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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38화 (138/187)

< 138화 중앙집권의 닻을 올리다 >

정몽주, 이방원 그리고 하륜은 충격이 만든 침묵의 바다에 잠겼다.

왕선은 그들의 반응을 즐기면서 천천히 걸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구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고생이라고 할 게 있습니까?”

“고생이지요. 고생이고 말고. 1,000명이 넘는 신지식인을 전주에서 여기까지 데려오는 게 어디 보통 일이오?”

“과찬입니다.”

“일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내려보냈으나 이번은 아니외다. 과거 시험이 끝나는 대로 이 사람의 집에서 거하게 한잔합시다. 전주 이씨의 직계 가주님?”

과거 시험장을 가득 메운 신지식인들을 끌고 온 사람.

그는 바로 전주 이씨의 직계 가주 이문정이었다.

“하하하. 주공. 신지식인만 온 게 아닙니다.”

“오.”

신지식인 뒤로 새로운 인파라 들어왔다.

왕선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저들이야말로 이 나라 고려 통치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사람들이다.

“전 선생의 공이 큽니다.”

그랬다.

이문정이 서원을 통해서 신지식인을 양성했다면, 전녹생은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자체적인 과거 시험을 진행했다. 일전에 그가 백거마에게 종이와 지필묵을 잔뜩 요청한 건 괜한 짓이 아니었다.

전녹생은 이 시험에서 통치에 대한 소양을 가진 사람을 선출해서, 서원과 연계하여 교육했다. 그리고 이번에 올려보낸 것이다.

그 수도 일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녹생이 담당하는 지역에서 철저한 실무를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대동법 등 왕선의 개혁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과거 시험장에는 서원을 나온 신지식인 1,000여 명과 전녹생의 과거 시험을 통과한 1,000여 명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왕선은 싱그럽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여전히 정몽주와 하륜, 이방원은 경직된 상태였다.

얼이 나가도 저렇게 나갈 수가 없다.

왕선은 조롱하듯 말했다.

“나라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사직상소를 거두게 하고, 사대부들에게는 과거 시험을 치르게 할 것인데. 참으로 굼뜨군.”

정몽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향후 20년간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복직할 수 없다.]

그동안 왕선이 던진 말들이 머릿속으로 스쳤다.

...엄포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획된 내용이었다.

즉, 이제 이 나라 고려의 조정은 왕선의 사람으로만 채워진다는 거다.

일찍이 권신이 존재하였더라도 도당의 재상만 장악했다.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까지 장악한 건 아니었다. 단지 권력으로 억압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왕선은 조정을 통째로 삼키려고 하는 거다.

...이건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미증유의 위력을 내게 될 것이다.

온몸이 떨렸다.

“숙부님.”

이방원이 정몽주를 부축하면서 황급히 움직였다.

경황없이 입만 벌리고 있던 하륜이 뒤늦게 따라갔다.

그때 왕선이 그를 슬쩍 쳐다보면서 익살스럽게 웃었다.

“자네 한참 어린 도련님을 주공으로 모시니까 좋나?”

“!!!”

하륜의 눈동자는 거세게 요동쳤다.

왕선은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고생하게. 자네 역할이 정말 중요해. 이방원이 셋째 아들을 낳도록 잘 보필하게나. 알겠지?”

덧붙였다.

“아. 이름은 이도. 잊지 말고?”

참으로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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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이 다급하게 과거 응시장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이미 문은 닫힌 상태였다. 고함을 지르면서 항의했으나 모조리 강제 해산시켰다.

정도전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제왕부로 들어왔다.

“영공전하. 사직했던 관리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왕선은 히죽였다.

“인수인계만 하고 나가라고 하시오.”

“그러면 안 하려고 할 건데요?”

“그러라고 하시오.”

“아주 바람직합니다.”

여기서 더 허튼짓하면 정말로 복직할 수 없거나 가문이 시험을 치르지 못한다는 거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얌전히 인수인계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아주 깔끔한 한판이었소.”

“바로 그렇습니다. 기가 막힌 방도였지요.”

“이대로 나라를 환골탈태시키는 거요.”

“좋습니다.”

“아. 한데, 군사.”

“예.”

왕선은 시선을 슬쩍 돌리면서 말했다.

