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산림(山林) >
이옥의 손은 덜덜 떨렸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았다.
왕선의 엄명을 받았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잘난 낯짝을 보고 싶었다.
그 얼굴에 작은 죄의식이라도 있다면 선대의 악연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확실하게 느꼈다.
...저 가증스러운 인간의 얼굴에는 제 삶의 자부심만 가득했다.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왕선의 엄명은 이미 자리할 곳이 없었다.
이를 갈았다.
“아버님의 원수.”
그랬다.
지금 이옥은 은밀하게 개경 십자로에 금의환향하는 염제신과 그의 당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쏘아보고 있었다.
“오늘.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낼 것이다.”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졌다.
핏줄이 치솟을 정도로 오른손에 힘을 줬다.
서서히 활을 들었다.
바로 지금 쏴서 죽인다.
핏발선 눈으로 염제신의 걸음을 살폈다.
한걸음.
가려졌다.
두 걸음.
무고한 백성이 죽는다.
세 걸음.
다시 가려졌다.
인파가 너무 많다.
그래서 시선을 조금 틀었다.
염제신과 교차할 백성의 걸음까지 확인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그리고 네 명.
다섯 번째 사람이 지나칠 때 쏜다.
그렇게 염제신의 목을 관통시킬 것이다.
활을 들었다.
화살을 꽂았다.
조준했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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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십자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은 주변의 인파에 집중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안도했다. 아직 사달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급했다.
만일, 조금만 늦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 더 힘을 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이옥이 보였다.
활을 굳게 잡은 그의 오른손이 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거리가 좁혀졌다.
이옥의 손이 움직였다.
“!!!”
정도전은 몸을 던졌다.
-퍼억!
이옥은 갑자기 자신을 덮친 사람을 노려봤다.
...정도전이었다.
“군사?”
“이, 이옥 장군!”
정도전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다급하게 외쳤다.
“자중하시오!”
“······.”
“쏘려거든 나부터 쏘시오!”
정도전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된 상태였다.
얼마나 세차게 달려왔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문약한 인사가 죽을 힘을 다해서 온 거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이옥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그 말을 들은 정도전은 마침내 주저앉았다.
“어서 돌아갑시다. 이옥 장군. 주공께서 기다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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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뵙소. 이 장군.”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염 대감.”
이성계는 환하게 웃으면서 염제신을 반겼다.
그의 뒤로도 사람들이 있었다.
선대황제 시절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을 필두로 서견, 성여완, 원척석 등 당대 최고의 원로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저들이 모두 지지세력이 되는 거다.
이성계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대감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을 생각에 벌써 흥이 납니다.”
“하하하. 과찬이시오. 재야에 은둔한 세월이 길어서 제대로 도움이 될지나 모르겠소이다.”
“흐르는 세월 따위가 대감을 번뜩임을 어찌 막겠습니까.”
“이런. 늘어나는 주름살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하하하. 그런 걸 연륜이라고 하지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이방원과 하륜 역시 밝게 웃으면서 예를 취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남몰래 눈을 마주쳤다.
그때 두 사람의 표정은 참으로 싸늘했다.
...일이 틀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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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은 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포은 선생이 만류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이름이 나왔다.
모두 경직된 채로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이옥을 쳐다봤다.
자세하게 말하길 재촉하는 거였다.
“그것이···.”
*****
절체절명의 순간.
화살이 활에 꽂히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옥 장군.”
이옥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백의를 입은 정몽주였다.
“···포은 선생.”
“자중하시오.”
“상관하지 마시오.”
정몽주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 그 화살을 쏘는 순간 정국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외다.”
“······.”
“염제신 대감을 개경으로 부른 건 이옥 장군의 자충수를 노린 것이오. 어찌 이를 모르시오.”
묘했다.
그토록 격렬하게 대립했던 정몽주가 아닌가.
그런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호소력이 짙었다.
정몽주는 손을 내밀어서 이옥의 화살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렸다.
“이 사람이 이옥 장군의 은원을 모르는 건 아니외다. 하지만, 부친이신 이춘부 선생도 이런 건 원하지 않으실 거요.”
이옥의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강궁의 화살은 정몽주의 손으로 넘어갔다.
“잘하셨소.”
짤막하게 말한 정몽주는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
“그 직후 군사가 달려왔습니다.”
이옥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정도전에게로 쏠렸다.
“······.”
눈빛의 의미는 아주 간단했다.
“혼자 용 쓴다고 고생하셨소.”
개고생이 떠오른 정도전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왕선은 정몽주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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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맛이 괜찮습니다. 드시지요.”
정몽주는 나근나근한 어조로 차를 건넸다.
왕선은 김을 밀어내면서 마셨다.
“이옥 장군의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네. 우선 묻지. 어찌 알았나?”
“소생이 조정에 남았다면 그리했을 겁니다. 그래서 십자로로 나가봤습니다. 과연, 이옥 장군이 염제신 대감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더군요.”
상당히 도발적인 말이었으나 정몽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좋아. 그러면 다른 걸 묻지. 어째서 이옥을 말린 거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방향은 동의하지 않으나 오랜만에 조정이 안정을 찾았는데 또다시 협잡으로 어지러워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조정이 안정을 찾고 있다?”
“외부의 위협으로 내부의 단합을 도모하지 않았습니까.”
“북진하려고 내부의 단합을 도모한 거지.”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쨌거나 대명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닙니까. 내부에서 분란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지요.”
“다른 걸 묻지. 이번 일을 계획한 사람을 누구라고 보나?”
