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법국(法國) >
짙은 어둠이 자욱하게 자리 잡은 밤이었다.
“영공전하.”
매서운 눈빛의 주인이 왕선을 불렀다.
“가지.”
“예.”
그는 나세였다.
왕선은 은밀하게 나세와 함께 이동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움직이는 게 합당했기에 수차례 좌우를 살폈다.
물론, 나세가 살폈다.
개경 성문을 통과했다. 그러고도 한참 이동했다.
저 멀리 나세의 수천 기병이 끌어낸 승려들을 내던진 곳이 보였다.
기병은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채로 승려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왕선은 우회하여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이동했다.
나세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이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수천의 기병이 주둔한 근처였기에 특정 의도를 가진 자는 쉽게 접근조차 하지 못할 거다.
왕선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오게.”
“어찌 영공전하께서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승려 한 명이 끌려왔다.
왕선은 히죽이면서 웃었다.
“훌륭하군.”
“과찬이십니다.”
“적당히 물리게.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왕선은 끌려온 승려를 쳐다봤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말해주지.”
“······.”
“이 나라 고려에 존재하는 모든 절을 탄압할 것이다.”
“!!!”
“승려들은 백주에 길거리를 활보할 수 없다. 평지에 있는 모든 절은 불태울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산속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야겠지. 그런데 들통나면 거기도 불태울 거다.”
“어,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그간 불교가 국교로서 누렸던 모든 지위를 박탈한다고 했지 않나? 그러니까 나는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는 거지. 국교가 아니었다면 가질 수 없었던 부와 지위를 회수하는 거? 뭐. 그 그렇게 이해하면 빠르겠군.”
스산한 왕선의 어조.
그 속에는 거짓이라는 단어가 감히 스며들 틈은 없었다.
승려는 덜덜 떨었다.
왕선의 말이 확고한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찰이 가진 힘을 절대 작은 게 아니었다.
“반발이 거셀 겁니다.”
“시간과 강도의 차이에 불과하지. 가만히 있으면 빠르게 사찰만 불타고 승려는 살겠지만, 버티면 사찰도 불타고 승려는 모두 죽는다. 시간은 좀 걸리겠군.”
왕선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까닥였다.
“재가화상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 나라의 10만 대군을 상대로 버틸 수는 없는 법. 심지어 너희는 한 곳에 뭉쳐 있는 것도 아닐 거니까.”
승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원전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 대가가 너무나도 혹독하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할 일은 이미 다 설명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을 설명해주지.”
“······.”
어리둥절한 승려의 표정.
왕선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나?”
“무, 무슨 말씀입니까.”
왕선은 천천히 다가갔다.
“왜 미륵사라는 거대한 사찰에서 나를 미륵 성하라고 부르는지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나?”
“무, 무슨···.”
“나는 미륵이 아니다. 그러나 미륵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 하여, 미륵 성하이니라.”
승려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미, 미륵사가 광인을 만들었구나.
왕선은 피식 웃었다.
“미륵사가 광인을 만든 게 아니라 하늘이 나를 내린 거지.”
“!!!”
“또 생각해봐. 모두 읽어줄 테니까.”
승려는 뒷걸음질 쳤다.
-사, 사술이다. 사술이다.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사술이 아니지. 이를 관심법이라고 하지.”
“!!!”
“지나간 세상에 미륵이 석가와 함께 도를 닦았는데 먼저 도를 이루는 자가 세상에 나가 교를 펴고 다스리기로 하였다. 한방에 같이 자면서 무릎 위에 먼저 모란꽃이 피는 자가 이긴다는 조건으로 내기를 걸었다. 그날 밤 석가가 거짓으로 잠든 체하고 미륵을 바라보니 무릎에서 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에 석가는 도둑의 마음이 일어나 그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았다. 미륵은 그것을 알고 석가에게 더럽다고 욕하면서 먼저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석가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둑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륵인 나의 시대이니라.”
“!!!”
“이따위 내용이 세간에 알려진 이유는 석가와 미륵이 진실로 싸웠기 때문이 아니다. 석가를 믿는 땡중들이 백성을 괴롭히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기대고 찾을 수 있는 건 미륵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는가? 광포한 미트라를 설복하여 도솔천으로 데려가서 미륵이라는 이름을 내린 게 석가인데 말이야.”
“!!!”
“알겠나? 석가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다. 석가와 미륵을 분열시킨 건 백성이 아니라 너희야.”
“!!!”
“나는 미륵 성하로서 이를 단죄할 뿐이다. 하여, 이 땅의 사찰을 탄압하는 것이야.”
마침내 승려는 무너졌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승려는 한참이나 멍하게 있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큰절을 올렸다.
“미륵 성하시여.”
“네가 할 일을 일러도 되겠나?”
“중생을 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족한 땡중들로 인해서 중생들이 부처님을 가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아직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군.”
“예?”
“너희는 그간의 죄로 인해서 이 땅에서 축출된다. 그리하여 중생에게 다가갈 기회조차 얻지 못할 거야.”
“!!!”
“하여, 네가 할 일을 준다는 것이다. 성공할 시 중생을 만날 기회를 주겠다는 거지.”
“이, 이르십시오.”
왕선은 자세를 낮춰서 승려와 시선을 마주했다.
“요동으로 가라.”
“요, 요동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나는 조만간 이 땅의 모든 사찰을 탄압할 것이다. 진나라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 더 악랄하게 탄압할 것이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이 땅의 승려들이 뜻을 모아서 압록강을 건너는 거지.”
분서갱유보다 더한 탄압.
얼마나 참혹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승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어찌하여 요동입니까.”
“가서 선탄을 만나라.”
“서, 선탄 대사가 요동에 있습니까.”
“그러니 만나라는 거지.”
