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회귀 or 복귀 >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정도전과 남은 그리고 이옥과 마천목은 자세를 낮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랬다. 이는 진정으로 감축할 만한 일이었다.
중앙집권을 완성하고 사병 혁파를 이뤄냈다.
하여, 사상 초유의 난세였던 군웅할거를 종식했다.
이는 궁예, 견훤을 도모하여 삼국시대를 끝장낸 태조 왕건에 버금가는 압도적인 위업이었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었다.
“군사.”
“예.”
“아직 할 일이 남지 않았소?”
“군웅의 재기 가능성을 완벽하게 짓밟는 것이지요.”
“훌륭하오. 첫 번째 대상은?”
정도전은 히죽이면서 손바닥을 비벼댔다.
“우재 조준입니다.”
과연.
아주 합당한 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성계의 제일 군사로군.”
“예.”
“그에 대해서 평해보시오.”
“우재 조준은 그늘에 가려진 인사입니다.”
“그늘에 가려졌다?”
“예. 참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난세에는 크게 주목받을 수 없는 인물이지요.”
“비슷한 사례는?”
“굳이 예를 찾자면 전 선생과 비슷합니다.”
왕선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하면, 군사보다 뛰어나구려.”
“소생은 전주 목사에 불과했던 주공을 영공전하가 되신 지금까지 보필한 제일 군사입니다. 아무리 깎아내리고 험담하셔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모처럼 도발해봤는데 느긋하게 응수한다.
재미없어졌다.
왕선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세력이 반석에 오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유형의 책사이지만, 난세의 제일 군사로는 적합하지 않지.”
“예. 그래서 첨예한 정략이 오가던 순간에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군웅할거의 종식을 선언한 지금으로서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겠지.”
정도전은 볼을 긁적였다.
왕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왜 그러오?”
“사실 그게 다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력을 가진 인사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전 선생과 비슷하다며?”
“굳이 예를 찾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우재의 정치력은 대단합니다.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요.”
“정확하게 말해보시오.”
정도전이 눈알을 굴리면서 적절한 표현을 고민할 때
“군사와 하륜 선생이 정략에 능하다면 우재 선생은 정통적인 정치력에 특화된 인물입니다.”
남은이 끼어들었다.
정도전이 눈을 부라렸으나, 왕선이 손을 저었다.
“계속 말하게.”
“그러니까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지요.”
왕선은 피식 웃었다.
왜 조준이 지금까지 도드라진 활약을 하지 못했는지 대번에 파악됐다.
“그렇군. 조준 같은 인사가 군웅할거 시절에 할 수 있는 건 개혁이 아니라 안정.”
“정확하게는 과거로 회귀하는 거지요. 거기서 개혁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파격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인사로군.”
“그렇습니다.”
“미친놈이군.”
남은이 답하려고 할 때
“바로 그렇습니다.”
정도전이 냉큼 끼어들었다.
남은이 어색하게 웃었는데, 정도전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거. 제일 군사라는 사람이 왜 그러시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습니까. 원래 소생은 속이 좁고, 남이 나서는 걸 꼴 보기 싫어합니다. 모르셨습니까?”
“허.”
...느낌이 왔다.
지금 정도전은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군웅할거 시절 항상 긴장한 상태로 좌우를 살폈기에 그 나대는 성격을 억지로 숨겼다가 이제는 다시 꺼내는 거다.
...왕선은 알게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군사나 조준이나 과거 회귀를 좋아하는군.”
“무슨 말씀입니까. 소생은 원래 성격이 이런 겁니다. 대국적인 일을 할 때는 항상 진취적이고 능동적이지요. 안정적인 정국에서 개혁하고자 과거로 회귀를 꿈꾸는 조준과 결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그는 대세를 거스르는 인물이 아니지만, 소생은 대세를 만드는 사람이지요.”
“···남은.”
“예. 영공전하.”
“조준을 만나보게.”
“알겠습니다.”
“허. 영공전하. 소생이 만나보겠습니다.”
...무시하고 남은에게 말했다.
“조준에게 제일 군사 준다고 하게. 개혁을 원하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함을 질러대는 정도전.
“음. 소생은 밀려난 겁니까?”
남은이 농을 했다.
그리고 정도전이 또 눈을 부라렸다.
-----
“······.”
“결정하게.”
정도전은 딱 잘라서 말했다.
조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삼봉 선생. 소생은 이성계 장군의 당여입니다.”
“당여하게.”
“예?”
“영공전하는 수렴청정하는 제왕일세. 즉, 문무백관을 통솔하는데 그 속에서 누가 누구의 당여라는 것까지 왜 신경 쓰시겠나? 당여 계속하게. 상관없으니까.”
“······.”
...뭐 이런 경우가 있을까.
물론 정도전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누가 그렇게 보겠는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순진하거나 멍청한 거다.
“삼봉 선생.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예.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이 식어버린 차를 다 마실 동안 생각해보게.”
“예?”
“바쁘네. 할 일은 태산이고.”
“허.”
황당한 표정의 조준.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전은 차를 그대로 마셨다.
그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택하게. 이성계인가. 아니면 이 땅의 개혁인가.”
조준은 머뭇거렸다.
“고생하게.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것이야.”
정도전은 미련 없이 일어났다.
방을 나서려는 찰나
“개혁을 선택하겠습니다.”
정도전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바로 등을 돌려서 말하려다가 멈췄다.
체통을 생각해야지?
얼굴에 미소를 거두고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잘 생각했네. 그런데 조금 늦었군?”
“앞으로는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영공전하의 제일 군사로서 위엄을 보여주고자 목소리를 깔았다.
“지켜보겠네.”
그 모습을 본 조준은 헛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말했다.
“어디부터 손을 보면 되겠습니까.”