“주자쟁이들을 다 내쳤는데 괜찮소?”

“그들은 주자를 따르는 학자가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아집에 가득 찬 인사들입니다.”

“앞으로도 과거 시험은 유학 경전이 아니라 실무 중심으로 치러질 것이외다.”

“어차피 그 통치와 실무도 유학 경전에서 나오긴 한 거지요. 그리고 이 난리가 끝나고 안정되었을 때 소생이 주공과 끝장 토론을 할 겁니다.”

정도전은 의욕을 보였다.

왕선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가 되면 내 힘이 너무 강해졌을 건데?”

“우리 이런 대화를 처음에 했지요?”

처음 정도전을 설득할 때 약조했던 말.

초심이 변했을 때 과감하게 칼을 꽂으라고 했다.

너무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실권을 제일 군사에게 줄 것이니 언제라도 그리하라고 했다.

지금 정도전은 그걸 언급한 것이다.

왕선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물론이외다. 그런데 성리학은 이 나라의 중추에 자리 잡을 수 없을 거요.”

“괜찮습니다.”

“진짜요?”

“민본이 목적이지 성리학을 국시로 한 나라가 목적은 아니었으니까요. 소생이 성리학을 고집한 건 성리학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이 절대적인 가치거나 모든 말이 옳다고 본 게 아닙니다. 장점만 취하면 됩니다.”

거짓말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유일 가치로 본 사람이다.

그러나 대동법과 상업의 확장 등이 왕선과 다른 군웅의 위치를 어떻게 바꿨는지 직접 눈으로 봤다.

성리학의 개혁이 아닌 왕선의 개혁을 해낸 전주가 봉쇄령으로서 다른 지역을 압도하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성리학만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고 거짓말이라고 몰아칠 필요는 없다.

왕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진정한 마무리를 해야지요?”

“그래야지요. 에고. 포은과 완전히 척을 지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소이까.”

“나중에 화해할 순간이 오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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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선인전 회의가 열렸다.

재상들은 넋이 나간 듯 힘없이 걸어왔다.

안 그래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보인 완선공 왕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넘볼 수도 없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엄중한 사태에 최영과 이성계가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완산공 왕선이 두 사람을 동북면으로 보냈는지를.

한편,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본 왕선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정말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이럴 때 필요한 거다.

최영과 이성계를 동북면으로 보낸 이유가 과거 시험을 도출하기 위한 거였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정치는 몇 수를 내다봐야 한다.

그리고 행위와 행위는 반드시 얽혀야 한다.

두 사람을 동북면으로 보낸 이유는 호발도를 꾀어내기 위한 것과 과거 시험을 도출하기 위한 것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과거 시험을 도출한 게 조정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한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진짜 이유는 두 사람을 동북면으로 보낸 것과도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바로 지금 그걸 말해주고자 했다.

왕선은 바로 본론을 내질렀다.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완벽한 중앙집권을 구축할 것이외다.”

완벽한 중앙집권?

재상들이 그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말은 이어졌다.

“경산, 원주, 밀양, 순천, 철원, 영천, 남경, 산청에 수령을 파견할 것이외다.”

“!!!”

모두 군웅들의 거점이었다.

특히, 원주는 최영의 거점.

그러니까 군웅할거를 종식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완벽한 중앙집권.

그 말의 의미를 뒤늦게 알았다.

심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곳을 필두로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할 것이외다.”

“!!!”

“이번에 아주 많은 관리를 선출해서 인력은 충분할 것이라고 사료되오.”

전녹생이 가르친 1,000여 명의 관리를 모조리 수령으로 파견할 계획이었다.

누가 나서기도 전에 왕선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일 수령이 돌연사하는 군현이 있으면 그 군현은 지도에서 지워버릴 것이외다. 명심하시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미연의 사태를 모조리 봉쇄했다.

“오늘 이 순간부터 고려는 완벽한 중앙집권화를 꾀하게 되었소.”

그리고 외쳤다.

“황상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 연호를 선창했다.

재상들은 당혹스러웠으니 당장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상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선인전의 만세 연호는 참으로 기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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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공전하!”

제왕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

왕선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 원흉을 쳐다봤다.

“수시중. 또 무슨 일인가.”

“대체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무슨 경우라니?”

