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찔러보기 >
왕선은 헛웃음을 삼켰다.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뭐?”
“이성계 장군이 다시 상소를 올렸습니다.”
“왜?”
남은은 상소문을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나세 장군의 수군을 이용한 타격은 큰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왕선은 상소문을 펼쳤다.
장황한 내용이 적혀있다.
“음.”
“어떠십니까.”
“한 마디로 기병을 보내야 한다? 그 말인데?”
“예.”
“압록을 넘어서?”
“예.”
“광활한 요동 땅을 달리자?”
“예? 예.”
“본인이 간다?”
...읽어본 거 아닌가?
남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했다.
“자신 있다고 적혀있더군요.”
“자네 생각은?”
“음.”
남은이 군무의 역량이 뛰어나긴 하지만 대 군략가는 아니었다.
이럴 때 쓰라고 이옥이 있는 거다. 냉큼 불렀다.
이옥은 진중한 표정으로 상소문을 읽었다.
한참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과연 이성계 장군이군요.”
“그런가?”
“예. 수군의 공격은 요동을 놀라게 하겠지만, 기병의 공격은 명을 놀라게 할 겁니다.”
“결론은 이성계의 주장이 옳다는 거군.”
“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좋아.”
왕선은 곧장 말을 이었다.
“대사헌. 동원 가능한 기병의 규모는?”
“본래 나세 장군이 이끌던 2천 기병에 가별초가 더해지면 족히 1만은 됩니다.”
“기병이 그렇게 많은가?”
“나라 전체를 털어서 1만이면 많다고 하기도 어렵지요. 실제로는 더 있습니다.”
“그건 그렇군. 더 육성할 방법을 찾아보게.”
“예?”
...더 있다고 했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이게 말로만 듣던 도솔천의 그것일까?
요즘 남은은 왕선의 화법이 너무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 그건 군사의 임무군. 내가 전하지.”
“예.”
그러고 보니 말이 샜다.
남은은 다시 바로 잡았다.
“총사령은 이성계 장군입니까?”
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도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계 장군을 보내지.”
...고개는 왜 끄덕였을까.
새삼 팽팽한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군사 정도전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남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목표지점은 요동이 아니라 나하추의 거점 금산(金山)일세. 완벽한 원군의 형태를 취하는 거로 하겠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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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계의 원정 소식은 개경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고려와 명은 강경 발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말로 주고받은 것에 불과했다.
즉, 팽팽한 신경전을 펼친 거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신경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원계가 1만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됐다.
...이건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운을 고조시켰다.
선인전은 불편한 공기가 가득했다.
왕선은 재상들을 지그시 쳐다봤다. 한명 한명 살폈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다. 긴장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랬다. 불편한 공기의 실체도 두려움이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해서, 왕선은 이 두려움을 걷어주기로 했다.
본판 벌어지기 전에 저들의 사고를 고쳐줘야 하니까.
“우인열 장군.”
“예, 예.”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서경을 방비하게.”
“예?”
놀란 우인열.
그러나 왕선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양백연 장군은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위화도에 주둔하여 이원계 장군의 보급을 담당하게.”
전격적인 명령은 지속했다.
“배극렴 장군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위화도와 서경 사이에 주둔하여 철저한 경계태세를 갖추게.”
2만의 병력을 추가로 북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국경을 넘지는 않았으나 언제라도 넘을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추게 한 것이다.
또한, 만에 하나라도 명군이 압록강을 넘어서 기습할 것을 완벽하게 방비하고 함이었다.
호명된 장수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왕선은 호통치듯 말했다.
“이조차 해내지 못하는데 명의 백만대군과 어찌 싸우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됐네. 두려우면 빠지게. 이 나라 고려는 적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장수는 필요 없으니까.”
“두려운 게 아니라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장수로서 어찌 물러서겠습니까.”
“출병하게.”
“예.”
