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폐가입진(1) >
정도전은 싱글벙글하였다.
왕선은 한숨을 쉬면서 타박했다.
“군사. 웃음 좀 거두시오.”
“아. 송구합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
“···사찰을 밀어내느라 아비규환이외다. 국방성의 장관으로서 체통을 좀 지키시오.”
“아. 그래야지요. 그런데 싹 쓸어버리니까 참으로 장쾌하지 않습니까?”
그랬다.
아무리 유연해졌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근본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정도전은 여전히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전처럼 대놓고 불교를 배척하지 않을 뿐이다.
“이보시오.”
“아. 알고 있습니다. 대업을 완수하면 그들이 복귀한다는 걸요.”
“알면 자중하시오.”
“물론 그래야지요.”
그래도 찝찝했다.
왕선은 목소리를 깔면서 경고했다.
“분명히 말하리다. 황제국 고려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은 없소.”
“그런데 숭불(崇佛)은 하실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승려들이 그냥 복귀하는 게 아니라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복귀하는 거니까요.”
왕선은 손을 내저으면서 일축했다.
“숭불은 무슨. 법국의 지위를 내리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확연하게 다르오. 아. 혹시 숭유(崇儒)도 원하시오?”
“당연하지요.”
“그러면 사대부가 제대로 해야지. 적어도 승려들은 목숨을 걸고 요동성 코앞에 법국을 세웠소. 그래. 이참에 내가 분서갱유(焚書坑儒) 거하게 일으켜줄 테니까 사대부 싹 끌고 올라가서 유국(儒國) 하나 세우겠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국교와 법국은 다르다.
국교가 되면 나라 전체의 행사를 맡지만, 법국은 해괴한 형태의 제후국에 불과하니까.
이거 괜한 말 해서 급소를 찔렸다.
정도전은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어물쩍 말했다.
“소생은 숭유를 원하는 거지 유국(儒國)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사대부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시오. 숭유는 얼어 죽을. 계속 이런 식이면 분서갱유가 아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싹 쓸어주리다. 장쾌하게. 알겠소?”
“왜 이렇게 사대부를 싫어하십니까.”
“사대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고려가 달리는 걸 방해하는 세력을 싫어하는 거요.”
“음.”
“딱 깨 놓고 그들이 언제 내게 우호적인 적이 있었소?”
“없지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숭유는 잠시 접지요. 아. 그런데 승려들에게 국교를 내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국교에 버금가는 지위.”
“그게 그거죠.”
“다르오.”
...다르구나.
정도전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를 지켜보던 왕선은 쓸데없는 논쟁을 이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동법은?”
“지주들이 난리라고 하더군요.”
“버티는 지주는?”
“버틴다기보다는 속앓이를 하는 수준입니다.”
“그냥 덤비면 편할 건데.”
“싹 쓸어버리게요?”
“그 작자들을 언제까지 설득하오? 그냥 쓸어버리는 게 편하지.”
정도전은 싱긋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일이긴 했습니다.”
“거. 왜 말이 과거형이오?”
“고려 전역의 사찰을 불태우는 사상 초유의 종교탄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달을 눈으로 직접 목도 한 지주 중에서 누가 감히 버티겠습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는 거지요.”
그건 그랬다.
왕선이 진행한 개혁에는 유독 한 가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설득’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몇 번 조세 거둔 다음에 땅 소유를 포기하는 지주가 속출할 거요.”
“모두 사들이겠습니다.”
“그다음에 배분하라고 하시오.”
“아름답게 나누겠습니다.”
“군사 말고 수시중 시키시오.”
“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계구수전은 소생의 신념입니다. 필생의 신념이란 말입니다.”
“그건 아는데 수시중이 이쪽 일은 더 잘하는 거 같아서. 시원시원하고 과단성 있게 잘 진행하더이다. 우직하게.”
“허.”
“군사가 하면 또 함정 파고 정략 펼치면서 세상 시끄럽게 할 거 아니오?”
“그건 당연하지요. 정치에서 정략은 필수입니다.”
참으로 당당하지 않은가?
왕선은 실소를 머금었다.
“됐고. 일이나 하시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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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탄압은 작금의 고려에서 완산공 왕선이 가진 힘이 얼마나 거대한 건지 여실히 증명했다. 그래서일까? 거센 탄압이 진행되는 동안 조정은 참으로 편안했다.
“말세야. 말세.”
염제신은 한탄했다.
나주의 오랜 칩거를 깨고 조정에 복귀했건만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이 사람이 자네 처 백부였던 광평군과 충돌했지. 그래서 낙향했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하면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일에 해당하지.”
사실 뜻이 맞지 않음을 이유로 낙향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굳이 조정에 남아서 보기 싫은 꼴을 보지 않는 거다.
“적어도 광평군은 정치를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완산공은 그게 아닐세. 하늘 아래 저토록 괴팍한 인사가 어디 있나.”
“해서, 소생이 대감께서 칩거를 깨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하는 말일세. 내가 면목이 없어.”
“하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굳이 나와서 고군분투할 필요가 있겠나? 작금의 조정은 이 늙은이가 불편한 거 같으니 비켜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또 이런다.
몇 차례 충돌을 거치면서 알게 된 왕선의 힘.
그건 염제신의 의지를 상실케 했다.
그래서 다시 낙향을 언급한 것이다.
사실 염제신은 왕선과 별다른 은원이 없다.
굳이 무리할 생각이 없는 거다.
참으로 이기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적당하게 권세를 누릴 줄 알았다가 어려움에 봉착하자 바로 떠난다는 게 아닌가.