“이렇게 갑자기 수령을 파견하다니요?”

왕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권력이 사람을 이렇게 추악하게 만드는군.”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군현에 수령을 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우리 고려는 지난 500년간 중앙이 부족하고 생산력이 낮아서 모든 군현에 수령을 보내지 못했네. 그런데 이제는 여건이 되어서 하려는 건데 왜 반대하나? 왜? 군웅할거가 완벽하게 종식되면 나를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정몽주의 눈썹이 격하게 떨렸다.

손을 꽉 쥔 채로 왕선을 노려봤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그게 아니면 이유를 대봐.”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하면 그 녹봉은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

“이미 선출한 관리를 보내는 걸세. 여기 있으나 내려가나 똑같은데?”

“군현마다 품계를 달리 적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다 신출내기인데 무슨 품계. 일단 보내는 거지.”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지금이 제일 문제지. 그리고 조만간 작은 군현까지 관리할 요충지를 정리할 걸세. 그곳에는 경험이 많은 사람을 보낼 것이네. 이를테면 전주 목사 전녹생? 이렇게 말일세.”

“허.”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정몽주.

...그 꼬락서니가 너무 보기 싫었다.

왕선은 싸늘하게 노려봤다.

“반대할 거면 제대로 하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릇 사대부라면 연좌할 때 도끼도 들고, 진짜 밤새워서 연좌도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아끼지 않고 고함도 지르고, 막 단식도 하고, 한 명 당 서책 100권 분량의 상소문도 올리고, 각지에서 만 명 정도가 수결한 만인소 정도도 해주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조선 시대 사대부처럼?

조롱해줬다.

“지금 고려에 있는 사대부가 무슨 사대부인가? 먹물 먹은 벌레들이지. 안 그런가?”

정몽주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건 사대부가 아니지요. 그냥 정치 모리배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왕선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래서 미리 청소한 걸세.”

“예?”

“그런 게 있네. 그나저나 말 다 했으면 나가주겠나?”

정몽주는 입술을 떨면서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동북면은 왜 관리를 보내지 않는 겁니까?”

“내 마음일세.”

“최영 대감과 이성계 장군의 대군이 진군한 곳이지요. 그래서 그러신 겁니까?”

“자네 마음대로 생각하게.”

왕선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타박하듯 말하던 정몽주가 태세를 바꿨다.

“영공전하. 간곡하게 청합니다. 부디 거두십시오.”

갑자기?

정몽주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이건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제 나름대로 걱정되는 게 있는 것이다.

“영공전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걸 준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2천 명 공부시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정말 힘들었다고.”

“최영 대감과 이성계 장군이 회군할 수도 있습니다. 무려 5만입니다.”

“그러면 완벽한 역적이지.”

“그건 파국입니다. 예.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속도를 늦추십시오.”

“협조 안 해도 괜찮네. 그리고 파국 아닐세.”

왕선의 단호한 답변.

...파국이 아니다?

...설마?!

정몽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볼이 덜덜 떨렸다.

“혹시, 이를 의도하고 계신 겁니까? 그래서 동북면에는 관리를 보내지 않으신 겁니까?”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식은 차를 단번에 마시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자네 말이 맞네.”

“!!!”

“힘들게 공부시킨 사람들 죽을까 봐. 나중에 보낼 걸세.”

정몽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귀로 왕선의 말이 울렸다.

“앞으로는 말해주기 전에 알아내면 좋겠군. 매번 가르쳐 주는 것도 일이라서.”

주저앉은 정몽주는 실성한 듯 읊조렸다.

“회군하면 못 막습니다.”

“나와 북원 그리고 여진족에게 둘러싸여 죽는 거지.”

...여진족까지?

설마 벌써 그들까지 포섭했단 말인가?

정몽주는 어지러웠다.

“···당신이 말한 재상 총재제는 이런 거였습니까?”

큰 실망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왕선은 비웃었다.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끼리 그런 말은 넣어두게. 낯 간지러우니까.”

축객령을 내렸다.

“앞으로도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협잡. 열심히 해보자고. 이만 가보게. 바쁘니까.”

“당신의 재상 총재제가 이런 거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왕선은 간단하게 말했다.

“어.”

< 138화 중앙집권의 닻을 올리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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