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48화 (148/187)

< 148화 북진하는 미륵 >

염제신과 노신들은 모두 재상에 복귀했다.

그야말로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얄궂은 운명의 만남이 이뤄졌다.

“하. 신돈의 당여 이춘부의 아들 이옥이로구나.”

“······.”

“네 아비는 요승 신돈에게 아첨하여 시중에 이르렀다.”

“그 입 닥치시오.”

“너는 누구에게 아첨했길래 여기까지 왔지?”

“이보시오!”

“지난날에는 권신 이인임에게 아첨했지 않은가?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군.”

이옥은 이를 악물면서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늘이 놀랄 무재를 가졌기에 합당한 위치에 있을 뿐. 아첨이라는 말은 이옥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

싸늘한 목소리.

왕선이었다.

염제신은 빙그레 웃었다.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위력은 사해를 덮으신 영공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살살 비꼬는 염제신.

“이옥을 수하로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옥은 사특한 신돈의 잔당입니다.”

“그래서?”

“내치시는 게 옳습니다.”

왕선은 코웃음을 쳤다.

염제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선대 황제께서 신돈을 내치셨을 때 모든 걸 증명하셨지요.”

“뭘 증명했지?”

또박또박 반말이다.

아무리 제왕(諸王)이라고 할지라도 이럴 수는 없다.

과거 선대 황제도 존중했던 자신이 아닌가.

염제신의 얼굴에는 불편함이 솟았다.

“이거 영공전하께서 재상의 예법을 모르시는군요.”

“재상의 예법은 모르고 창칼의 무서움은 알지.”

“······.”

“이옥은 황상께서 친히 임명한 고려의 재상이다. 당신이 왈가불가할 문제가 아니야.”

“선대 황제께서 남기신 지극한 어명이 하나 있지요.”

“궁금하군.”

“신돈은 요승이라는 겁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뻣뻣한 인사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아주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염제신은 왕선이 종횡무진 활약할 때 나주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그래서 이렇게 개기는 거다.

과거의 단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거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모르는 거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지. 신돈은 요승이지.”

“인정하시는군요. 그러니 신돈의 잔당을 내치시지요.”

“신돈이 왜 요승인지 지금부터 일러주지.”

“무슨 말씀입니까.”

왕선은 유려하게 소매를 내저었다.

“천지도 모르는 인사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감히 권문세가의 토지와 노비를 건드렸다. 고귀한 귀족의 나라에서 귀족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여, 요승이다.”

“허. 지금 신돈을 편드시는 겁니까? 선대 황제께서 내리셨던 어명입니다.”

“유학을 깨우쳤기에 하늘 아래 가장 청렴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사대부라 부른다. 그들은 올곧고 뛰어나다. 하여, 이들은 이 나라 고려의 문제를 항상 해결하고자 나섰으며, 권문세가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런데 감히 사대부의 청렴함을 문제 삼는 인사가 있다. 민심을 천심이라고 이르는 사대부를 상대로 민심이라는 이름으로 공격하지 않는가? 전민변정도감으로 말이야. 그랬어. 전민변정도감의 칼이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대부로 향한 거야. 참으로 미쳤도다. 하여, 신돈은 요승이다.”

...이건 조롱이었다.

염제신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영공 전하.”

왕선은 싸늘하게 노려봤다.

“묻지. 대체 누가 요승이지?”

“신돈은 무능했고 부패했습니다. 그런 인사를 편드는 건 참으로 고약한 일입니다.”

“우습군. 누가 신돈을 편들었지? 나는 전민변정도감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묻지. 전민변정도감의 대의가 틀렸나? 대답 똑바로 하라.”

“전민변정도감은 틀렸습니다.”

“하.”

왕선은 목을 뒤틀면서 노려봤다.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진정으로 틀린 걸 말해주지.”

어느새 좌중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실로 오랜만에 왕선에게 대적한 인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시절이 수상하다. 왕실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정치는 혼탁하다.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어. 그런데도 풍요로운 땅에 똬리를 틀고 신선놀음을 한 인사들의 작태야말로 틀려먹은 거지.”

“우리는 대의를 품고 나주에 있었습니다.”

“대의? 참으로 가소롭도다. 제 안위를 위하는 것도 대의라고 하던가?”

“때를 기다린 것이지요.”

“그래. 때를 기다렸겠지. 난세가 끝나기만을. 안 그런가?”

“아닙니다.”

“아니긴. 난세가 종식한 지금에서 가뜩이나 두꺼운 얼굴에 철판 깔고 개경에 나타났는데?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거지?”

정곡을 찔렀다.

염제신은 언제부터 말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충신은 난세에 나온다.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나라를 바로 잡고자. 한데, 난세에 제 보신만을 위한 너희가 그따위 말을 하나? 실로 가소롭도다.”