명분도 웃긴다. 완산공이 본인을 불편해한다는 거다.
그런데 작금의 조정은 염제신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아예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하륜은 속으로 비웃었다.
참으로 쓸모없는 인사가 아닌가.
그러나 염제신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게 자신의 역할이다.
“대감. 이대로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
하륜의 어조가 제법 의미심장하다.
염제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디 말해보게.”
“대감. 완산공이 지금처럼 국정을 농단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와 선문답이라도 하자는 건가?”
고압적인 태도.
하륜은 고소를 삼켰다.
그러나 지금 염제신과 감정 싸울 필요는 없다.
“황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수렴청정?”
“예.”
“완산공이 하는 짓은 단순한 수렴청정이 아닐세. 그의 압도적인 권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전주를 불태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는 건 뭔가 준비한 수가 있다는 거다.
금방이라도 낙향할 거처럼 말하던 염제신은 흥미를 보이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
“자세히 알고 싶군.”
“대감. 아무리 완산공의 권력이 강하더라도 국정으로 진두지휘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수렴청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황제의 친정이 시작된다면 그의 위상은 지금과는 사뭇 다를 겁니다.”
“곤두박질칠 가능성이 크지.”
“그렇습니다.”
염제신의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무슨 수로 강안전을 설득하나? 이미 수차례 시도된 방법이라고 알고 있네.”
“지금 황상께서는 친정에 나설 수 없지요.”
...의미심장한 말이다.
염제신은 곧장 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수렴청정을 꺼낼 수 없는 연륜을 가진 황제라면 어떨까요?”
“!!!”
“정창군이라면 적당할 거 같습니다만.”
염제신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지금 하륜은 역모를 꾀하고 있는 거다.
평생 고결한 학자로 자부해온 염제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거다.
“썩 나가게.”
“소생의 처 백부 어른과 척을 지게 된 결정적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뭐라?”
“강안전의 주인을 두고 이견이 있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 지난 일이야.”
“아니지요. 그건 현재 진행형이지요. 왜? 소생의 처 백부 어른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뭐라?”
하륜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감의 말씀이 옳았다고요.”
“!!!”
“단지, 본인의 권력을 지탱하고자 용상의 주인을 왕우(王禑)로 삼았다고 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황제(皇帝)의 휘(諱)를 입에 담는 하륜.
염제신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철렁였다.
“자네 미쳤나? 말조심하게.”
“그게 아니지요. 왜 대감의 말씀이 옳았는지를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하륜은 품에서 서찰을 꺼내서 내밀었다.
[신돈(辛旽)]
그리고
[신우(辛禑)]
염제신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 나라 고려의 용상은 위대한 태조 황제의 후손이자 고귀한 사해 용왕의 핏줄만이 차지할 수 있습니다.”
“······.”
“천박한 요승의 피를 이어받는 잡스러운 작자의 자리가 아니지요.”
“!!!”
“바로 잡을 겁니다. 반드시.”
하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염제신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잡았다.
“진정 광평군이 그리 말했나?”
“예. 진실입니다.”
“무슨 근거로?”
덜덜 떨리는 염제신의 목소리.
하륜은 속으로 웃으면서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궐의 은밀한 일입니다. 어찌 소생의 처 백부께서 모두 아시겠습니까. 선대황제께서 유훈을 남기시면서 소생의 처 백부에게 친히 이르신 내용입니다.”
“!!!”
“선대 황제의 친필. 소생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내용이기에 누구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지요. 원하시면 언제라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선대 황제를 가까이서 모신 대감입니다. 친필을 알아보지 못하실 리 없지요.”
“하면, 일전에 개경 십자로를 떠들썩하게 한 신우(辛禑) 사건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 정황을 살펴보건대 그건 완산공이 일으킨 짓이지요.”
“···완산공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하. 참으로 무도한 작자로다! 왕실의 종친이라는 인물이 제 권력을 위해서 이런 참담한 짓을 하다니!”
“사실 그렇습니다. 왕선이 왕족이 맞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언제부터 듣도 보도 못한 방계가 왕실의 종친이었습니까. 그가 군호를 받은 건 태후 마마의 정치적 선택에 불과했습니다.”
“······.”
“대감. 이 나라 고려는 가짜 왕씨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염제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륜은 그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비록 낙향해서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단 하루도 선대 황제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네. 내 평생 그토록 강건하셨던 분을 군주로 모셨다는 건 영원한 자부심이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대 황제의 유훈이라고 할지라도 이 나라 고려의 용상에 저런 천한 핏줄이 앉아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네. 바로 잡아야 해. 그게 진정으로 선대 황제께 충심을 보이는 길이야.”
격분하는 염제신.
“다시 여쭙겠습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내가 선두에 설 것이야.”
됐다.
하륜은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소생이 대계의 명칭도 적어 왔습니다.”
“무엇인가.”
다시 서찰을 내밀었다.
[폐가입진(廢假立眞)]
염제신은 흡족한 웃음을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황(假皇)을 몰아내고 진황(珍皇)을 세운다? 아주 합당하군.”
“하나 더 있지요.”
“뭔가?”
“가짜 왕씨가 한 명 더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건 차후의 일이지요.”
왕우를 내친다면 왕선도 흔들린다.
그때 다시 폐가입진을 꺼내서 왕선을 무너뜨리면 된다.
그 역시 왕씨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여 밀고 가면 되니까.
“과연 그렇군. 아주 훌륭하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 152화 폐가입진(1)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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