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선지교에 흐르는 선혈 >
“당신이 여긴 무슨 일입니까?”
황제 왕우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뱉었다.
하륜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신은 광평군의 처조카 사위이옵니다.”
“압니다.”
“광평군은 황상 폐하와 태후 마마 두 분과 많은 은원이 있사옵니다.”
“악연이겠지요.”
“신은 태후 마마의 마지막을 지킬 의무가 있사옵니다. 하여, 황상 폐하를 모시고자 강안전에 왔사옵니다.”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의무를 누가 내렸는지 모르겠군. 당장 나가세요.”
“폐하.”
“그래. 항상 이런 식이었지. 당신들 일가는.”
“예. 소신의 일가는 항상 이런 식이었사옵니다.”
“뭐라?”
비루했던 과거를 조롱하는 말이다.
왕우는 눈꼬리가 치솟았다.
그런데도 하륜은 낯빛조차 변하지 않았다.
왕우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사지를 찢어 죽이기 전에.”
“폐하께 그런 힘이 있사옵니까?”
“하.”
“완산공 왕선의 힘이옵니다.”
“하. 참으로 고약한 작자로군.”
“적어도 신의 처 백부 광평군은 황상 폐하의 마지막 권위를 넘지는 않았사옵니다.”
“짐을 능멸한 권신이었지.”
“그래도 권불십년이었사옵니다.”
이 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왕우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어졌다.
“그러나 완산공은 권불십년이 아니옵니다. 그는 영원한 권력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사옵니다.”
불안함. 평소 가지고 있던 불안함이었다.
...언젠가는 친정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완산공 왕선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짙다. 이인임이 용상에 올려줬다면 유지하는 왕선이니까.
그래서 불안했다. 그러나 믿었다. 언젠가는 그의 권력도 끝날 거라고.
그게 최고의 희망이었다.
해서, 그때까지만 그의 말에 충실한 황제가 되기로 했다.
지금처럼.
“하. 헛수작 부리지 말라.”
하륜은 품에서 서책을 꺼내서 공손하게 내밀었다.
왕우의 눈에는 의구심이 솟았다.
그리고 불안함도 함께 생겼다.
그래서 서책을 펴보지 않았다.
두려워서.
“일전에 완산공이 윤소종을 서경으로 보냈사옵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연히 알았사옵니다. 윤소종의 사가에서 종놈이 아니었다면 그가 서경으로 간 것도 몰랐을 것이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성계 장군의 의제 이지란 장군에게 부탁했사옵니다. 윤소종이 대체 왜 서경으로 갔는지 말이옵니다. 신이 알기로 그는 서경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까요.”
“······.”
“법전을 편찬하고 있었사옵니다.”
“···법전?”
“친히 확인하시옵소서.”
...법전? 법전이라니.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왕우는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면서 서책을 펼쳤다.
[대 고려국 입헌주의]
한 장을 넘겼다.
“!!!”
다시 한 장을 넘겼다.
“!!!”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
왕우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렸다.
“!!!”
왕우는 서찰을 덮었다.
덜덜 떨면서 말했다.
“재상 총재제?”
“예.”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예.”
“하. 그게 이 뜻이었구나.”
...설마 대충이라도 들은 적이 있었나?
그런데도 그냥 자리만 지켰다?
하. 참으로 비루한 황제가 아닌가.
하륜은 속으로 비웃었다.
“폐하. 완산공 왕선은 이 땅에 존재한 권신과는 다르옵니다. 법도로서 황제의 권능을 삼키려고 하는 사상 초유의 괴물이옵니다.”
“···짐에게 이를 말하는 이유는?”
“완산공의 지금을 만든 장본인이 세상을 떠났사옵니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옵니다. 국장이 끝나면 모든 게 허사가 되옵니다.”
“···태후 마마의 국장에 그를 제거한다?”
“황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짐의 황명이 무슨 힘이 있다고.”
“내려주시옵소서. 신이 해낼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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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은 간곡하게 말했다.
“목은 대감.”
“···대감.”