“우리는 절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점입가경이로다. 절개를 지킨다? 기가 막히는군. 너희가 신선놀음할 때 이 나라 고려의 군주께서 버젓이 존재하셨거늘 대체 무슨 절개를 지키겠다는 건가?”

말문이 막힌 염제신.

왕선은 비아냥거렸다.

“제 몸뚱어리를 지키고자 풍요로운 지역에서 호의호식하는 주제에 충심과 절개를 운운하다니. 진정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는구나. 똑바로 들어라. 가진 신념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면 간언하고 싸우는 게 충신이다. 목숨을 걸고. 은둔? 세상에 이보다 비겁한 게 어디 있는가? 간사한 세 치 혀로 ‘나는 은둔하여 절개를 보인다.’ 이리 지껄이는 것보다 편한 게 어디 있는가?”

염제신의 수염이 덜덜 떨렸다.

왕선이 내뱉는 말이 너무나도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그의 말이 가진 옳고 그름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평소 가졌던 생각을 완벽하게 짓밟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이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이성의 명령을 받은 그의 입이 서둘러서 움직였다.

“시절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염제신은 참담했다.

부랴부랴 꺼낸 말은 참으로 궁색하다.

...대체 왜 이따위 말이 나온 걸까.

“되먹지 않은 소리는 집어치워. 만일 역도가 이 나라를 탐하여 역성을 일으키면 어찌 될 거 같은가? 포은 정몽주 같은 인사는 절개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하여, 그는 주상의 곁을 지킨다. 서슬 퍼런 이인임을 마주하면서. 그런데 너희는? 내가 장담하지. 너희는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면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은둔할 것이다. 마치 충절의 화신인 양 세상에 파다하게 알리면서. 머슴을 데리고. 재물을 들고. 또, 너희 새끼에게는 이렇게 말할 거야. ‘부자의 길이 같을 수는 없다. 너희는 입신양명하라.’ 하. 참으로 같잖지 않은가?”

왕선은 격분한 듯 내뱉었다.

“당신은 신돈과 싸웠다. 아니. 전민변정도감과 싸웠다. 왜? 충심으로? 백성을 위해서? 아니다. 네가 가진 재물을 지키고자 싸운 것이다. 그런데 이인임이 나라를 거덜 내고 있으니 나주에 똬리를 틀었다. 왜? 이인임은 네 제물을 건드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고고하게 서책 따위나 읽으면서 마치 충절의 대명사처럼 자위하는 거지. 참으로 비루하도다.”

왕선은 왼손 검지로 염제신을 정확하게 지목했다.

“당신이야말로 바로 요승이다. 나주에 처박혔던 당신들 따위보다는 차라리 신돈이 백배는 나아!”

그리고

“신선놀음이나 한 당신 따위는 군웅할거를 종식하고자 목숨을 바쳐서 싸운 이옥의 발톱의 떼보다 못하다!”

강렬한 일갈.

염제신은 충격으로 몸을 휘청일 정도였다.

좌중은 묵직한 침묵이 내렸다.

지켜보던 이옥은 눈물을 훔쳤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고개를 돌렸다.

마천목이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이옥을 가렸다.

그 작은 친절이 이옥의 가슴을 울렸다.

“고맙네.”

“편히 눈물을 훔치십시오.”

“참으로 고맙네.”

“동지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도 고맙네.”

“장군도 형님을 닮아가시는군요.”

“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는 내 명예와 관련한 일이네. 사과하게. 어서.”

“이런.”

“비밀일세.”

“당연하지요. 동지잖습니까.”

“그렇지.”

어느새 두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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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은 분통을 터트렸다.

평생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수렴청정하는 제왕이라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다.

“그 강인하셨던 선대 황제께서도 내게 이러지는 못하셨거늘.”

“대감. 고정하시지요.”

“이 장군. 조정이 참으로 엉망이외다. 내 익히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근본도 없을지는 몰랐소.”

염제신의 성토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성계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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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농부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선탄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무지한 그가 딱 봐도 불법이 높은 고승이 분명했다.

...사실 처음에는 탁발승이라고 생각했다. 공양미를 내어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선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나는 시주들의 재산을 탐내는 땡중이 아니오.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딱 그걸로 결정됐다.

혼탁한 세상에 보기 드문 고승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시주의 집에 마군이가 끼었소.”

“마, 마군이라니요?”

선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예?”

“따라 하시구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옴마니 반메홈.”

“오, 옴마니 반메홈.”

“잘하셨소.”

“그, 그게 아니라 마군이가 무엇입니까.”

선탄은 한탄하듯 말했다.

“마군이는 악마의 군사요.”

“예?”

“마군이는 눈에 보이지는 않은 기어이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백해무익한 악마의 군사요.”

“우리 집에 우환이 끼었다는 말씀입니까?”

“마군이가 끼었소. 우환 따위는 비교할 수가 없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하, 하면 어찌합니까?”

