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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43화 (143/187)

< 143화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시끄럽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천하에 사신단을 이렇게 괴롭히는 예는 없습니다!”

그랬다.

이 흉측한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명 사신단의 정사 축맹이었다.

그는 왕선의 선언이 끝남과 동시에 질질 끌려가게 된 거다.

“가서 전해. 지금 이 순간부터 명나라에 보내던 모든 사신 일정을 취소한다고.”

덧붙였다.

“혹시 내가 너를 살려보내는 걸로 허튼 생각은 하지 말도록. 우리 고려는 너희 명처럼 야만의 나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거니까.”

당연히 아니었다.

고려의 서슬퍼런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꼈을 축맹이 남경으로 가서 떠들어대길 바란 거다. 죽여도 좋지만 살려서 잘만 떠들어주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살얼음판이다.

사대부 사신단을 보내더라도 시간 끌기는커녕 요동을 건너지도 못하고 죽을 거다.

그러니 괜한 짓 해서 국격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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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시간 동안 최영은 참 많이도 늙었다.

요즘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더 늙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할 말이 있었네.”

...있었네? 반말?

이거 뭔가 심상치가 않다.

왕선은 자세를 고쳐잡고 최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가. 이제는 낙향해도 되겠는가?”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말이었다.

왕선은 지그시 쳐다봤다.

-참으로 지치는구나.

...진심이구나.

왕선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십시오. 최영 장군.”

“고맙네.”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또한 고맙네.”

흑화하면서 추악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최영의 삶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가치관과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는 했으나 이 나라 고려의 땅을 지키고자 치열하게 쟁투해온 그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최영과 장수 최영의 명암이 엇갈릴지라도 그러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긴 세월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가 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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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이었던 최영이 물러났다.

모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하게 대처했다.

완벽한 왕선의 조정에서 과거의 퇴물처럼 되어버린 그가 있을 자리는 없었기에 예상되었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인적 청산도 함께 이루어졌다.

수문하시중 정몽주와 이성계까지 파직된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최영은 스스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니었다. 일방적인 파직이었다.

그러니까 조정에서 쫓겨난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두 사람의 마음에는 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네. 어찌 함께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 이렇듯 참으로 냉정하게 내친 거다.

그리고 곧장 인사를 단행했다.

마천목과 이옥 그리고 나세를 재상의 반열에 올렸다.

이건 당연히 예상된 흐름이었다.

그런데

[문하시중 최무선]

그리고

[수문하시중 조준]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문하시중은 최무선.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였다.

차후 고려의 국방은 화약 병기를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예상 밖의 결과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가능한 경우의 수이기는 했다.

왜? 최무선은 군웅할거 시절 왕선과 군현 동맹을 체결한 맹방이었으니까.

그런데 조준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그는 파직된 이성계의 제일 군사가 아닌가.

그런 인물이 조정의 집정 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수문하시중에 오른 거다.

그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조준의 인선은 조정이 고려 전역의 지주에게 선전포고했으며, 고려의 모든 사전이 전장터가 될 거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난리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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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표정은 냉랭했다.

“설마 아버님께 상의하지 않은 결정입니까.”

“······.”

“허. 참으로 무도한 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일 군사까지 했던 사람이 이토록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다니.”

도저히 분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조준을 요절낼 기세였다.

“자중하거라.”

“아버님.”

“어쨌거나 지금은 수문하시중이 됐다.”

“수문하시중이 무슨 대수랍니까. 모두 완산공 왕선의 허수아비가 아닙니까.”

“···방원이. 말이 과하구나.”

아차차.

이방원은 이번 언행만큼은 실수라는 금세 깨달았다.

파직당한 이성계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송구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최영 대감은 낙향했고, 포은 숙부님은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이대로라면 영영 기회를 잡지 못합니다.”

“···나 또한 낙향하고 싶구나.”

이방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디로 말입니까. 동북면으로요?”

“내 고향은 그곳이지.”

“아버님. 잊으셨습니까? 전주 이씨는 이미 사분오열됐습니다. 저 승냥이 같은 무리가 언제 이빨을 보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

“아버님. 동북면이 더는 우리 가문의 터전이 아니라는 말씀을 올리는 겁니다. 이미 그곳은 완산공이 보낸 수령들이 빼곡하게 포진하고 있습니다. 최영 대감이 낙향한 철원에도 수령은 있지요. 그러나 우리와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 가문은 다른 군웅과 달리 군웅할거 이전부터 군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버님. 개경에서 재기를 노리셔야 합니다.”

“소생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듣고만 있던 하륜이었다.

이성계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재기할 방법은 없네. 지금 내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장군. 군웅할거가 종식됐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이곳은 전장이 아니라 개경이라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

“군웅할거가 끝난 개경의 싸움은 창칼이 아니라 세 치 혀로 진행됩니다. 즉, 완전한 정치의 장이 열린 겁니다.”

“지금까지는 정치가 아니었나?”

“정치를 가장한 전쟁이었지요. 사병을 올리고 장군, 멍군하면서 말입니다.”

하륜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재기하실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일단 세력을 모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도가 있나?”

“예. 전라도 나주에 염제신 대감을 비롯한 명신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온다면 순식간에 탄탄한 정치력이 확보됩니다.”

