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북진의 전초기지, 평양부 >
윤소종은 소리소문없이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만들어낼 법전은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단적으로 황제 왕우 역시 왕선의 수렴청정이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는 재상 총재제를 이해하고 합의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친정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왕선이 자연사할 수도 있고.
왕선이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혹은 권불십년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랬다.
아직 황제 왕우는 젊다.
해서, 굳이 무리하지 않는 거다.
정신세계가 이상하지만, 힘의 유불리를 볼 정도는 판단력이 있는 거다.
그래서 그는 왕선이 황제국 고려를 잘 건설하고 있는 걸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진정한 황제국이 구축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친정할 수 있으니까.
이러한데 재상 총재제가 공개된다?
정몽주의 세 치 혀가 움직이는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법전이 알려지는 건 상당히 골치 아프다.
그리됐을 때 황제 왕우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직은 황제 왕우가 차선을 선택할 수 있는 세력이 있으니까.
물론, 극복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갈등과 출혈을 유발할 필요는 없다.
바로 그래서 법전은 은밀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재상 총재제의 모든 작업이 공고하게 완성되었을 때 세상에 나와야 했다.
모든 적을 때려잡아서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할 때가 적기다.
바로 그때 재상 총재제 그러니까 입헌군주정을 시행하는 대 고려국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니까.
해서, 왕선은 오늘도 더 나은 고려를 위해서 선인전을 흔들었다.
“펴, 평양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놀라는가?”
“영공전하. 작금의 정세는 실로 엄중합니다. 섣불리 평양부를 손댄다면 명국과의 불화가 심해질 겁니다.”
“수시중.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사대부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사람 속을 터지게 하는 건 이때부터 시작됐다는 다시 깨달았다.
“이미 본국은 명과 불화가 심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정세인지라 전초기지가 될 평양부를 꼼꼼하게 손보겠다는 말이네.”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철 지난 소리는 그만하고 평양부를 잘 가꿀 안건이나 제출하게.”
덧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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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공전하.”
백거마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면서 예를 취했다.
왕선은 눈을 껌뻑이면서 그를 쳐다봤다.
“자네 요즘 살만한가 보군.”
“아이고. 영공전하. 하루도 편히 잘 날이 없습니다.”
“음. 그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몸이 통통 부었는데? 먹고 움직이지 않으면 딱 그렇게 되겠어?”
“이건 하도 욕을 많이 들어 먹어서 생긴 겁니다.”
너스레를 떠는 백거마.
왕선은 싱긋 웃었다.
“남상의 전국 상단화가 아주 잘 진행되는가 보군.”
“봉쇄령이 집행되는 순간 닻은 올렸지요. 강풍이 멎자 군현의 상인들이 따져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찌했나?”
“좋게 대화로 끝나면 합병하고, 아니면 말려 죽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지요.”
“잘했네.”
“이거 혼쭐이 날 줄 알았는데 칭찬을 들어서 다행입니다.”
백거마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불안한 듯 눈알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왕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서역 상인은?”
“아주 활발하게 넘어오고 있습니다. 아. 그들이 미륵 성하를 찾습니다.”
“이런.”
“바쁘시더라도 조만간 한번 내려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음. 별수 없지. 가야지.”
“그러면 이르시지요.”
“역시 눈치가 빠르군.”
백거마는 볼을 긁적이면서 왕선의 눈치를 살폈다.
“영공전하께서 남상의 전국화를 꾀하라는 건 군소 상단을 아사시키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소인이 그러고 있습니다.”
“잘 아는군.”
“한데, 탓하지 않으시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요.”
“아주 잘 아는군.”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백거마는 긴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현재 유례없는 남상의 호황은 왕선이 물심양면 지원해줬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선의 심기를 거스른다? 이건 미친 짓이다.
왕선이 마음만 먹으면 남상을 흔적도 없이 없앨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남상의 자리에 다른 상단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도.
사실 처음 왕선을 만났을 때 철저한 상단의 자율을 보장해주기로 약조했다.
실제로 왕선은 거금을 투자했음에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선은 항상 명확한 선을 그었고 그걸 넘지 않기를 원했다.
일선에서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했으나 백거마는 지키고자 노력했다.
만일 지키지 못하면 왕선도 약조를 지키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최근 남상은 왕선이 설정한 선을 수차례 넘었다.
전국 상단화를 구축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많은 군소 상단을 무력화시킨 거다.
이건 왕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는데 없애지 않아도 될 상대를 제거한 거니까. 이건 단지 남상의 욕심이 빚어낸 일이었다.
“이보게.”
“예.”
“이 사람이 평양부를 좀 가꾸고 싶네.”
“예?”
“나라 사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하네만.”
“아.”
“그곳을 아주 호화로운 도시로 만들고 싶네. 누가 봐도 북진의 웅혼한 기상이 담겨있는 그런 도시 말일세.”
백거마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도시 자체를 뜯어고치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단종원 평양지부도 말고, 화약을 제조하는 기구도 만들고, 수만의 병력이 훈련할 수 있는 장소도 만들고. 수십만의 백성이 살 수 있는 가옥도 만들고, 황상께서 가끔 들릴 수 있는 궐도 만들고. 어떤가?”
“···영공전하.”
“아. 평양부는 원래 서경 시절부터 어지간한 건 잘 꾸려져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백거마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건 잘못했다가는 남상의 기반이 송두리째 뽑힐 수 있는 엄청난 토목 공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랬다가 왕선의 화가 폭발하면 그건 그대로 끝이다.
...그래서 장사꾼답게 도전이라도 해보기로 했다.
“저울이 너무 기울었습니다. 영공전하.”