“이성계 장군은 아닙니다. 그는 이런 협잡을 펼칠 사람이 아닙니다.”
“하륜이겠군.”
“답하지 않겠습니다.”
“이방원일까?”
이방원. 그 석 자를 들은 정몽주는 아주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중요한 건 협잡을 막아야 한다는 거지요.”
“자네도 협잡을 제법 펼쳤는데?”
“해서, 요즘 공맹의 가르침을 다시 익히고 있습니다.”
왕선은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포은 정몽주답게 이 나라 고려를 책임질 것이다.
...이거 오랜만에 고결한 정몽주를 보는 거 같았다.
왕선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조정으로 복귀하게.”
“송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뭐?”
“거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왕선이 잠시 버벅댈 때 정몽주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생은 재야에서 싸울 겁니다.”
“허.”
“이름도 정했습니다. 산림(山林) 어떻습니까?”
...아. 산림이 몇백 년은 빨리 만들어지는구나.
역사는 더럽게도 반복되는구나.
아니구나. 더럽게 흐르는구나.
왕선은 멋쩍게 웃었다.
“이름이 참으로 고약하군.”
“소생은 딱 마음에 듭니다.”
“그걸로 재상 총재제를 막아보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네는 군왕 중심의 통치를 원하지 않나?”
“물론입니다. 그러나 재상 총재제와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또 다른 정쟁의 씨앗이니까요.”
“음.”
“이 나라 고려의 정도를 찾을 겁니다. 간쟁하고 상소하고 연좌하면서 말입니다.”
“허.”
“소생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간쟁할 겁니다. 소생의 손목을 꺾어도 상소문을 쓸 겁니다. 명나라로 가서 죽으라고 겁박해도 연좌할 겁니다. 이것이 소생의 길입니다. 이것이 소생이 추구하는 산림의 정치입니다. 목숨을 걸고 포은 정몽주답게 정치할 겁니다.”
계속 버벅대는 왕선.
산림(山林)이라는 위대한 이름은 그만큼의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영공 전하의 재상 총재제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당대로 끝날 겁니다. 왜? 이 나라의 지존이 군주인 이상 그건 자명한 일이지요. 철저하게 군왕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는 산림은 그것을 촉진할 거고요.”
“그건 아닐 걸세.”
“영공 전하가 영원히 살지는 못하니까요.”
“허. 자네보다 내가 더 오래 살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건 그겁니다. 영공 전하의 재상 총재제는 이어질 수 없는 허구의 가치이지요. 하여, 영공 전하가 없으면 사라지고 말 겁니다. 그러나 산림이 따를 공맹의 가르침은 천년을 가겠지요. 해서, 이 하찮은 육신이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아닌데. 법전 만들고 있는데.
왕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서.
또, 절대 권력을 가진 왕족이 용상을 탐하지 않는 위대한 선례는 법전의 위대한 가치를 백배로 올릴 거니까.
그건 역사가 증명할 거다.
그런데 정몽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영공 전하. 이 포은 정몽주의 목숨을 건 정치를 즐겁게 보시길 바랍니다. 정파를 초월하여 떠들어 대겠습니다.”
이건 뭐 치고 들어갈 틈이 없다.
흑화하여 정략과 협잡을 꾸미는 게 아니라 우직하게 정도만 부르짖는 고결함.
이것이야말로 정도전이 말한 포은 정몽주의 위력일 것이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겠네. 열심히 해보게.”
덧붙였다.
“단, 조금이라도 협잡을 펼친다면 모조리 죽을 것이네.”
“단지 세 치 혀로 떠들 겁니다. 그건 강할 겁니다. 정도이니까요.”
“아. 잊지 말게. 자네를 따르는 사대부는 관직에 진출할 수 없어. 그러기로 했으니까.”
“괜찮습니다. 산림(山林)은 관직에 나가지 않으니까요.”
오늘 왠지 진 거 같다.
왕선은 이미 식은 차를 한 번에 다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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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염제신의 조정 복귀를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성계가 발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몽주와 사대부도 상소에 동참했다.
학식과 경륜을 갖춘 염제신 등의 노신이 조정에 결합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정몽주와 이성계가 결탁한 거 아니었다.
단지, 정몽주가 산림(山林)의 시작을 염제신 복귀로 잡은 거였다.
“굳이 승낙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정도전.
그런데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내부에서 총질하게 둘 수는 없소.”
“총질?”
“도솔천.”
“그건 압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는 거죠. 맥락상 등에 칼을 꽂는다는 거 같은데.”
“틀렸소.”
“그러면 무엇입니까.”
“등에 화살을 꽂는 거요.”
“그게 그거죠.”
“허. 칼과 화살이 같소?”
“······.”
“어찌하여 대답이 없소? 보병과 궁병이 같냐고 물었소이다.”
“···다르지요.”
“그러니까.”
“이러실 겁니까?”
“과찬이외다.”
“뭐하자는 겁니까.”
“몰이 사냥하자는 거요.”
왕선은 느긋하게 말했다.
“미끼를 던져야 들어올 거니까. 덫이 있는지 모르는 짐승들은 미친 듯이 몰려들 거요.”
“그때 화살을 쏘면 잡기가 수월하겠군요.”
“뭐하러? 그냥 산을 태워버릴 생각이외다. 하나씩 잡는 것도 귀찮소.”
정도전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 산에 백로도 있답니까?”
“있으면?”
“주공.”
“정몽주도 분탕질하면 죽일 거요. 더는 할 말이 없소.”
< 147화 산림(山林)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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