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전주 이씨 동북파 최후의 날(1) >
왕선 집권 이전 고려 정치의 심장부였던 도당은 국방성이 들어선 지 오래였다. 그래서 특별한 군무의 일이 없으면 정도전의 집무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웬일인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중요한 관청이었기에 관리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오늘은 명덕태후의 국장이 진행되는 첫날이다. 그래서 지금의 소란은 다소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도 예사롭지 않았다.
박위, 우인열, 배극렴, 변안열, 양백연 등 한때 외적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낸 백 전의 장수들이자 군웅할거를 풍미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모이셨군요.”
하륜이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타났다.
“자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나?”
박위였다.
“예. 그렇습니다.”
“허. 이 사람은 자네가 우리를 불러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소생이 연락을 취한 건 맞습니다. 그러나 어찌 의지까지 소생의 것이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황명입니다.”
...황명?
작금의 고려에 그런 단어가 존재했던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괴이한 단어가 아닌가.
모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태후마마의 국장이 진행되는 날일세. 우리를 불러낸 합당한 연유가 없으면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네.”
“예. 태후마마의 국장이지요. 그런데도 국방성이 모인 모습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거 같습니다만.”
“허. 미쳤군.”
“무엇보다 황명이라고 했는데 가볍게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겁니까.”
“뭐라?”
“참으로 우습군요.”
“음. 아마도 자네가 죽고 싶어서 그러는가 보군.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라고 보이는가.”
한명 한명이 일당백의 무장이다.
지금 이들이 기침만 내도 하륜은 죽는다.
그런데 하륜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바로 그겁니다.”
“뭐라?”
“황명이 우스운 나라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지요.”
“하.”
박위의 입에서 노기가 흘러나왔고, 다른 재상들도 험악한 눈으로 하륜을 노려봤다.
그때
“여기.”
하륜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황상께서 친필로 쓰신 어지가 있습니다.”
“!!!”
하륜은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완산공 왕선은 재상 총재제라는 해괴한 법도를 만들어서 이 나라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를 황상께서 아신 거지요.”
“!!!”
재상들의 눈이 흔들렸다.
재상 총재제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모를 수가 없다.
...그걸 법도로서 규정한다?
사실상 왕선의 영구 집권이 완성되는 거다.
그러나
“음.”
묵직한 침묵이 내렸다.
그랬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만큼 왕선의 존재감은 거대한 것이었다.
하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명입니다. 어지도 가져왔고요. 옥새도 찍혔어요.”
“······.”
“역시 이래도 반응이 없군요. 맞습니다. 이 나라 고려의 황권은 이처럼 보잘것없지요. 그런데 하나 묻지요. 왜 이렇게 됐을 거 같습니까.”
“······.”
하륜은 품에서 또 다른 서찰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 나라의 황제가 신돈의 핏줄이라는 선대 황제의 유훈입니다.”
“!!!”
국방성은 충격에 휩싸였다.
하륜은 일갈했다.
“폐가입진. 신 씨를 몰아내고 사해 용왕의 핏줄을 황위에 올려야 합니다. 또한, 족보에도 없는 주제에 군호를 받은 간악한 왕선도 몰아내야 합니다. 두 명의 가짜 왕 씨를 끝장내고 태조 황제의 후손을 옹립하는 겁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철렁이면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선대 황제의 친필이 분명한 서찰을 보고 경악한 거다.
하륜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창군께서 결심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건 장군들의 결정입니다.”
덧붙였다.
“이 나라 고려를 위한 대승적 결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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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바뀌었으나 사람의 본성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바뀐 역사만큼 사람의 운명도 바뀐 거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곳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이방원이 이렇게 죽었으니까.
“영공전하.”
잠시 상념에 빠진 왕선의 귀로 정몽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가?”
“씁쓸하군요.”
“그대로 의연하더군.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행동한 겁니다. 실제로는 두려웠지요.”
“두려웠다? 포은 정몽주가? 죽음을?”
의외였다.
이 사람은 죽음조차 초월한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왕선의 의아한 표정을 본 정몽주는 담담하게 답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만.”