“그러면 자네가 좀 맞춰보게.”
백거마는 진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지분을 모두 넘겨주십시오.”
“그걸 농이라고 하나?”
“농이 아닙니다. 영공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지분을 백지화하고 싶습니다.”
“음. 내가 투자했을 때 남상은 지역 상단에 불과했지. 그런데 지금 엄청나게 커졌어. 그러면 묻겠네. 내 자산이 얼마나 됐을까?”
“······.”
“내가 지금 그것만 달라고 강짜를 부려도 남상은 근간이 흔들릴 건데?”
“······.”
백거마가 수완을 발휘해서 거래에 나선 건 아주 흡족했다.
그러나 왕선은 남상에 대한 영향력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왕선과 백거마의 차이가 있다.
왕선은 관의 힘을 동원해서 남상을 압박할 생각은 없지만, 대주주로서 위력을 행사할 생각은 아주 많았다.
반면, 백거마는 왕선의 대주주로서 권한은 부채로만 생각하고, 관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평양부 토목 공사는 불가능합니다. 역을 동원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백거마가 강수를 뒀다.
보아하니 정말 어지간하게도 힘든가 보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요역을 동원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다들 어렵습니다. 십시일반 하시지요.”
훅 치고 들어오는 백거마.
무언가 되고 있다는 걸 파악한 그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영공전하께서도 출혈을 감수하시면 일은 순탄합니다.”
왕선은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5할.”
“고려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러면서 황급히 덧붙인다.
“동방 최고의 도시를 원하시면 10할을 투자하십시오.”
“썩 물러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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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과 이성계는 헛웃음을 지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철군하려던 때 개경의 중앙 집권 방침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각지에 수령이 파견된 소식을 접하게 된 거다.
“어처구니가 없군.”
철원도 이미 수령의 손에 넘어갔다고 했다.
최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대감. 어쩌실 겁니까.”
담긴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다.
최영은 볼을 씰룩이며 이성계를 쳐다봤다.
“이 장군. 지금 무슨 말인가.”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모든 힘을 뺏깁니다.”
“···그러나 방법은 없네. 개경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네.”
최영은 정치로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예. 가서 싸워야지요.”
같은 말이었으나 이성계의 입을 거치면서 다른 뜻이 되었다.
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보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대감. 회군하시지요.”
“···철군할 것이네.”
똑같이 병력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천지 차이였다.
“대감. 회군이 옳습니다.”
“이 장군!”
최영이 대갈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성계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감. 소장은 가별초를 넘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북면도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또 보십시오. 유독 이곳만은 수령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완산공은 이 모든 걸 고려하여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해서, 지금 반역을 일으키자는 건가?”
“반역이 아니라 권신을 몰아내는 겁니다.”
이성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최영을 쳐다봤다.
이를 깨물면서 외쳤다.
“대감께서 반 이인임 연합군을 조직하고, 차후 독자적으로 개경을 공격한 것과 똑같은 겁니다. 권신의 손에서 울부짖는 이 나라 고려를 되찾고자 하는 말입니다.”
최영은 충격에 휩싸였다.
힘겹게 이성을 되찾아서 말했다.
“당시의 개경 진군은 대의를 위한 것이었네. 한데, 지금 자네의 개경 진군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이야. 같을 수가 없네.”
“시작은 다르지만, 이 과정과 결과는 같습니다.”
“이인임은 권신이지만 왕선은 수렴청정을 하는 제왕일세! 격이 달라!”
최영은 격한 어조로 토하듯 말했다.
“이 장군. 아무리 사태가 불리하더라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어. 지금 완산공 왕선은 모든 명분을 움켜쥔 사람일세. 회군하는 순간 역적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해.”
“5만의 대군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그만하게.”
“대감과 소장이 함께 하는 전장입니다. 절대 패하지 않습니다.”
“만일 회군하고자 한다면 나부터 무너뜨려야 할 것이네.”
이성계는 핏발선 눈으로 최영을 노려봤다.
“대감께서는 이 엄중한 위기를 회피하시는 겁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말게.”
“기어이 회군을 막으시겠다면 소장은 동북면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을 겁니다.”
“뭐?”
“군웅할거를 촉진할 거란 말입니다.”
최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것까지 막을 방법이 없다.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그때 이지란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두 사람의 언쟁을 들었기 때문일 거다.
“무슨 일인가.”
“개경에서 수시중 대감이 서찰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곧장 이지안에게로 쏠렸다.
이 시국에 정몽주가 서찰을 보냈다면 실로 중대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최영은 빼앗듯 서찰을 받아서 읽었다.
“허.”
그의 입에서 허탈함이 가득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힘없이 서찰을 이성계에게 넘기면서 말했다.
“또 속았네.”
“예?”
“이 장군. 철군하지 않으면 고려 중앙군과 북원, 여진족에게 포위되어 전멸할 것이네.”
다급하게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이성계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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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뻐근한 목을 풀었다.
조금 전 본궐에서 정몽주를 스치듯 만났다.
그리고 그의 속을 들여다봤다.
만족한 듯 웃으면서 읊조렸다.
“파국은 면했군.”
정몽주가 동북면으로 서찰을 보낸 거다.
혹시라도 최영과 이성계가 허튼 생각을 하다가 궤멸하는 걸 우려했을 거다.
말 그대로 격장지계에 제대로 먹힌 거다.
아주 흡족했다.
“이제 남은 건 두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거구나.”
쓸데없이 5만 명하고 각 잡고 싸울 필요는 없다.
만일 역심을 품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된다.
5만 대군은 그대로 가지고.
아주 바람직했다.
< 140화 북진의 전초기지, 평양부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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