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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46화 (146/187)

< 146화 악연과 인연 >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성계가 복귀해서?

아니었다. 작금의 조정은 이성계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철의 성벽이 공고하게 구축된 조정이었으니까.

지금 이러는 이유는 왕선의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심각한지 정도전조차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음.”

왕선의 침음성.

긴장감은 고조됐다.

“왕따 군사.”

“예, 예?”

“왕따로서의 식견을 말해보시오.”

묘하게 기분이 나쁜 어감이다.

그러나 지금 따지고 들 수는 없다.

하여, 적당하게 맞장구쳤다.

“음. 이르십시오. 왕(王)따의 진면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염제신은 어느 정도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한 날이 선 목소리.

이옥이었다.

“주공. 지금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염제신과 이옥.

두 사람은 참으로 지독한 악연이었다..

염제신은 신돈과 맞선 사람이었고, 이옥의 부친 이춘부는 신돈의 당여였다.

신돈이 몰락하자 염제신은 왕의 장인이 됐고, 이춘부는 처형됐다.

그리고 이옥은 노비가 됐다.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스친 이옥은 핏발선 눈을 한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주공. 소장을 처음 거두실 때 염제신의 목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드디어 때가 된 것입니까?”

“문하시중을 지낸 인사이지요. 사사롭게는 선대 황제의 장인이기도 하고요. 재야로 내려갔으나 거물입니다.”

정도전이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옥의 고개가 대번에 돌아갔다.

“군사.”

“이옥 장군. 자중하시오.”

“군사!”

“따지고 들어가면 이 사람 그대와 악연이 깊소. 신돈은 나의 스승이자 좌주였던 유숙 선생을 죽였소.”

“군사!”

“이성계가 염제신을 개경으로 불러올 생각이더군.”

나지막한 왕선의 목소리.

“염제신을 따라서 나주에 똬리 튼 작자들까지 모두 함께.”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북원과 반 대명 군사 동맹을 체결했네. 그 이상 중요한 건 내부의 단합. 나는 조정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런데 이성계가 염제신을 불렀지.”

“주공.”

“이옥 장군과 염제신의 악연을 알기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왕선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이성계는 이를 노린 거니까.”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이 도출됐다.

그 즉시 정도전과 이옥의 다툼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조금 전 보였던 왕선의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으로 고약한 작자들이 아닌가.”

“멈추면 끝이지요. 해서, 끝없이 꿈틀대는 겁니다. 소생이 볼 때 필시 하륜의 생각일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 와중에 이옥은 입술을 깨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선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옥 장군.”

“괜찮습니다. 소장의 사사로운 은원으로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요.”

“아닐세. 나는 약조를 지킬 것이네.”

“···주공.”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닐세.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모양새는 갖춰야 한다.

지금 염제신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옥은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모두 제왕부를 떠났는데 정도전만은 삐쭉거리면서 남았다.

“왜 그러오?”

“어찌 이 사실을 아셨습니까. 밀교원은 모두 요동으로 떠난 상태인데.”

“아. 궁금하오?”

“예.”

“미륵의 권능이라오.”

“오. 그렇습니까? 그거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요?”

“별거 아니외다.”

정도전은 코를 긁적이면서 물었다.

“염제신을 어찌하시려고요.”

“어찌하는 건 아니외다. 어찌하는지 보려는 거지.”

“음. 재상직을 노릴 겁니다.”

“안주면 그만이오.”

“이성계도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주면 되오. 대세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정도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생이 왜 이러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옥 장군이 허튼 행동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집니다. 아무리 주공께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더라도 전대 황제의 장인이었던 사람을 막 죽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두 사람이 걱정하는 건 이옥의 행동. 딱 그거였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화살로 염제신을 찍어 버릴까 봐.

왕선도 그걸 알기에 고민이 깊어진 거다.

“하지만 주공의 명을 어기지는 않을 겁니다. 불같은 성정을 가졌으나 충성심만큼은 사해를 덮을 인사이니까요.”

“만에 하나 염제신이 도발하면?”

정도전은 헛웃음을 지었다.

“끔찍하군요.”

“군사. 이옥 장군을 잘 살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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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님.”

하륜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후 예를 취했다.

“주공.”

“염제신 대감은 언제 오지요?”

“조만간 당도할 겁니다.”

“계획대로 되어야 할 건데 말입니다.”

“이옥은 겉으로 보면 냉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은 활활 끌어 오르는 인물이지요. 악연이 깊은 염제신 대감을 보면 이성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본래 이옥은 이인임의 사람이었다. 해서, 하륜은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방원은 흡족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스산한 미소가 입가를 가득 채웠다.

“선대 황제의 장인이었고 문하시중까지 역임한 사람을 사사롭게 죽인다면 이옥은 끝이지요. 아무리 완산공의 천하라고 할지라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주공의 말씀대로입니다. 해서, 염제신 대감이 개경에 오는 걸 철저하게 비밀로 한 겁니다. 이옥이 십자로에서 보고 머리가 뒤집혀야 하니까요. 그의 강궁이 염제신 대감의 머리통을 박살 낼 겁니다.”

“만에 하나 이옥이 참아내면 어쩔 생각입니까.”

“염제신 대감에게 서찰을 보냈지요. 이옥에 대해서. 그랬더니 아주 격분하는 답변이 왔습니다.”

“이옥이 참아도 염제신 대감이 대갈성을 날리겠군요.”

“예. 그는 아주 꼿꼿한 인사입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바람직하군요. 아. 당연히 아버님께는 비밀로 했겠지요?”

