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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53화 (153/187)

< 153화 폐가입진(2) >

“지, 지금 그게 무슨 말이시오?”

정창군 왕요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폐, 폐가입진이라니요.”

염제신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께서 결심하셔야 합니다.”

“염 대감. 이 사람은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소.”

“대감이 아니면 이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듣지 못한 말로 하겠소이다. 물러가시오.”

정창군 왕요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염제신은 미동조차 없었다.

“완산공의 대동법은 대감께도 큰 타격이 있을 겁니다.”

정창군 왕요는 치부에 힘을 쓴 덕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의 집행은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을수록 손해가 됐다.

염제신은 이를 꼬집은 거다.

“불편하지요. 불편하고 말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참할 생각은 없소이다. 더는 말하기 싫소.”

“대감.”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당장 발고 할 것이외다.”

“대감.”

“썩 나가시오.”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정찬군 왕요.

염제신은 굳은 표정으로 쳐다만 볼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옆에서 듣던 하륜은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부족한 인사가 아닌가.

보면 볼수록 과거의 묻혀 사는 인사에 불과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정창군 왕요를 설득해야 할 중대사를 이렇게 망치고 있다.

만일 따라오지 않았으면 일이 시작도 하기 전에 틀어졌을 거다.

그리고 이곳으로 나설 때 혼자 가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염제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는 작자다.

하륜은 지금 나서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감.”

“물러가라고 했네.”

“소생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후회하실 겁니다.”

“허. 내가 지금 당장 나가서 완산공에게 이 모든 일을 발고 할 것이니라.”

“그렇게 하십시오.”

“뭐?”

“황제는 가짜인데, 진짜는 누구이겠습니까. 모진 고문을 감당하지 못한 소생은 토설하고 말 겁니다. 대감.”

정창군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발고 하신다고요? 결과는 이렇게 나올 겁니다. 정창군이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해서 역모를 포기했다고요.”

하륜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하여, 대감께서 거절하시더라도 소생은 일을 추진할 겁니다.”

“하륜!”

“일이 끝나면 대감은 용상에 오르시게 될 겁니다.”

“지, 지금 나를 겁박하는 건가?”

“대감께서 선택할 건 이겁니다. 처음을 함께 하여 권력을 가진 황제와 시류에 편승한 허수아비 황제.”

“하.”

하륜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쳤다.

염제신은 불안한 듯 하륜을 쳐다봤다.

이러다가 일이 틀어지면 큰일이 아닌가.

“소생이 부귀영화만을 바라고 이러는 거 같습니까?”

“뭐라?”

“고려의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나서는 겁니다.”

그 말과 함께 하륜은 서찰을 내밀었다.

“···뭔가.”

“선대황제께서 소생의 처 백부에게 남긴 유훈입니다.”

“뭐라?”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작금의 황제는 신돈의 핏줄이라고요.”

“!!!”

“이를 모르고 끝내 버티셨다면 종친으로서 할 일을 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도 외면하는 건 500년 고려의 종묘사직에 대죄를 짓는 겁니다.”

“···왜 이제 와서 이를 공론화하려는 건가.”

“아니지요. 이제라도 하는 거지요.”

“······.”

“대감. 고려 황실의 정통성을 올곧게 세울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나라의 용상은 영원히 신돈의 후손이 가지게 될 겁니다. 부디 결심하십시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극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알고 있는 사람은 소생과 염 대감 그리고 이성계 장군까지 3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대감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참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무척이나 곤란합니다.”

“하륜.”

하륜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고려의 황제가 되어주십시오. 대감.”

...어찌 이토록 무거운 짐이 내게로 왔는가.

정창군 왕요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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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왕부에서 서경의 이원계가 보낸 서찰을 꼼꼼하게 살피던 왕선은 왼손 엄지로 입가를 긁적였다.

“나세 장군.”

“예. 영공전하.”

“서경에 가야겠네.”

“예? 그곳에는 이원계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명나라가 도발을 시작했다는군.”

“음.”

나세는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명이 미치지 않은 이상 북원이 존재하는데 압록강을 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도발하는 건 우리의 준비 정도를 가늠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가보라는 걸세. 수백 단위의 병사가 출몰한다고 하니 직접 기병을 끌고 가게. 서경을 책임져야 할 이원계 장군의 짐을 덜어주자는 거지.”

“대응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다 죽이게.”

“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나세가 나간 뒤 왕선은 생각에 잠겼다.

“명나라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저돌적이군.”

닥치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살살 건드리면서 시비를 걸어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가 복잡했다.

서경에 1만 기병을 배치하여 기민하게 대처하도록 했지만 부족한 거 같다는 생각이 잔뜩 들었다.

그래서 후회했다.

“축맹한테 잘해줬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 속을 들여다보면서 명나라의 패를 확인할 수 있었을 건데.

자책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다. 대명 선전 포고라는 초유의 선언을 한 당시로는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북원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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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공전하.”

남은이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재상들은 뭐 하고 있나 해서.”

“음. 밀교원이 모두 요동으로 간 상황이라서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네. 단지, 평소와 비슷한지만 파악하면 되니까.”

“예.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염제신 대감이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응? 염제신?”

“예.”

왕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직 상소를 올렸지 않나?”

“금시초문입니다.”

“어?”