1만의 수군에서 1만의 기병이 추가됐고, 다시 2만의 병력이 더해졌다.
명의 단순 위협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4만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점차 판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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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전을 파하고 제왕부로 돌아온 왕선은 남은을 불렀다.
“대사헌.”
“예.”
“지금 당장 북원에 사신을 보내게.”
“소생이 가겠습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자네는 개경에 남아서 할 일이 많네. 어차피 이번 대응으로 북원 외교는 잘 진행될 걸세. 그러니 다른 사람 보내게.”
개경에서 외교업무와 밀교원의 작전을 통제해야 할 남은이 자리를 비우면 공백은 크다. 물론, 초기 동맹 설정이었다면 남은을 보내는 게 옳다.
하지만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이번 군사작전으로 분명한 혈맹으로 거듭나게 될 거다. 그러니 다른 인사를 보내도 충분했다.
“아. 알겠습니다. 하면, 어떤 내용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본국과 북원의 명운이 나하추의 생사에 달렸으니 잘 챙기자고.”
덧붙였다.
“나하추가 무너지면 북원도 무너진다는 걸 제대로 각인시키게.”
“알겠습니다.”
그때 제왕부에 누군가가 찾아 왔다.
그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했다.
“영공 전하.”
왕선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생각하지 못한 인사가 찾아 왔구려?”
변안열이었다.
원 역사에서 그는 고려의 위기 상황에서 ‘불굴가’를 남기며 충절을 보였다.
그러니까 혼돈의 시절, 고려 왕조의 충신이었던 사람이다.
“어째서 소장에게는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이번 작전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소장을 믿지 못하십니까.”
“잘 아는군.”
변안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최영과 이성계 다음은 바로 자신이라고 평생 자부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영공 전하.”
“아. 변 장군의 역량을 의심하는 건 아닐세. 다만, 원래 최영 대감의 당여였으니 어찌 믿겠나.”
...이거였구나.
변안열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원계 장군도 최영 대감의 당여였고, 조준도 이성계 장군의 당여였습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걸세.”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장은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최영 대감을 따를 겁니다.”
“안 물어봤네.”
“그리한 이유는 최영 대감만이 고려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안 궁금하네.”
“하지만 최영 대감은 낙향했습니다. 더는 고려 조정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불리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 어쨌거나 소장은 고려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겁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런가?”
변안열의 속은 들여다봤다.
진심이다.
그런데도 이리한 이유는 제 입으로 말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명의 백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도 격퇴하겠습니다.”
“그거 생각보다 두려울 건데?”
“두렵지요. 그러나 백만 대군이 이 땅의 백성을 유린하는 건 더 두렵습니다. 해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좋네.”
“하면···.”
“국방성으로 가보게. 장관이 기다릴 걸세.”
변안열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곧장 발길을 옮겼다. 제왕부를 막 나서려고 할 때 왕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쩌면 압록을 넘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게.”
변안열의 입가에는 필승의 의지가 실렸다.
그의 등을 지켜보던 왕선은 피식 웃었다.
“고려가 아직 안 죽었군.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오직 고려만을 바라보는 바보들이 많다니.”
그랬다.
500년의 역사는 그냥 이뤄진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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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적인 북상.
나세, 이원계, 변안열, 우인열, 양백연, 배극렴.
당대 최고의 무장들이 총망라됐다.
낙향한 최영을 제외한다면 딱 한 사람만 빠졌다.
바로 이성계.
“이거 꼴이 우습게 됐군.”
이성계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하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어차피 장군께서는 조정의 재상이 아닙니다.”
“해서?”
“전장에 출정하지 않아도 흠이 되는 게 아니지요.”
“나는 자네가 말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하륜은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다만.”
“다만?”
“이번 작전이 장군의 안건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게 핵심입니다.”
“음. 그 말은?”
“이후 장군께서 재상직에 다시 올라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날 겁니다.”
이성계의 표정이 풀리자 하륜은 미세하게 웃었다.