“대감이 결심하셔야 합니다.”
이색은 난처함을 피력했다.
그럴수록 염제신은 마음이 급해졌다.
[반드시 스승님을 설득하셔야 합니다. 실패하면 대사도 그르치는 겁니다.]
하륜이 신신당부했다.
지금쯤 그는 강안전을 설득하고 있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목은 이색을 꾀어내지 못하면 크게 어긋나는 거다.
...지금까지 한 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해서, 더 절절했다.
“대감. 나라를 바로 잡을 마지막 기회입니다.”
“포은이 있지 않습니까.”
“예. 포은이 있지요. 그러나 이 나라 고려의 유종이 누구입니까.”
“···거세게 몰아치는 뒷물을 어찌 막겠습니까. 이 사람은 이제 퇴물입니다.”
“아니지요. 아직 이 나라의 유종은 목은 대감입니다. 정몽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염제신은 격정적으로 내뱉었다.
“대감. 선대 황제를 모셨던 신하는 바로 우리입니다.”
“······.”
“신돈의 핏줄을 용상에 올림으로서 선대 황제께 지은 죄는 죽어서도 갚지 못하겠으나 적어도 과오는 바로 잡아야지요. 그래야만 구천을 떠돌고 계실 선대 황제의 넋을 기리고 저승에서 용안을 뵐 면목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
“우리가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 잡습니까. 포은이 할 일과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색은 울렁이는 속을 겨우 다스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염제신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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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덕태후의 국장은 왕선이 주관했다.
침통함을 애써 숨긴 채 일을 진행했다.
재상들이 한 명씩 모습을 보였다.
아직 다 모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만간 모두 모일 것이다.
“허. 태후 마마의 국장입니다.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해야지요.”
고개를 돌렸다.
황제 왕우였다.
“폐하. 이는...”
말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왕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리고 멀찍이서 쳐다보는 하륜과도 시선이 마주쳤다.
“!!!”
...정몽주가 위험하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그때 스치는 게 있다.
...이방원이라면.
생각을 끝냈다. 당장이라도 판을 엎어버리려고 했으나 일단 참았다.
명덕태후의 국장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다.
물 밑에서 일거에 제압할 것이다.
“완산공?”
“아. 이는 태후 마마의 뜻이옵니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짐이 실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험악하게 노려볼 줄은 몰랐습니다.”
“아. 황공하옵니다.”
“뭐. 괜찮습니다. 누구보다도 태후 마마와 가까웠던 완산공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황공하옵니다. 하옵고 황상께서 오셨으니 신은 물러가겠사옵니다.”
“물러간다고요?”
왕우는 조금 당황했다.
-완산공을 여기에 잡아 두는 게 내 역할이라고 했다.
왕선은 이를 빠뜩 갈았다.
“국장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잠시 돌아볼 생각이옵니다.”
“그런 건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태후 마마의 국장이옵니다. 신이 직접 챙기고 싶사옵니다. 부디 윤허해주시옵소서.”
왕우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궐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니니까.
왕선은 비웃었다.
“그러세요.”
예를 취하며 돌아서는 왕선의 눈빛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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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는 의관을 바로 잡았다.
참으로 황망한 소식을 접했다.
당장 입궐해야 했다.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밤바람의 그의 뺨을 스쳤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숙부님.”
“···방원이구나.”
“또 여기서 뵙습니다.”
선지교였다.
정몽주는 그때 당시 느꼈던 끈적거림이 다시 올라왔다.
“···참으로 괴이하구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태후 마마의 국장이다. 한시가 급하구나.”
“그래서 지금 말씀드려야 합니다.”
...참으로 방자하도다.
정몽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서 말하거라.”
“폐가입진에 동참해주십시오.”
“뭐?”
정몽주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이방원은 거침없이 모든 일을 말했다.
“허.”
“숙부님.”
“그만하라.”
“지금이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때를 놓치면 고려를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정몽주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방원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황상께서 신돈의 핏줄이다?”
“예.”
“선대 황제께서 이인임에게 유훈을 남겼다?”