“이 나라의 사전. 모조리 박살 내게.”
조준의 얼굴이 기괴하게 틀어졌다.
정도전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주가 이 나라 토지 제도의 가야 할 길이네.”
“전권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겠네.”
“이 나라 고려에 소생과 사전.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겁니다.”
“기대하지.”
-----
“명나라 사신단이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내치게.”
“예?”
“내치라고 했네.”
“그, 그것이···.”
“명나라 놈들은 우리 사신을 사정없이 죽이고 있네. 내치는 거로 감사히 여기라고 하게.”
소식을 전한 관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재상들도 웅성거렸다.
하지만, 왕선은 그 모든 걸 일축하면서 말했다.
“겸사겸사 말하게. 북원과 혈맹을 맺었다고.”
“여, 영공전하.”
“요동 잘 지키라고도 덧붙이고.”
관리는 갈팡질팡하다가 왕선의 단호한 눈빛과 마주하더니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다시 소식이 왔다.
“명 사신단이 압록강을 넘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간청이라.
왕선은 잠시 고민했다.
다시 내치려고 하다가 명나라놈들에게 할 말도 있고 해서 들어오게 해주기로 했다.
“기어오라고 전하게.”
“아, 알겠습니다.”
-----
왕선은 눈을 껌뻑이면서 쳐다봤다.
“아니. 이번에도 자네가 왔는가?”
“소인만큼 명나라 말을 잘하는 역관은 없습니다.”
그랬다.
그는 일전에 축맹이 왔을 때 맹활약한 역관이었다.
왕선은 그의 능력을 떠나서 언행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음. 그건 모르겠지만, 자네가 참으로 재치가 있더군. 앞으로도 이 사람의 일을 잘 거들어보게.”
“영광입니다.”
아주 흡족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선인전의 분위기는 아주 묘했다.
재상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보다 못한 정몽주가 나섰다.
“···명 사신단이 왔습니다.”
그랬다.
지금 선인전에는 명 사신단이 뻘쭘하게 서 있었다.
왕선을 슬쩍 쳐다봤다.
“축맹?”
“···그렇습니다.”
“또 왔소?”
“······.”
“죽으러 온 거요?”
축맹과 명 사신단의 몸은 경직됐다.
왕선은 스산하게 말했다.
“명 황제가 고려의 사대부를 모두 죽였다지?”
죽으라고 보낸 거 맞다.
시간 끌려고.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왕선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명 사신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그 용기가 가상하니 반드시 죽여주지.”
축맹은 입술을 떨면서 겨우 말을 꺼냈다.
“황상 폐하께서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걸 왜 여기서 말하지?”
“영공전하. 황상께서 준엄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내게 말하냐고 물었는데?”
“영공전하. 일단 들어나 보시지요.”
다시 정몽주가 나섰다.
왕선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축맹은 시뻘게진 얼굴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아. 그거 다 읽지 말고.”
“예?”
“석 줄로 요약해서 말하게.”
“!!!”
“안 그러면 돌아가고.”
점입가경이었다.
축맹과 명사신의 안색은 수치심으로 가득찼다.
이번이 두 번째 본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완산공 왕선. 이 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완전히 미친 작자다.
광인과 정상적인 절차를 바랄 수는 없다.
축맹은 애써 위안하면서 이를 갈았다.
“말 안 하나?”
조롱하는 왕선의 목소리.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황상의 위력을 전할 수 있다면 참을 수 있다.
사해를 뒤덮는 위력을 전하면 다시는 저렇게 건방 떨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사해를 뒤덮는 그 위력을 좀 겪어보고 싶으니까 어서 말하게.”
축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면, 왕선은 하품까지 하면서 지루함을 숨기지 않았다.
“···귀국이 우리나라 사람을 참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셨습니다.”
“너희가 죽인 우리 사대부는?”
“···귀국이 평양부를 새로 건설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평양부는 과거 귀국이 꿈꾸던 북진의 전초기지. 물론 귀국의 영토이기에 내정의 일환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 시국에 그곳을 손본다는 건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지요. 즉각 멈추십시오.”
위협이었다.
그러나 왕선은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축맹은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만일 이번 조치까지 어기면 황상의 위력이 귀국을 덮을 겁니다.”
“음흉한 속내? 그거 아닐세.”
“무슨 말씀입니까.”
“거. 정말 답답하군. 저번에도 이런 말을 했는데? 학습효과가 이렇게 없을까.”
왕선은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말을 이었다.
“잘 듣게. 음흉한 속내가 아니라 대놓고 전초기지 구축하는 걸세. 알겠나?”
“!!!”
“정말 말귀가 이렇게 어두워서야.”
왕선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내가 정확하게 양국의 관계를 규정해주지. 그러니까 이번 일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본국은 평양부로 천도하겠다.”
선언했다.
“!!!”
또 선언했다.
“오늘부터 평양부는 서경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일갈했다.
“분명하게 말하지. 너희 사신이 압록강을 또다시 넘을 때는 대 고려국 황상 폐하의 위력에 기겁하여 항복이나 사죄를 청하는 사신단일 것이다.”
충격과 충격 그리고 충격.
정신없이 왕선이 공세적인 선언이 이어졌다.
“아. 너희 명나라가 압록강을 넘고 싶으면 또 하나 더 방법이 있다. 친절하게 알려주지.”
비릿하게 웃었다.
“허구한 날 자랑하는 그 백만대군. 한번 끌고 오도록.”
덧붙였다.
“모조리 격멸해주지.”
군웅할거를 종식한 거인의 한마디.
그 속에는 500년 고려 왕조의 자부심이 또렷하게 담겼다.
< 142화 회귀 or 복귀 > 끝
ⓒ 날아오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