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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39화 (139/187)

< 139화 하나씩, 하나씩 >

과거시험 합격자를 치하하는 자리는 왕우가 주재했다.

이는 모든 일의 성과는 군주로 귀결해야 한다는 재상 총재제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참으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완산공.”

“이 모든 것이 황상 폐하의 황은이옵니다.”

왕우는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완산공이 애를 쓴 일이지요.”

“황상께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셨기에 가능했사옵니다.”

사실이다.

고려의 황제가 해야 할 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 엄청난 일을 왕우가 아주 잘 해내고 있다.

해서, 왕선은 진심이었다.

-역시 내관은 완산공이 심어둔 인사로구나. 앞으로 더 자중해야겠다.

갈수록 눈치도 빨라진다.

뭐. 황제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만.

왕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동북면의 일이 걱정인데.

슬쩍 보니 왕우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눈치를 몇 번이나 살피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한데, 동북면은 별 탈이 없겠지요?”

최영과 이성계가 끌고 간 병력이 5만이다.

진짜 독한마음 먹고 회군하면 엄청난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거다.

왕우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탈이라고 하시면 어떤 경우를 이르시옵니까?”

“회군입니다.”

“하오 시면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왕우가 반색했다.

“그럴 일은 없다는 겁니까?”

“음. 그건 신도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완산공.”

“신이 장담하는 건 그들이 회군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다는 것이옵니다.”

“···필승을 자신한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다소 불안한 왕우의 목소리.

아무리 재상 총재제라고 하더라도 황제가 초조하면 곤란하다.

왕선은 확신을 담아서 자신 있게 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완산공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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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최영의 식솔들을 억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소. 뭐하러 그런 짓을 하오?”

정도전의 말을 가볍게 일축했다.

“회군을 막아낼 가장 쉬운 방도입니다.”

왕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오른손을 움직여서 굳은 목을 풀었다.

요즘 무리했는지 뻐근한 탓이었다.

정도전은 재촉하지 않고 왕선의 말을 기다렸다.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

“거. 이번이 마지막이외다.”

“예?”

“언제까지 그들과 기 싸움할 수는 없으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뭐. 그들이 반대할 수는 있소. 그런데 나를 내치려고 덤벼대는 걸 매번 막고 쳐내고 그럴 수는 없소. 시절이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으니까. 해서. 이번에 확실하게 정리하려는 거요.”

정도전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움직였다.

“계속하여 회군을 유도하실 겁니까?”

“회군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는 거요.”

“주공.”

“군사. 생각해보시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정상적인 거요. 그런데 불만을 느끼고 유혹에 빠진다? 그들이 역적이고 이상한 것이외다. 내 말 틀렸소?”

“만일 정말로 회군한다면 우리 피해도 큽니다.”

“다시 말해야 하오? 그걸 잘 준비하는 게 당신 역할이외다.”

“···송구합니다.”

결국, 정도전은 수긍했다.

가끔 이렇게 군기를 잡아줘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다른 논의를 해야 했다.

“군사.”

“예.”

“개경에서 제일 깐깐한 인사가 누구요?”

“어떤 방면으로 깐깐한 걸 이르십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람?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

“윤소종입니다.”

“좀 보자고 전하시오.”

“드디어 윤소종 보시는 겁니까?”

“그동안 바빠서 못 봤는데 이제는 봐야 할 거 같소이다.”

정도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오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 오늘 말고. 오늘은 다른 사람 만나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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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 사신단의 정사 문 하라부카는 개경의 정세를 빠짐없이 살폈다.

참으로 놀라웠다.

최영과 이성계가 이끈 수만의 대군.

더 놀라운 건 현재 대마도 정벌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고려는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진행할 능력이 있다는 분명하게 각인시킨 거다.

유례없는 난세로 인해서 생긴 군웅의 힘을 완벽하게 중앙으로 흡수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정벌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개경의 반대세력을 숙청하지 않았는가.

실로 과감한 정치였다.

외부의 위기로 내부를 단결시키는 건 보편적인 정치 행위였다.

그러나 외부의 위기와 내부의 숙청을 동시에 진행하는 건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다.

이 모든 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경우였다.

실로 굉장한 정치력이었다.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문 하라부카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

마천목이었다.

“무슨 말이오?”

의아한 듯 물어보는 문 하라부카.

마천목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종일 소인이 호위를 섭니다.”

“알고 있소.”

“한데, 거하게 한 상 차려서 술을 드십니다.”

“그래서요?”

마천목은 분통을 터트리듯 말했다.

“소인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술 한잔도 권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대국의 사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심장에 새기고 싶은 명언이군.”

황당한 표정을 한 문 하라부카의 귀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싱긋 웃고 있는 왕선이었다.

“오셨습니까.”

“아. 일어날 필요 없소. 어떻소? 이 사람이 합석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한데, 마 대장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신경 쓰지 마시오.”

“예?”

“배도 고프고 술도 고픈데 앞에서 산해진미를 먹으니 심술 난 거요.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소.”

....대체 뭘 어쩌라는 걸까.

해답을 찾지 못한 문 하라부카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유일한 출구라고 판단한 거다.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왕선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나저나 좀 어땠소?”

“무슨 말씀입니까.”

“그동안 개경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게 있을 거요.”

“그렇긴 합니다.”

“이만하면 답이 되었소?”

그랬다.

왕선이 문 하라부카를 귀국시키지 않고 개경에 잔류시킨 이유.

그건 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다.

자고로 강대한 적을 앞에 둔 동맹은 신뢰로서 강고하게 뭉쳐야 하는 법이니까.