이제야 승려는 왕선이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승려는 아직 알지 못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왕선의 입에서 나올 내용은
“그의 지원을 받아서 요동 인근에 터를 잡아라.”
“예?”
“그런 다음에 개국을 선언하라.”
“!!!”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걸.
“국호는 법(法), 법국이라고 하겠다.”
“!!!”
“그 나라는 왕이 없다. 백성도 없다. 오직 승려로만 이뤄졌다.”
“!!!”
“그러나 만백성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다려라.”
왕선의 눈빛이 강해졌다.
“미륵의 재림을.”
승려의 입은 쫙 벌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만일 모든 일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불교는 국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것이야. 하겠는가?”
승려는 눈만 껌뻑였다.
왕선은 나지막하게 한마디 더 했다.
“도끼 잘 쓰는 승려는 될 수 있으면 많이 데려가고.”
승려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도끼? 재가화상? 그렇다면···.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대답은?”
“···하겠습니다.”
“음. 아니야.”
“예?”
“이렇게 약조하지. 모든 일이 끝났을 때도 법국(法國)의 지위는 유지하게 해주겠다.”
승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 말씀은···.”
“불교는 국교 이상의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법국은 고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뤄질 거고. 승려들이 모여서 일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운다. 생각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바, 반드시 하겠습니다.”
그제야 왕선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자네의 법명은?”
“신조라고 합니다.”
“뭐?”
...이거 생각 이상으로 거물 승려였다.
신조는 선대황제의 측근 승려였다. 진주의 용암사, 강원도 원주의 각림사, 김포의 용화사 등에서 주지를 역임했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고승 중 한 명이었던 나옹 선사에게 이론적인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공부가 깊었다.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면서
-턱!
멱살을 잡았다.
“너 이성계의 측근이었지?”
“!!!”
“아놔. 죽고 싶어?”
“아, 아닙니다. 이성계 장군과 연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왕선이 지그시 쳐다봤다.
사실이었다. 최근 이성계와 따로 만난 적이 없다.
지금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제야 멱살을 풀면서 말했다.
“분명하게 말하지. 만일 중간에서 허튼짓하면 다 죽어. 알겠나?”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허튼짓하더라도 이성계 장군과는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답이군.”
“어차피 관심법을 사용하십니다. 속일 수도 없지요.”
“잘 아는군.”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곧장 요동으로 이동하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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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에게 적당한 시간을 준 뒤 왕선은 대대적인 선언을 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찰을 모조리 불태우라.]
대대적인 종교탄압을 시작했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 된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거센 탄압이었다.그것은 참으로 무자비했다.
종교탄압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사대부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분서갱유보다 더한 탄압]
왕선의 경고가 피부로 실감 났기 때문이었다.
이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틈에 대동법의 전국 집행은 거침없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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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성주는 헛웃음을 삼켰다.
“일만에 육박하는 승려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허. 대체 고려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그 많은 승려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거요?”
선탄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고려의 실력자 완산공 왕선이 대대적인 탄압을 했다고 합니다.”
“허.”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승려가 도망쳐올 겁니다. 성주님. 그들을 받아주십시오. 요동에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외다. 요동 총병관께 여쭤야 하오.”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선탄이 합장하며 물러났다.
요동 성주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해서, 고려 개경에 파견된 정보원의 소식을 기다렸다.
“사실입니다.”
“그런가?”
“예. 얼마 전에 완산공 왕선이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수위는?”
“모든 사찰을 불로 태웠다고 합니다.”
“허.”
“진 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우습게 여겨질 정도의 탄압이었습니다. 실로 엄청났습니다. 승려들은 이를 피하려고 압록강을 건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렇다면 허튼 생각을 가지고 압록강을 가진 건 아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까지 하면서 수작질을 하겠는가.
요동성주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음. 요동 총병관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반응이셨습니다.”
“알겠네.”
요동 성주는 곧장 선탄을 불렀다.
“좋소. 그들을 수용하겠소.”
“오오.”
선탄은 밝게 웃었다.
“그들의 재가화상은 큰 힘이 될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요동성 근처에 그처럼 많은 승려가 있다면 백성들을 다독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하하하. 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소.”
그 외에도 장점은 많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군현 크기의 적당한 거처를 내려주면 그들은 알아서 생존할 거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아. 법국의 개국을 성주님께서 후원해주시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법국?”
“예. 이번에 혹독하게 당해서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허. 아직 듣지 못하셨습니까?”
“···처음 듣는 말이외다.”
“음.”
“대사. 적당한 땅에서 살게 해줄 수는 있소. 그러나 개국은 다른 차원의 문제. 허락할 수 없소.”
선탄의 표정에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왜 그러시오?”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요동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북원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뭐, 뭐요?”
“성주님.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막으려면 요동의 대군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잊으셨습니까? 재가화상의 위력은 경천동지할 수준입니다.”
“음.”
“성주님. 말이 나라입니다. 그냥 군현에 불과합니다.”
선탄이 간곡하게 설득했다.
요동 성주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저들을 북원으로 보낸다?
저렇게 쓸모가 많은 승려들을?
그랬다가는 경을 칠 거다.
“음.”
“성주님.”
그래. 이곳은 변방이다.
선조치 후보고가 합당하다.
요동 총병관의 동의를 얻으면 된다.
황제가 화를 내면? 그때 거두면 된다. 크게 탈은 없을 거다.
어차피 제대로 된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요동 총병관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 같소.”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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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부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왕선에게 서찰이 한 장 전해졌다.
[법국(法國) 개국]
적이 주둔하고 있는 북방의 심장부 요동성 바로 앞에 아군을 매복시키는 작전이 성공한 거다. 이로써 요동성의 운명을 손바닥에 올리게 됐다.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 151화 법국(法國)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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