“음.”

“소생이 해내 보겠습니다. 장군께서는 포은 사형을 설득해주십시오.”

“포은 선생이라.”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창칼이 없는 조정에서 정책을 두고 토론하며 조정을 움직인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더 큰 게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완산공 왕선의 끝없는 대명 도발. 그건 전쟁으로 직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전쟁에 가장 능하신 분이 누굽니까.”

이성계의 미소가 진해졌다.

“바로 거기서 장군의 영향력은 살아나실 겁니다.”

“자네 말대로 하지.”

지켜보던 이방원은 흡족하게 웃었다.

하륜의 계책이 참으로 마음에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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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눈을 껌뻑이면서 남은을 쳐다봤다.

“이성계가 상소를 올렸다고?”

“예.”

“거. 그건 잘못 안 걸세. 이성계가 무슨 상소를 올린다고.”

“소생도 깜짝 놀랐는데 사실입니다.”

“······.”

“보시겠습니까?”

“혹시 상소 제목이 ‘4불가론’ 이런 거 아닌가?”

“상소의 제목은 ‘대명 전선에 관하여’입니다.”

“자네는 봤지?”

“예. 놀라운 식견이었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상승 불패의 명장이기도 하지만 요동을 경략해본 경험이 있는 무장이니까요.”

“그러면 축약해서 말해주게. 석 줄로.”

“아.”

“어서.”

남은은 멋쩍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요동을 경락한다면 위화도를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시작합니다.”

“됐네.”

“예?”

“시작부터 마음에 안 드는군.”

“아, 알겠습니다.”

“그다음은?”

“예? 아. 예. 기병을 중심으로 요동을 기습 타격하는 최우선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기병이라. 혹시 이성계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하던가?”

“예.”

“허.”

“사실이기도 하지요.”

그 뒤로도 남은의 말은 이어졌다.

왕선은 한참이나 경청했다.

...역시 이성계는 이성계다. 대단한 식견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나오는 그 의도가 중요했다.

뭐. 길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시간 내서 옷깃만 스쳐도 알아낼 수 있으니까.

그때 정도전이 황급히 들어왔다.

“나세 장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합니다.”

대마도 정벌의 소식이 전해졌다.

동시에 요동으로 파견된 밀교원으로부터 서찰이 날아왔다.

펼쳐본 왕선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정도전도 황급히 서찰을 확인했다.

“허. 이거 예상하지 못한 흐름이군요.”

그랬다.

요동의 대군이 나하추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는 거다.

“승패는?”

“나하추의 필패지요. 그는 과거 본국과 요동에서 연이어 패하면서 세력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만일 북원 본국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지도에서 사라질 겁니다.”

“그건 곤란하지.”

왕선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새 남은은 밀교의 서찰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분석했다.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러나?”

“음. 명이 갑자기 공세로 전환한 이유를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그랬다.

분명 명은 섣불리 움직이는 게 부담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수차례 들여다본 축맹의 속내.

[고려 원정 불가. 외교로 굴복시켜야 한다.]

그랬다. 명황제 주원장은 압록강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리 나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어? 갑자기?

왕선이 멈칫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

“과연.”

남은의 감탄사.

왕선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압록을 넘는 건 대외원정이지만 북원과 나하추를 공격하는 대륙 내부의 일입니다.”

남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직 원 잔당이 산재한 상태에서 북방을 공격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입니다.”

“본국과 북원이 본격적으로 손을 맞추기 전에 한쪽을 완벽하게 궤멸시킨다는 거군.”

“예. 소생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막아야지요. 막아야 합니다.”

정도전이었다.

그의 표정은 오랜만에 진중했다.

“그런데 소생이 볼 때 이번 명의 공세는···.”

정도전의 손이 복잡하게 움직이면서 서찰 한 장을 들었다.

“명의 이번 공세는 위협용입니다.”

그것은 처음에 확인한 내용. 그러니까 요동의 병력이 움직인다는 말.

즉, 바꿔말하면 이 말이었다.

요동의 병력‘만’ 움직인다는 말.

아무리 나하추의 세력이 쇠하였다고는 하지만 수성도 아니고 공격을 요동 단독으로 해내기는 어렵다.

결국, 정도전의 분석은 이거였다.

이번에 명은 상대를 궤멸시키는 게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보려는 게 주된 목적이라는 거다.

일리가 있다.

왕선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세 장군이 귀환한다고 했지요?”

“예.”

그러면 됐다.

“곧장 배 끌고 요동으로 가라고 전하시오.”

갑자기?

기병을 급파하여 요동을 압박하는 게 옳은 판단인데?

정도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

“요동에 화포 몇 방 쏴주라는 말이외다.”

“혹시?”

“그렇소. 화포 몇 방으로 본국과 북원의 분명한 동맹을 알리라는 말이오.”

나세가 이끄는 병력은 무려 1만.

수백 척의 군선에서 쏘아대는 화약 병기.

요동은 크게 동요할 거다.

그야말로 절묘한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의 입꼬리는 즐거운 듯 씰룩였다.

“아. 물론 상륙할 필요는 없다고 전하시오.”

“물론입니다.”

< 143화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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