문 하라부카는 미세하게 웃었다.

“오늘부터 본국과 귀국은 동맹입니다.”

“아주 훌륭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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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면에 당도한 최영과 이성계는 여진족 정벌을 진행하기 위한 작전 수립에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주 느긋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영, 이성계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심지어 호발도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간 부족을 제외한 대다수 여진족은 이성계에게 감히 덤비지도 못할 거다.

남은 건 일방적인 승리를 만끽하는 것뿐이다.

개경의 상황이 못내 찝찝했으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호발도만 제압하면 사실상 일은 마무리되겠군.”

“당장은 그렇습니다만, 언제 여진족이 반발할지는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소장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장한 여건에서 가능했습니다.”

“고려의 그늘로 들어오라고 하면 탈이 날 수도 있다는 거군.”

“예. 당장은 군말 없이 따르겠지만 언젠가는 반발할 겁니다.”

이성계의 말대로다.

그동안 고려가 괜히 여진족을 그대로 둔 게 아니다.

싸워서 이기는 건 둘째 문제다. 그들을 완벽하게 복속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형님.”

이지란이었다.

“사신이 왔습니다.”

“사신?”

“예. 그런데 호발도가 직접 왔습니다.”

최영과 이성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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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은 한참이나 석양을 쳐다봤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고려의 내일도 저렇게 아름다울 것이다.

괜히 미소가 지어졌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은 선생.”

호발도였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성사된 거 같다.

“고생했네.”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으니까요.”

“그게 고생한 거지. 자네가 잘 했으니까 별 탈 없이 넘어간걸세. 그 두 분은 의심이 참으로 많거든.”

호발도는 피식 웃었다.

최영은 몰라도 이성계에게 제대로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데, 명과의 관계는 끊어야 합니까?”

사실 호발도는 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전에 이성계와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이유도 명의 지원을 어느 정도 받았기에 가능했다.

“계속 유지하게.”

“고려로 복속된 일로 압박을 할 겁니다.”

“5만 명이 와서 창칼을 휘둘러대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하소연하게.”

“음.”

“별론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어째서 남은 선생은 숨으신 겁니까.”

이미 남은에게 항복했는데, 다시 최영과 이성계에게 항복하는 절차를 거쳤다.

희한했다.

“명분?”

“예?”

“명분 쌓기?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무슨 말이지?

호발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은은 무시하며 양팔을 벌렸다.

“환영하네. 고려의 백성이 된 것을.”

호발도도 고민을 멈추고 화답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저 풍족한 요동을 우리에게 내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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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이라고 합니다.”

윤소종.

그는 정말 깐깐하게 생겼다.

어지간하게 바늘을 찔러서는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 같았다.

“이제 만나게 되었군.”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윤소종은 불교 개혁 상소부터 왕선의 사람이 됐다.

단지, 곁에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만큼 그동안 진행된 고려 정치 지형은 급박했다.

“소직이 무엇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사직하게.”

...사직?

일전에 사대부가 집단 사직상소를 올릴 때 버텼다.

왜? 왕선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았던가.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었다. 그런데 지금 사직하라고 한다.

윤소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절대 순순히 그러겠노라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사직할 거면 그때 했다.

“불가합니다.”

“평양에 적당한 규모의 서원을 하나 마련했네. 거기로 가게.”

...서원? 평양?

이건 뭔가 있다.

윤소종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똑똑한 인사들을 모아뒀네. 자네가 그들을 이끌어 법전 하나 편찬하게.”

...법전?

윤소종은 흥미가 동했다.

“법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왕선은 붓을 들어서 글자를 써 내려갔다.

윤소종은 부지런히 눈을 움직이면서 붓끝에서 만들어지는 내용을 확인했다.

왕선의 붓이 멈출 때 윤소종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영세불변 조종성헌?”

“그렇다네.”

“유교적 법치입니까?”

“아닐세.”

“그러면 무엇입니까?”

“영세불변의 조종성헌. 그 법도 가장 첫 줄에 적힐 내용을 이르겠네.”

“이르십시오.”

왕선의 손은 다시 붓을 잡았다.

“지금 내가 적는 내용이 가장 중대한 원칙으로 정할 것이네. 자네는 부속 내용을 첨부하면 될 것이야. 물론 사전에 내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고.”

붓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마침내 붓이 멈췄다. 윤소종은 조심스레 그 내용을 확인했다.

[대 고려국의 주인은 황제이다. 하여,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서 나온다.]

[대 고려국의 지존은 오직 황제이다. 하여, 황제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대 고려국의 황제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대 고려국은 재상 총재제로 운영된다. 이를 입헌군주정이라고 칭한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가. 천하에 이런 법전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윤소종은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점입가경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황제조차 법도 아래 있다는 걸 명시하게.”

“!!!”

“반드시.”

왕선은 스산하게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미리 말하지.”

어느새 왕선의 손은 칼 근처까지 이동했다.

그런데 윤소종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법전의 초안 작성자에 소인의 이름이 올라갑니까?”

“당연하지.”

“그러면 목숨 걸어보겠습니다.”

“훌륭하군.”

어차피 윤소종은 하기 싫으면 죽어도 안 할 인사다.

그런데 이렇게 나오는 건 아주 바람직하다.

왕선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윤소종은 그 미소에 화답하듯 옅게 웃으면서 물었다.

“법전의 제목은 무엇으로 정하셨습니까.”

왕선은 간결하게 답했다.

“대 고려국 입헌주의.”

이렇게 하나씩 준비해가는 거다.

내 나라의 내일을 위해서.

< 139화 하나씩, 하나씩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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