일전에 본 염제신은 제 뜻대로 안 되는 조정일에 분통을 터트리며 낙향을 결심했다. 대수롭지 않은 인사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뭘 하든 상관없으니까.

그런데 사직 상소도 안 올리고 입궐도 안 한다?

...어디 아픈가? 아니면 또 헛짓을 하나?

이럴 때 밀교원이 아쉬웠다.

관심법은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으니까.

“혹시 또 안 나타나는 재상은?”

“없습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됐네.”

“예?”

“조만간 사직 상소 올릴 걸세. 바로 처리해주게.”

“아.”

“아?”

“아, 알겠습니다.”

그때 다급한 내관의 목소리가 제왕부를 울렸다.

“여, 영공전하. 태후마마께서 위중하십니다.”

“뭐?”

화들짝 놀란 왕선의 눈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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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색이 완연한 명덕태후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완상공.”

“마마. 말씀을 아끼십시오.”

“아닐세. 자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네.”

“마마.”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명덕태후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떨면서 내밀었다.

왕선은 바로 손을 잡았다.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된 이 늙은이의 삶에서 자네를 만난 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모르겠네.”

“마마.”

“죽기 전에 이토록 건재한 고려 왕실을 볼 줄은 몰랐네.”

“이 모두가 마마께서 이루신 겁니다.”

“끌끌. 그렇지. 내가 자네에게 군호를 내리고 제왕에 임명했으니까.”

“예. 맞습니다. 하지만 마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힘을 내십시오. 이 나라 고려가 천하를 호령하는 대국이 되는 걸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아쉽네. 그러나 만족하네.”

명덕태후는 말라버린 입술을 들썩였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네를 돕고 싶네.”

“마마.”

“이 늙은이의 국장은 간소화하게.”

“말씀을 거두십시오.”

“완산공. 이제 받아들이게.”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다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인정해야 할 순간이다.

왕선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마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이 나라에 없던 가장 성대한 국장을 치를 것입니다.”

“온 나라가 힘을 모아서 천하 대국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네. 이 늙은이의 국장으로 국력을 소모할 수는 없네. 만일 자네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네.”

“···마마.”

“삼년상을 거두고 삼일장을 치르게.”

“마, 마마.”

“또한, 화장하여 남은 재의 절반은 만월대에 뿌리고, 나머지는 서경에 뿌려주겠나?”

“···마마.”

“살아서 지낸 개경과 천하 대국의 황도가 될 서경. 두 곳 모두를 내려다보고 싶은 작은 욕심일세. 이 늙은이의 마지막 욕심을 들어주겠나?”

왕선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마마.”

“자네가 있어서 참으로 고맙네.”

“마마.”

“자네가 적통이 아니었음이 참으로 아쉬웠네.”

“마마.”

“그러나 자네는 자네이기에 충분하네. 정말 고마웠네. 자네 덕분에 황혼이 행복했어.”

“소인 완산공 왕선. 마마가 아니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소인의 모든 건 오직 마마께서 하신 겁니다.”

명덕태후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대 고려국 만...세.”

한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시원섭섭함이 공존하는 참으로 미약한 목소리.

왕선은 명덕태후의 손을 잡은 채로 간절히 말했다.

“마마. 말씀을 아끼십시오.”

“······.”

“···마마?”

“······.”

왕선은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명덕태후의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

...오욕과 질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버텨온 철의 여인 명덕태후가 눈을 감았다.

자리에서 왕선은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

...편히 쉬소서.

극진한 예를 취하여 절했다.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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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급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곳은 이성계의 사가였다.

그러나 만나러 온 사람은 이성계가 아니다.

“숙부님.”

이방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너무 다급한 모습이다.

...무슨 일이 터진 거다.

설마 일이 탄로 난 것인가?

이방원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태후마마께서 승하하셨습니다.”

“!!!”

“완산공 왕선의 최대 정치적 후원자가 사라진 겁니다. 드디어 때가 됐습니다.”

이방원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이거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완산공의 군권을 무력화할 방법은 어찌 됐습니까? 방도를 찾았습니까?”

“소생 하륜입니다.”

“알아 듣게 말하세요.”

하륜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 고약하고 어린 주공에게 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완산공이 군권을 발동하면 끝입니다.”

“일단 나세가 개경을 벗어났습니다.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이방원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가득했다.

하륜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다른 일을 추진할 동안 소생이 마무리 짓겠습니다.”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

“좋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성공하면 일은 마무리되겠군요.”

“예. 포은 사형만 결합한다면 완산공의 완전한 몰락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소생이 만나보겠습니다.”

이방원은 손을 내저었다.

“포은 숙부님은 제가 만나지요.”

덧붙였다.

“조영무 대장과 함께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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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은밀한 곳에서 법전 편찬에 전념하던 윤소종의 눈은 절망으로 얼룩졌다.

“이, 이럴수가.”

편찬 작업을 하던 거처가 큰 화마에 잡아 먹힌 것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게 쳐다보던 윤소종이 급기야 달려가려고 하자 함께 일하던 신지식인들이 다급하게 잡았다.

“서, 선생. 편찬 작업은 다시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생께서 화를 입으시면 편찬 작업 자체가 와해됩니다.”

“화재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영공 전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결국, 윤소종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 153화 폐가입진(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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