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요동에 뿌려지는 미륵의 씨앗 >
관리의 보고를 들은 요동 성주의 표정에는 흥미가 잔뜩 실렸다.
“통치가 우선이다?”
“예. 선탄이라는 승려가 설파하는 미륵의 그것은 백성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건 정치로서의 통치가 유일하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허. 보아하니 자네부터 설복된 거 같군.”
“예사로운 승려가 아닙니다.”
얼마 전 요동총병관 양문이 주도한 나하추 기습 타격은 고려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려의 대군이 압록강을 마음대로 오갈 때 제대로 된 대처조차 하지 못했다.
한때 북방의 최고 세력이었던 요동은 완벽하게 체면을 구긴 상태였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민심이 동요하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동요하는 민심의 수면에 내포한 것은 요동에 대한 불신과 불안함이었다.
이럴 때 선탄이라는 승려가 등장했다.
비록 지금 그를 따르는 백성의 규모가 크지는 않더라도 흘러가는 상황을 본다면 분명히 빠른 시일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통치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랬다. 이는 어쩌면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하늘이 내린 기회일지도 모른다.
“만나볼 필요가 있겠어.”
요동 성주의 긍정적인 답변.
관리는 곧장 선탄을 데려왔다.
“요동 성주께서 이 늙은 불제자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대사의 법력이 높다고 하여 고견을 듣고자 불렀소.”
“부족한 세 치 혀가 성주의 귀를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시종일관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선탄.
심지어 겸손하다.
요동 성주의 흥미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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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연신 실소를 터트렸다.
“숙부님?”
“···예.”
“염제신 대감에 대해서 너무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
“재상에 오른 직후에 한다는 행동이 완산공을 도발하는 거라니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주에 기거한 지 오래됐는지라 개경의 정치지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십자로에서 아름답게 죽어주지도 않고 조정에서는 개망신이나 당하더군요. 됐습니다.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염제신 대감에게 기대할 건 없습니다. 버리는 패로 사용하겠습니다.”
하륜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애초 염제신의 목숨값으로 왕선의 심복인 이옥을 쳐낼 계획이었다.
그 뒤 책임론을 제기하며 왕선을 흔들어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 죽었다.
그래서 다음 계획을 잡았다.
원로 정객이니만큼 판세를 잘 파악하여 왕선이 독주하고 있는 선인전에 균열을 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왕선과의 첫 대면에서 객기를 부리다가 처참하게 박살 났다.
사실상 그의 정치적 위상은 땅에 떨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되돌아보면 염제신은 혼자 한 게 없다.
왕선의 말마따나 나주에서 신선놀음하다가 이성계가 명분을 주니 올라왔고, 조정 복귀도 표류할 때 정몽주의 산림이 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방원이 분기를 터트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포은 사숙님은 계속 저러고 있을 거랍니까?”
“아무래도 당분간은 재야인사로 머물 생각인 거 같습니다.”
“하. 산림이라니요. 뭐.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나쁜 방법도 아니고요. 아니지. 재야의 사대부를 끌어모아서 여론을 형성하려는 방법은 참으로 참신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낸 포은 숙부님께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그러나 때가 아닙니다.”
“때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이방원의 목소리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예. 만일 내가 황제였다면 일거에 쓸어버렸을 겁니다.”
이보다 참담한 말이 또 있을까.
하륜의 눈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이방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십니까? 완산공이 언제까지 산림이라는 괴이한 집단을 그냥 둘 거라고 보십니까.”
“하면, 해산시킬 거라고 보십니까?”
“당연하지요. 완산공은 권력을 나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선인전 밖에서 제3의 권력을 가지려는 산림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방원의 말은 옳았다.
하륜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포은 숙부님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요?”
“같은 진영에 속하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판을 잘 짜면 협력할 수는 있습니다. 염제신 대감의 복귀처럼요.”
“실은 그래서 할 말이 있습니다.”
“이르시지요.”
“완산공 왕선의 방법을 취해보려고 합니다.”
이방원은 입꼬리를 움찔거리면서 묘한 웃음을 보였다.
“명나라 황제에게 우리 사대부의 목숨을 던졌지요. 우리도 그러면 됩니다.”
조금 전에 이방원이 했던 말.
염제신은 버리는 패가 될 것이다.
하륜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염제신 대감을 미끼로 사용하는 겁니까?”
“예. 어차피 버리는 패입니다. 아까울 건 없지요.”
“어찌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이방원은 섬뜩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왕선이 신돈을 잘 언급하더군요. 거기서 묘책을 떠올렸지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계획을 들은 하륜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따갑게 넘어갔다.
하륜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이 사람은 진짜다.
이방원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압도적인 공포심을 유발하게 했다.
“어떻습니까?”
“성공만 한다면 완산공은 끝입니다.”
“해보겠습니까?”
“소생이 잘 만져보겠습니다.”
“추가할 게 있다면 언제든 이르시오.”
“예. 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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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수의 백성이 운집하여 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열망이 가득했다.
지금 요동성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 열기의 중심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노승이 있었다.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그랬다.
선탄과 대화를 나눈 요동 성주는 크게 감탄하며 처벌하기는커녕 법회까지 열어준 것이다.
법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탄은 시종일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요동성 백성을 한 명씩 만났다. 그의 말을 따르는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니까 그런 거였다.
