야흐로 재상이 통치하는 고려가 닻을 올렸다.

그리고 1대 총리는 왕선이었다.

“송구합니다.”

“됐네. 이지란이 죽자고 준비한 일인데 자네가 어찌 막았겠는가.”

윤소종은 안타까움이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법전을 반포해야 하는데.”

“됐네.”

“······.”

“일국의 법도를 적은 법전일세. 급하게 만들 수 없네. 1년이 걸려도 괜찮고, 10년이 걸려도 괜찮네. 천천히 하게.”

왕선의 위로에 윤소종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는 숨어서 할 필요가 없네. 개경에 관청을 내줄 것이니 전력을 기울이게.”

국력을 투입한다면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편찬사업이 진행될 것이다. 윤소종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폐가입진(廢假立眞)] 역모 사건의 죄인들을 벌하는 국문을 열었다.

< 157화 고려국 총리 왕선 > 끝

ⓒ 날아오르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