“예.”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사실입니다.”
정몽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내리면서 말했다.
“어리석구나.”
“어리석다고 하셨습니까?”
“누구보다도 의심이 많으셨던 선대 황제이시다. 한데, 황실의 은밀한 일을 일개 신하에게 이르셨다고? 이를 믿는 네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그게 중요합니까?”
“뭐?”
“숙부님.”
“너와 말장난 할 시간이 없구나.”
“말장난이라니요. 서운합니다.”
군주를 내쳐야만 고려를 지킬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내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을 때 지켜야 할 건 용상의 주인이 아니라 용상을 내릴 수 있는 ‘국호’의 존재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처럼 고려의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때가 아니다.
단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신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고려의 국세는 팽창 중이다. 그 어디에도 군주를 폐위할 근거는 없었다.
“나 역시 완산공의 농단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폐위는 다른 문제. 신하 된 도리로서 군주를 폐위시킬 수는 없다.”
“숙부님은 허상에 갇히신 겁니다. 산림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대로는 왕선의 조정이 될 뿐입니다.”
“······.”
“그는 재상 총재제라는 기괴한 정치제도를 꿈꾸고 있습니다. 막아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정몽주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방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알고 계셨군요.”
“······.”
“근왕파이신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오해다.”
“왜요? 왕선이 다음에는 숙부님께 그 자리를 넘긴다고 하던가요?”
이방원은 이죽거렸다.
그리고 조롱했다.
“포은 숙부님의 진짜 모습이 이런 거였군요.”
“말을 삼가라.”
“그 말은 소생이 아니라 완산공에게 했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너는 그 유훈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습니까?”
“허. 참으로 무도하구나.”
헛웃음을 짓는 정몽주.
이방원은 을씨년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고 조카가 시 한 수 준비했습니다.”
“······.”
“고려 최고의 석학이라고 불리시는 숙부님 앞에서 재주를 좀 부려도 되겠습니까.”
정몽주가 답하기도 전에 이방원의 입을 제멋대로 열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참으로 스산했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그 스산함은 상여의 행렬과도 같았다.
“우리도 이처럼 얽혀 백 년같이 누리리라.”
이방원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숙부님의 답가.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치우거라.”
“뭐. 사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무례하구나.”
“해서, 일전에 하지 못한 일을 오늘 하려고 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그르르르르릉
땅바닥을 긁어대는 철퇴 소리가 들렸다.
정몽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처럼 중요한 대사를 앞두고 발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지요.”
“허. 참으로 가소로운 겁박이로다.”
“숙부님은 왕선이 죽인 겁니다.”
“뭐?”
“숙부님의 품속에는 폐가입진의 서찰이 있을 겁니다.”
“하.”
“만백성이 숙부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폐가입진을 외칠 겁니다.”
이방원은 이죽거렸다.
“포은 정몽주의 유훈을 지켜야 한다며.”
“네 이놈!”
“숙부님은 이 나라와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왕선이라는 괴물의 이름과 얽혀서 말입니다. 소생이 꼭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덧붙였다.
“조영무 대장. 보내드리게.”
“예.”
바로 그때 선지교를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강한 확신.
“백골이 진토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억겁의 신념.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바로 왕선이었다.
“답가일세.”
이방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왕선은 선지교에 올랐다.
이 사연 많은 다리를 쳐다봤다.
“참으로 기구한 역사로다.”
그리고 이방원을 한스럽게 쳐다봤다.
“너의 셋째를 보고 싶었는데.”
“감히!”
“그런데 이제 안 되겠다. 너는 이제 죽어야겠다.”
그 말과 함께 손을 내저었고
-쏴아아아아아앗!
위력적인 화살이 이방원의 목을 관통됐다.
그리고
-쏴아아아아아아앗
다시 날아온 화살이 조영무의 이마를 관통시켰다.
두 시체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선지교를 덮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왕선은 속삭이듯 말했다.
“선지교에 대나무가 자랄 일은 없겠군.”
< 154화 선지교에 흐르는 선혈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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