“물론입니다. 장군께서는 염제신 대감이 재상직에 올라서 함께 힘을 합치는 계획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자고로 이런 일은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하지요.”

“아주 훌륭하십니다.”

이방원의 스산한 미소는 더 진해졌다.

하륜은 담담하게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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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심드렁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음. 예상치 못한 방문이군.”

“영공전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지금 제왕부를 찾은 사람들은 박위와 정지였다.

두 사람은 왕선의 홀대에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으면 좀 어색하지 않나?”

“영공전하.”

“음. 이 사람은 아주 어색하네만.”

두 사람은 왕선과 분명하게 선을 그었던 적대세력이었다.

그러니까 칭제건원 이전 강안전이 친정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 바로 이 두 사람을 접선했다. 그리고 도당에서 강안전의 친정을 주장하며 왕선을 압박했다.

물론, 봉쇄령으로 박살을 냈지만.

“더 할 말 없으면 물러가 주겠나? 보다시피 무척이나 바빠서.”

“영공전하.”

박위는 고개를 숙였다.

“그간의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결례?”

“앞으로는 영공전하를 적대하지 않겠습니다.”

정지도 고개를 숙였다.

“고려의 장수로서 살아가겠습니다.”

“이유는?”

“대마도를 도륙하고, 요동을 타격할 때 피가 끓었습니다.”

“예. 전장이야말로 소장들이 있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군웅할거시절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전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슴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을 지그시 쳐다본 왕선은 싱긋 웃었다.

“허락하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공전하.”

“그래서 하는 말일세.”

“예?”

의아한 표정의 두 사람.

왕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지 장군. 자네를 파직하겠네.”

“!!!”

“박위 장군은 남게.”

“여, 영공전하.”

정지는 다급하게 외쳤다.

왕선은 손을 내들면서 막았다.

“낙향하게.”

“영공전하.”

“아니군. 낙향은 아니지.”

“귀양을 보내시는 겁니까.”

“비슷하네. 전주로 가게.”

“에?”

“가서 전 선생을 만나게. 할 일을 줄 걸세.”

...전 선생? 전녹생 선생? 갑자기?

눈을 껌뻑이는 정지.

“그렇지 않아도 적임자를 고민했는데 자네라면 아주 훌륭하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전주에서 뭔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일을 맡기려고 한다는 것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파직 말고 사직상소로 해주십시오.”

“그 정도 명예는 지켜줘야지. 그러겠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데 정지가 우물쭈물한다.

왕선은 옅게 웃었다.

“약조하지. 이번 일이 끝나면 조정으로 복귀할 것이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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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궐하던 왕선은 오랜만에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났다.

“영공전하.”

가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돌아보기도 싫었다.

“아직도 개경에 있었나?”

하륜이었다.

그는 가마를 졸졸 따라오면서 말을 이었다.

“소생은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거. 몇 번을 깨져야 정신 차릴 생각인가. 그냥 낙향해서 편안하게 살지 그러나?”

“바위를 깨는 일입니다. 소생의 몸을 다치는 건 각오해야지요.”

“그건 자네 신조가 아니지.”

“노년에 편하게 살려면 지금 부지런히 움직여야지요.”

“그러다가 노년을 보지도 못할 건데?”

“뭐. 그래도 이번에는 작은 성과가 있었지요.”

계속 따라오는 하륜.

왕선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슬쩍 움직였는데

“소생은 더 큰 성과에 목마릅니다. 기대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날 때 눈이 마주쳤고, 하륜은 묘하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을 때 왕선은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 가마를 돌려. 아니지. 이옥! 이옥을 찾아! 지금 당장!”

평소와는 다른 아주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전 읽었던 하륜의 속내가 머릿속을 스쳤다.

[오늘 염제신 대감이 개경이 온다. 이옥은 끝이다.]

[이옥이 버티더라도 염제신 대감이 도발할 거니까.]

...이렇게 이옥을 잃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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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탄은 연신 땀을 닦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그러나 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두가 불국정토를 위한 미륵 성하의 위대한 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고. 스님께서 홀로 다니시는군요. 보살행이라도 하십니까?”

지나가던 행인이 말을 걸었다.

선탄은 자애롭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이 같으면 말벗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적적했는데 참으로 반가운 말이오.”

“한데, 이곳 분은 아닌 거 같은데 말투가 참으로 유창하십니다.”

“하늘 아래 모든 중생을 만나고자 익혔다오.”

“오. 훌륭하십니다. 참 스님이시군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아이고. 스님. 저는 이제 다 왔습니다.”

“아. 참으로 인연이 깊소.”

“하하하. 스님들이 늘 그러지 않습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과연 그렇소. 하지만, 소승의 말은 그 뜻이 아니라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 멀리 웅장한 모습을 한 성벽을 쳐다봤다.

“소승의 목적지도 요동성이라오.”

드디어 목표한 곳에 당도했다.

그랬다. 이곳은 요동(遼東)이었다.

선탄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요동성에 미륵불의 가르침을 설파하고자 함이오.”

그리고 합장했다.

“옴마니 반메홈.”

“······.”

“따라 하시구려.”

“예?”

“옴마니 반메홈.”

“오, 옴마니 반메홈.”

“합장하고.”

“소, 송구합니다.”

“자. 그러면 다시.”

“오, 옴마니 반메홈.”

“옴마니.”

“바, 반메홈.”

“훌륭하시오. 그대도 이제 미륵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외다.”

“그, 그렇습니까?”

선탄은 보살의 미소를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146화 악연과 인연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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