“가치를 위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가치를 위한 죽음이라.”
“이 나라 고려를 위한 죽음이었다면 의기로써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소생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는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지요. 고려의 사직과는 무관한 개죽음. 하여, 두려웠지요. 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개죽음일지라고 할지라도 개처럼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
“목숨을 빚졌군요.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왕선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빚진 게 아니라 내가 갚은 걸세.”
“예?”
“폐가입진과 재상 총재제. 모두가 나를 의심하는데 자네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죽음과 진실은 바꿀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고맙네. 나를 믿어줬으니까.”
정몽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본궐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정리해야지. 오랜만에 자네와 뜻깊은 대화를 했더니 시간을 낭비했군.”
“본궐로 가십니까?”
“거기 있다가 왔네. 자네 구하려고.”
“빚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끙. 그렇다는 말일세. 어쨌거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이네.”
“소생도 함께하지요.”
“좋지.”
“어디로 가십니까.”
“가보면 알 것이네.”
“한데, 본궐을 이대로 둬도 되겠습니까?”
왕선은 싱긋 웃었다.
“거긴 다른 사람이 있네.”
“다른 사람이요?”
“그렇다네. 자네도 잘 아는 사람이지. 이 나라 최고의 혐성을 가진 사람.”
“혐성?”
“혐오스러운 인성.”
정몽주는 피식 웃었다.
“삼봉이군요.”
왕선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안 가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아. 삼봉은 고려 최고가 아닙니다.”
“그러면?”
“천하 제일이지요.”
“적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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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승산을 점쳤다.
재상 총재제로 시작해서 폐가입진까지.
재상들은 혼돈에 빠졌다.
이제 마무리해야 했다.
“백전의 무장이십니다.”
덧붙였다.
“사병이 혁파되었으나 십 년이 지났습니까. 백 년이 지났습니까. 지금 당장 나서신다면 병사들은 모두 들떠 일어설 겁니다.”
사실이긴 했다.
비록 사병 혁파가 이뤄졌으나 사람이 바뀐 건 아니다.
지금 창칼을 든 사람들은 재상들이 군웅으로 군림할 때 부리던 병사들이고 부관들이었다.
이들이 일갈하면 상당한 규모가 움직일 거다.
바로 이렇게 왕선의 군권을 철저하게 붕괴시키는 거다.
그때
-쾅!
큰 굉음이 울렸고
-콰르르릉!
-콰르르릉!
사방에 불길이 번졌다.
대경한 하륜과 재상들은 다급하게 국방성을 벗어났다.
그런데
“아이고.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겁니까?”
다급히 국방성을 탈출한 그들의 귀에 흐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정도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여긴 국방성인데. 그래. 내가 착각할 리가 없지. 근데 국방성이면 내 집인데? 집주인 허락도 안 받고 무슨 작당 모의를 하셨나?”
그의 뒤로 수백의 병사들이 빼곡하게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하륜은 애써 침착했다.
정도전이 뭔가를 알고 온 게 아닐 거다.
혹시 불이 나는 걸 보고 달려온 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했다. 반드시.
“···사형.”
“정창군 왕요를 용상에 앉히려고?”
“!!!”
하륜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재상들이 지금이라도 호통치면서 자신의 사병이었던 이들을 동요시킨다면 승산은 있다.
정도전은 싸늘하게 웃었다.
“헛된 기대는 버리게. 내가 데려온 병사들은 전주의 순혈이니까.”
하륜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정도전이 이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건 왕선이 모든 걸 파악했다는 거다.
...일이 완벽하게 틀어진 거다.
그리고
“거. 한 명도 안 죽었군요. 쥐새끼처럼 모여서 작당 모의하는 당신들 중 절반은 죽길 바라고 국방성을 박살 낸 건데. 이건 선대 황제 시절 요동을 점령했다가 퇴각한 것보다 더 아쉬운 일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군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국방성의 화마는 정도전이 일부러 낸 거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재상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 심심하게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조롱은 이어졌다.
“폐가입진을 외치면서 달려와야지요. 일당백의 기세를 보이면서.”