“어차피 명과 전면전은 아닐세.”
“한데, 어찌 확신하십니까?”
“명은 압록강을 넘을 여유가 없고, 우리는 요동을 점령할 역량이 안되니까.”
이성계의 말투는 편안했으며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차피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네. 전투는 없어.”
덧붙였다.
“그래서 아쉽다는 거지. 이런 원정은 참전하는 게 재상으로 복귀하고 군부의 입지를 올릴 기회니까.”
하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심 감탄했다.
...단지 뛰어난 장수라고만 생각했는데, 내다보는 정치적 안목도 상당했다.
하긴. 이방원이 누구 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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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중점을 둔 건?”
“동원력과 속도이지요.”
“이유는?”
정도전은 빙그레 웃었다.
“이 나라 고려가 마음만 먹으면 5만 정도는 하루 만에 동원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각인시켜야지요.”
“군웅할거가 남긴 축복이군.”
“도솔천?”
“그렇소.”
“음.”
“아. 하나 더.”
“무엇입니까.”
“요동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알고 있다는 거.”
“하하하. 과연 그렇습니다.”
껄껄대며 웃어대던 정도전은 웃음을 멈추고 진중한 눈빛을 보였다.
“주공.”
“말 하시오.”
“낮은 단계의 가능성으로 명이 압록강을 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없는 가능성이라고 하오. 명의 주력군도 아니고 고작 요동에 주둔한 병력이 무슨 배짱으로 반격하오?”
“그건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오?”
정도전은 눈치를 살폈다.
“명의 숙장 풍승과 남옥이 반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왕선은 손사래를 쳤다.
“불가능하오. 명이 미치지 않는 이상 북원과 나하추를 두고 압록강을 넘지는 않소.”
“···그렇지만.”
계속 말을 끄는 정도전.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전주에서 준비하는 걸 이번에 써먹자는 거요?”
“실은 그렇습니다.”
“됐소. 그건 진짜 확실할 때 사용할 거요.”
“주공.”
“군사. 내 말 잘 들으시오. 지금 작전은 그냥 찍고 돌아오는 것이 다요. 고작 이런 데 쓰려고 전주의 역량을 집결하여 준비시킨 게 아니오. 아시겠소?”
“송구합니다. 단지 싱숭생숭해서 그랬습니다.”
한숨을 쉬는 정도전.
왕선은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면서 물었다.
“요즘 업무가 많아서 그런가 보오?”
“바쁘긴 하지요. 쉴 틈이 없으니까.”
“그러면 전주 가서 쉬시오. 전 선생 올려보내고.”
정도전은 눈을 번뜩였다.
“보약 한 첩 먹기로 했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간단하게 농을 하면서 분위기를 풀었으나 왕선은 관심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랬다. 지금 정도전은 팽팽한 긴장감에 꽉 묶인 상태였다.
그래서 평소처럼 명확한 판단과 다소 도박성이 짙은 승부수를 띄우는 걸 주저하고 있는 거였다.
한마디로 조금 쫄아 있는 거다.
원 역사에서도 요동 정벌을 꾀한 인물이었는데도 이렇다.
이건 곤란했다.
누가 뭐래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긴장하고 있으면 균열이 생길 수도 있다.
해서, 그를 더 다부지게 만들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군사.”
“···예.”
“나는 민본이라는 대업의 끝이 재상 총재제라고 보지 않소.”
“······.”
왕선은 강인한 눈빛을 보내면서 정도전의 손을 꽉 잡았다.
“자주국방.”
정도전의 눈동자가 철렁였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왕선의 손을 덮었다.
“이거 소생이 겁을 먹었나 봅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왕선도 웃으면서
-탁
손을 뺐다.
그리고
“그러면 가서 일하시오.”
정도전의 눈동자가 다시 철렁였다.
-이런 씨...
왕선은 그냥 맑게 웃었다.
< 144화 찔러보기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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