“소승은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천하를 방랑하고 있소. 발길이 때마침 요동성에 닿게 되었는데 마군이를 만났으니 어찌 넘어가겠소이까.”

명농부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마군이라는 걸 내쫓기 위해서 법회를 열어야 합니까?”

법회를 열면 엄청난 재물이 필요하다.

탁발승이 아니라고 하더니 가산을 모조리 훔칠 생각으로 접근한 땡중이 분명하다.

그런데

“법회는 필요 없소.”

명농부는 버벅댔다.

자신이 불순한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은 거다.

딱 봐도 불법이 높아 보이는 고승에게 큰 결례를 범한 거다.

“소승이 부적을 한 장 써주리다.”

명농부의 눈이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부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를 이른다.

무릇, 그 종이는 참으로 영험하므로 보통 비싼 게 아니었다.

하여, 사람들은 부적이라고 쓰고 전 재산 탕진이라고 말했다.

이제 보니 교묘한 언변으로 부적 한 장 써주고 가산을 뺏어가려는 요승이 분명했다.

그런데

“대가는 없소.”

명농부는 죄책감에 탄식했다.

딱 봐도 불법이 높아 보이는 고승에게 또 결례를 범한 거다.

“아이고. 스님. 그 귀한 부적을 그냥 써주시다니요.”

“말씀드렸지 않소이까. 이 늙은 승려는 중생을 도탄에서 구하고자 천하를 방랑하는 것이외다. 그 지극한 일을 행하면서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땡중이고, 요승이오.”

“과연 고승이십니다.”

“만일 중생의 재산을 탐하는 승려가 있다면 당장 내치시오. 그들은 머리를 깎은 도적에 불과하오.”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해주시는 스님을 만나다니 이 무지한 놈이 참으로 운이 좋습니다.”

“아니외다.”

“예?”

“미륵불이외다.”

“아.”

명농부의 입에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새어 나오자 선탄은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모든 것은 미륵의 뜻대로.”

합장을 마친 선탄은 지필묵을 꺼냈다.

경건하게 먹을 갈았고 붓을 들었다.

그렇게 일필휘지로 글자를 적었다.

그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받으시오.”

명농부는 얼떨떨하게 부적을 받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부적의 문양이었기 때문이다.

“대사.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선탄은 자애롭게 웃었다.

“미륵의 글자이외다.”

“허.”

“시주가 진정으로 미륵불을 믿으면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 글자를 말입니까?”

“믿음을 보이시오. 그러면 읽을 수 있소.”

“저, 정말입니까?”

“진정한 믿음을 보인다면 며칠 만에 글자를 깨우칠 수 있소.”

“!!!”

“또, 만일 며칠 만에 글자를 깨우치면 진정한 믿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소.”

“어찌 그것이 가능합니까.”

“미륵의 권능이 담긴 글자이니 그러하오.”

“가, 가르침을 주십시오.”

“······.”

“대사.”

선탄은 합장하면서 말했다.

“미륵불께서는 가장 자비롭지만, 또 엄하오.”

“예?”

“권능을 탐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오.”

“대가요? 어떤 대가를 이르십니까?”

선탄은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명농부는 당황했다.

“미륵불께서 내리시는 벌이외다.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소, 송구합니다.”

“미륵불을 저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찾아오시구려. 없다면 부적을 집에 붙이기만 해도 좋소. 미륵불께서는 저버리는 신도를 벌하지만, 애초 믿지 않은 중생을 탓하지는 않는 자비를 가지셨으니까.”

선탄이 합장하며 물러나려고 할 때

“대사. 이놈의 집안은 대대로 미륵불을 모셨습니다.”

“허. 그러셨소? 과연 시주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소이다.”

“부끄럽습니다.”

“좋소. 그러나 한 가지 더 명심하시오.”

“이르십시오.”

“절대 누구에게도 가르쳐줘서는 아니 되오. 이를 타인에서 알려줄 권한은 미륵께서 선택하시는 거니까.”

“가족에게도요?”

“물론이외다. 지키지 못하면 이제라도 포기하시오. 미륵의 분노는 두려운 것이니까.”

“대사. 이놈의 집안은 대대로 미륵불을 모셨습니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반메홈.”

“이는 미륵을 섬기기 위한 통과의례. 일어나서 외치고, 밥 먹을 때 외치고, 잠들기 전 외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일러주겠소. 잘 들으시오.”

“예.”

선탄은 방긋 웃으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명농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부적의 글자가 읽힌 거다.

[미륵께서 보우하사]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럴 수가.”

그리고 눈동자도 떨렸다.

“미륵불께서 내게도 권능을 내리셨구나.”

하늘에 대고 외쳤다.

“옴마니 반메홈.”

부적에 대고 외쳤다.

“옴마니 반메홈.”