“장관. 오해가 있는 거 같소.”
“오해요?”
“그렇소.”
“역적모의가 이뤄지던 현장에서 잡혔는데 오해라. 그게 오해면 파리도 새지요.”
“장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국장을 불참하고 여기 모였다?”
“장관.”
“오. 이거야말로 궁예가 옴마니 반메홈 하는 소리군요. 참신한 궁예 소리. 잘 들었습니다.”
박위와 재상들은 다급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역적이 될 상황이다.
물론, 국장임에도 국방성에 모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죄가 분명하다.
...그러나 역모에 동참한 건 아니다. 적어도 이 순간은.
“원래 개 버릇 남 못 주는 겁니다. 촌구석에서 맹주 노릇 하다가 개경에서 대가리 숙이고 다니려니 미치겠지요?”
“장관!”
“시끄럽다. 역적놈아.”
“!!!”
정도전은 거칠게 오른손을 들었다.
-차아아아아아앙!
-차아아아아아앙!
수백 명의 정예군이 일사불란하게 창칼을 들었다.
또한, 수십 명의 궁수가 활을 겨눴다.
이제 말 한마디면 하륜과 재상들은 모두 죽는다.
“아. 영공전하의 말을 전하지. 역적놈들아.”
비릿하게 웃었다.
“국문은 없다. 그냥 죽어라.”
“!!!”
정도전의 오른손이 움직일 때
“장관!”
변안열이었다.
정도전의 시선이 슬쩍 움직였다.
“국문이라도 열어주게. 최소한 결백을 증명할 기회라도 주게.”
정도전은 손사래를 쳤다.
“나더러 영공전하의 뜻을 어기라고? 미쳤군. 그랬다가 삼일 밤낮을 시달릴 건데.”
“그간의 정을 생각하게. 나 변안열. 적어도 고려의 사직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네. 진심일세.”
“음.”
“그것도 아니라면 내 손으로 죽을 기회라도 주게.”
“역적이 명예를 찾는다? 파리가 용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장관.”
사실 왕선은 이들을 즉결심판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다.
정도전은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조소를 날렸다.
“하면, 국문에 임할 기회를 주지.”
“말하게.”
변안열이 물었으나 정도전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개처럼 끌고 와라.”
곧장 말을 고쳤다.
“개 패듯이 패면서 끌고 와. 반항하면 죽이고. 소리 내도 죽이고. 움직여도 죽이고.”
그리고 다시 변안열과 재상들을 노려봤다.
“진정 억울하면 그냥 두들겨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믿어주지.”
덧붙였다.
“더러운 역적놈의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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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밝게 웃으면서 이색의 손을 잡았다.
“대감께서 나서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외다. 어차피 포은이 할 일이오. 이 늙은이는 그저 거드는 것이외다.”
“하하하. 겸손하십니다. 과연 선생이십니다.”
“그나저나 정창군 대감께서는?”
“이 사람의 사가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고 계십니다. 염제신 대감이 함께 있습니다.”
이색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상을 이을 정창군이다.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그러자면 가장 안전한 곳이 좋다.
개경 땅에서 이성계의 사가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모든 사대부에게 이쪽으로 모이라고 했소.”
“훌륭하십니다. 정창군 대감께서도 모든 종친을 모아내셨습니다.”
사대부의 연좌.
왕실 종친의 압도적인 지지.
그리고 재상들의 협조.
폐가입진을 위한 명분과 힘이 모두 모이고 있다.
이성계는 흡족하게 웃었다.
“한데, 포은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오?”
“방원이가 설득했습니다.”
이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혀, 형님!”
이지란이었다.
이성계는 본능적으로 그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을 느꼈다.
...뭔가 일이 터진 거다.
“관군이 사가를 포위했습니다!”
이성계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지란이.”
“예. 형님.”
“문을 활짝 열어라.”
그 말과 함께 이성계가 손을 내밀었고
“알겠습니다.”
이지란이 답하면서 활과 화살을 올렸다.
< 155화 전주 이씨 동북파 최후의 날(1)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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