여태껏 자신들의 손을 잡았던 종교는 모두 탄압당했다. 그런데 선탄은 아니었다. 백성들이 볼 때 선탄은 요동성의 성주까지 설득해낸 고승 중의 고승이었다.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날이 갈수록 선탄의 위상은 올라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요동성이 철옹성처럼 굳건해야 하오. 천하가 어지러우니 병상들은 더 힘을 내서 훈련에 전념하고, 농민들은 부지런히 일하시오.”
요동 성주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절대로 빼먹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몇몇 사람이 조심스레 고민을 털어놨다.
“참으로 포악한 인사입니다.”
“요동성에 터를 잡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는데 그처럼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대에 악독한 부자가 있는데 부디 미륵의 가르침을 내려달라는 거였다.
선탄은 응당 그러겠노라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주는 이로써 과거의 죄를 씻어내게 되었소.”
“오.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름이 무엇이오?”
“천리라고 합니다.”
선탄의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참으로 좋은 이름이외다.”
“이 미천한 놈에게 미륵의 가르침을 일러주셨습니다.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소승은 대가를 바라지 않소.”
“어찌 고승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다만, 그간의 패악질을 반성하는 의미로 근처 사람들을 불러 잔치라도 할까 합니다.”
“허.”
“하지만 대사께서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잔치는 취소할 겁니다.”
선탄은 주변을 돌아봤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인제 보니 백 시주께서 중생들을 담보로 이 늙은 중을 겁박하는 거구려.”
“하하하. 눈치채셨습니까.”
그날 밤 천리의 집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으면서도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그토록 악독했던 천리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건 하늘이 내린 고승 선탄의 덕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선탄은 안채에서 천리와 따로 자리를 잡았다.
“나무아미타불. 참으로 자리를 잘 잡았네.”
“아이고. 대사.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껄껄. 다 들었네. 남상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고.”
“이런.”
천리는 멋쩍게 웃었다.
선탄은 차를 한잔 마시면서 말했다.
“다른 밀교원은 어쩌고 있나.”
“모두 각지로 흩어져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밀교는 모든 역량을 요동에 집중했다.
그중 지도부에 속하는 인물은 천리처럼 아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래야 그 외 인물들이 정보를 전달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천리의 거점은 요동에 설치된 밀교의 분원인 셈이었다.
그동안 천리는 어설프게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고통을 주는 처지였다.
왜? 그래야 극적인 효과가 늘어나니까.
“이 많은 재산을 다 내뱉으려니 아깝지 않나?”
“아이고. 대사. 이 재산이 어디 소인의 것입니까. 모두 주공의 것이지요.”
“그래. 그러면 계획대로 하겠네.”
“예. 대사.”
“그나저나 자네 명나라 말을 아주 잘 하는군.”
“아이고. 배운다고 식겁했습니다.”
동병상련을 느낀 두 사람은 옅게 웃었다.
“옴마니.”
“반메홈.”
다음날 미륵의 가르침에 감동한 천리가 모든 재산을 동원하여 백성 구휼에 힘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요동성주와 함께 하겠노라고 덧붙였다.
사방에서 ‘옴마니 반메홈’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패악질을 부리던 많은 무리를 선탄이 모두 설복해낸 거다.
물론 모두 밀교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밀교원이 아닌 원래 요동 부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북방의 심장부.
요동성의 내부에서 묘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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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부의 공기는 무거웠다.
무겁다? 단지 그 정도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말로 지금의 분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구도 한마디로 혹은 한 문맥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제왕부의 공기를 뒤튼 원인은 조금 전 밀교원이 보낸 서찰이었다.
“군선 8,900척이라.”
그러니까 얼마 전 명이 동원한 군선의 규모였다.
이 엄청난 수의 군선이 요동을 거쳐서 고려로 진격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한다.
물론, 고려군의 기민한 대처로 물러났다.
고려와 북원, 나하추의 군사 동맹이 확실한 상황에서 섣불리 고려를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다.
그러니까 요동군이 나하추를 공격할 때 고려가 침묵했다면 저 엄청난 규모의 군선이 고려의 바다로 진입했을 거라는 거다.
1척에 100명만 실어도 89만. 사실상 백만 대군이 아닌가.
물론, 8,900척이 과장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 비등하는 엄청난 규모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짐작할 수 있다.
만일 명이 미친 척하고 저 많은 배를 보내면?
아이고야.
왕선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물론 10만 대군을 운용할 수 있는 고려의 전력이 수성에 임하면서 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이 승리를 거뒀다고 하더라도 피해는 막심했다.
그랬다. 왕선이 원하는 승리는 청야 전술을 펼치면서 처절하게 이기는 게 아니었다.
요격으로 적군을 완파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왕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느새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주변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깨물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계획을 세웠다가 철회한 작전을 펼쳐보기로.
실패하면? 욕 들어 먹는 거고.
성공하면? 북방의 판도가 바뀌는 주춧돌이 될 거다.
“더 다채로운 작전을 펼쳐야겠소.”
“다채로운 작전이라고 하시면?”
“수시중 조준에게 전하시오. 당장 전제 개혁을 시작하라고.”
“예?”
“전제 개혁의 표적은 사원전이외다.”
정도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의구심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왕선은 불안함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거 참 희한하군요.”
“또 무슨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본인을 섬기는 집단의 재산을 몰수하다니. 참으로 딱합니다.”
...이제 제대로 미쳤구나. 광기가 골수까지 스며든 것이야.
왕선은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천목.”
“예. 형님.”
“왕따 잡게.”
“예?”
“어서!”
그새 정도전은 도망쳤다.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참교육을 해줘야 할 거 같다.
< 149화 요동에 뿌려지는 미륵의 씨앗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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