그렇게 명농부는 요동성에서 첫 번째로 미륵의 신도가 되었다.

그를 시작으로 선탄은 거침없이 요동성 백성들을 만났다.

가장 낮은 곳을 머물면서 백성들과 어울렸다.

“허. 대사께서 이르신 대로 했더니 정말로 글자가 읽힙니다.”

“감축드리오. 미륵의 권능이 시주에게도 내린 것이외다.”

“이 미천한 놈까지 챙겨주시다니.”

“신분의 귀천은 사람의 제도. 미륵께서는 무관하시오.”

“과연 그렇습니다.”

“이로써 시주는 마군이로부터 벗어났소.”

“옴마니 반메홈.”

“훌륭하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당신이 선탄이시오?”

병사를 이끌고 온 관리였다.

선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르지요.”

“뭐요?”

“소승을 잡아가려고 온 게 아닙니까?”

“음. 뭐. 그렇소만.”

“죄목은 혹세무민이고요.”

“···그렇게 잘 아는 승려가 왜 백성을 선동하오?”

“허. 선동이라니요. 단지 그들에게 불법을 설파했을 뿐입니다.”

“미륵의 권능이니 가르침이니 믿음이라는 말을 하는 백성이 백 명을 넘었소.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백성은 셀 수도 없고. 불법을 설파하고 싶다면 법회를 열면 될 것을 왜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민심을 어지럽게 하오?”

“음. 만일 그렇다면 요동성을 떠나야지요.”

“뭐, 뭐요?”

“소승은 미륵불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알리면 요동성이 더 굳건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선탄은 합장하면서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미륵불을 믿음으로써 백성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요. 그러나 백성의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승의 의도와는 달리 요동성의 통치에 방해가 되었다면 이 또한 죄를 범한 거지요. 소승이 무지하여 법도를 어겼습니다. 그러니 보내주시면 떠나고 아니라면 죗값을 달게 치르겠습니다.”

세상이 혼탁하면 항상 혹세무민하는 세력이 나타난다.

특히 종교집단의 기승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작금의 대명 황제도 그와 같은 무리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매번 가차 없이 색출했다.

그럴 때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민심을 호도하면서 저주를 퍼붓거나 일을 크게 만드는 거였다.

...그런데 선탄이라는 승려는 그게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완전히 궤를 벗어난 반응이다.

관리는 눈을 껌뻑이면서 헛기침을 했다.

“험험. 선탄 대사라고 하셨소?”

“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윗분의 명령이오. 내가 함부로 할 수는 없소.”

“따르지요.”

“그러나 대사를 벌하지 못하도록 간청드리겠소이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관청에서 벌할 때 난리를 쳐서 민심을 요동치게 하려는 수작질인가?

관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심을 흔들겠다?”

“윗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승을 잡아 오라고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겁니다. 통치의 일환이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런데 이 당연한 명령에 시주께서 소승을 위해서 간청한다면 통치의 질서가 왜곡되는 겁니다. 또한, 소승으로 인해서 시주께서 불이익을 당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그러지 마십시오.”

...고승이로다. 참된 고승이로다. 이 혼탁한 세상에 내려온 진정한 고승이로다.

관리는 감탄했다. 그리고 어찌 끌고 가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제 발로 걸어가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런데

“백성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요망한 중놈의 말에 현혹될 뻔했도다.

정신이 번쩍 뜨여진 관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민심이 동요할 거다? 그러니 오라를 받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오라를 사용하겠다고 한다면 백성에게 인사할 시간을 달라면서 이상한 말을 하려고?

“소승의 몸에 오라를 씌우시지요. 따르겠습니다.”

“응?”

“행여라도 소승을 배려해서 이대로 가게 한다면 통치가 위태로워집니다. 백성들은 통치를 따라야 하지요. 해서, 백성이 보고 있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고승이로다.

관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례를 용서하시구려.”

“결례가 아닙니다. 말씀을 거두시지요.”

진실한 고승이로다.

관리는 다시 감탄했다.

“편안하게 모시거라.”

“예.”

그렇게 선탄은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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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싱긋 웃었다.

“선탄 대사가 아주 완벽히 잘하고 있군.”

“그렇습니까?”

“보시겠소?”

정도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 보여주십시오.”

“···미쳤소?”

“멀쩡합니다.”

“······.”

선탄이 보낸 서찰을 읽은 정도전은 한탄했다.

“소생이 불교를 좋아하지 않지만 선탄 대사는 참으로 고승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타락하다니 두렵군요.”

“뭐요?”

“하늘도 감탄할 불법을 가진 고승이었거늘. 그를 이렇게 만드셨으니 역사의 기록에 반드시 남으실 겁니다.”

“미쳤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

“오. 선탄 대사여.”

정도전은 탄식하면서 물러났다.

왕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 148화 북진하는 미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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