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요동, 네가 가져라 >
왕선은 뒷짐을 쥔 채로 국방성을 바라봤다.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앞에는 최영과 이성계가 보였다.
환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고. 이 나라 고려의 국방을 위해서 이렇게 애를 써주다니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최영과 이성계는 불편한 시선으로 왕선을 노려봤다.
“거는 기대가 아주 크오. 기대에 부응하길 바라오.”
대체 노림수가 무엇일까.
이대로 여진 정벌이 감행된다면 이를 기회로 사병 혁파를 완수하려는 계획은 실패할 거다.
...허장성세일까?
최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곧장 동북면으로 떠나길 바라오.”
전격적인 출병을 재촉하는 왕선.
답해야 한다. 그런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도통 잡히지 않았다.
이 순간 최영은 가장 기본으로 돌아갔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군권이다. 그리고 지금은 일생일대의 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결정했다.
“진법 훈련에 참여 중인 내 사병도 데려갈 것입니다.”
“이런. 몇 번을 말하오? 이 나라 고려에는 사병이 없소.”
“그래. 사병은 없지요. 그러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왕선이 쉽게 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철원의 사병이 움직이는 걸 꺼린다는 말이 된다.
최영은 더 고삐를 당겼다.
“데려갈 것이외다.”
“이거 몇 번을 말하오? 병력을 내어드릴 수는 있지만, 사병은 없다는 말이오.”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중앙군. 내어드리리다. 대승만 거두시오.”
...이것도 아니다.
최영은 혼란스러웠다.
“···대체 매번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항상 뜻대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어떤 수작인지 알려드리지요.”
“······.”
“미륵 관심법으로 알았지요.”
“허.”
“상대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니 못할 게 뭐가 있겠소?”
최영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수치심이 치민 것이다.
왕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 궁금해서 말해줬는데 오만상을 찌푸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이오?”
“언제까지 이 사람을 희롱할 생각입니까.”
“거참. 말해줘도 이러시오?”
“오늘을 잊지 않으리다.”
억울하다.
너무 억울했다.
“무운을 비오.”
무시당했다.
왕선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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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봤다.
시원한 밤바람이 그의 얼굴을 쓸었다.
“방원아.”
나지막한 목소리.
돌아보니 하륜이다.
“숙부님.”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러는 숙부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다.”
“···아버님의 사가 앞을 그냥 지나치던 중이었다고 하면 소생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륜은 쓰게 웃었다.
“날 원망하는 것이냐.”
“만일 숙부님께서 그때 진실을 말씀해주셨다면 오늘의 모습은 변했을 겁니다.”
“방원아. 나는 최영 대감의 당여다.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또한, 말해줬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다. 최영 대감의 사병은 진입했으나 태후 마마께서 오등작을 꺼내면서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았느냐.”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방원아.”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숙부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다?
절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가정을 하지는 않았다.
볼수록 보통이 넘는다.
하륜은 이 순간이 묘하게 즐거웠다.
“이유는?”
이방원은 고개를 뒤틀면서 하륜을 쳐다봤다.
“완산공 왕선.”
찰나. 말 그대로 찰나.
이방원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그러나 하륜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조금 더 겸손해질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
“뭐?”
“그동안 천지도 모르고 설쳤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신경도 쓰지 않았던 몰락 왕족 따위가 일국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그를 보면 참으로 많은 걸 느꼈지요. 그동안 내가 한 행동을 보면서 완산공이 얼마나 비웃었을까? 이런 생각도 했지요.”
“한데, 어찌하여 지금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냐. 오늘 네가 내게 한 말은 겸손과는 다르다.”
“그건 숙부님이라서 그럽니다.”
“뭐?”
이방원의 입꼬리를 뒤틀리듯 올라갔다.
그의 눈에는 하늘을 뚫을 자신감과 확신이 담겼다.
하륜은 심장이 울렁였다.
“묻지요. 최영 대감입니까. 아버님입니까.”
“방원아. 무례하구나.”
“아. 선택지는 하나 더 있습니다.”
“뭐?”
하륜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질 때, 이방원의 거만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방원.”
“!!!”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겁니다. 소생에게 두 번은 없을 거니까요.”
이방원은 느긋하게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선택하시지요. 숙부님?”
하륜의 눈이 철렁였다.
“광평군의 복수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자. 어찌하겠습니까.”
점차 이방원의 손이 다가왔다.
하륜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보좌하겠습니다.”
“바람직하군요.”
이방원은 싱그럽게 웃었다.
...이 사람도 이렇게 웃었나?
하륜의 의아함을 느낄 때
“첫 번째 명령입니다. 최영 대감과 아버님은 이 사실을 모르게 하세요.”
“물론입니다.”
“두 번째 명령입니다. 숙부님은 여진 정벌에 참여하지 말고 개경에 남아야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거 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주공을 시험하지 말고 군사의 자격을 증명해보시지요.”
하륜은 묘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완산공 왕선이 무슨 협잡을 할지 모르니 경계하고 있어야지요.”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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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선은 정리된 사병 명단을 살폈다.
“많군.”
“고려 최고의 군웅 두 명이 연합한 겁니다.”
“그래도 정말 많군. 5만이라. 나머지 세력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하오.”
왕선은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정도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만큼 위력이 강하지요. 해서, 최영 대감을 보낸 게 아닙니까. 아군의 강할수록 여진족이 기겁할 거니까.”
“하긴.”
“그리고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사병은 철폐해야 합니다. 수만의 군사를 이끄는 군웅이 있는데 나라가 어떻게 멀쩡하겠습니까. 진실로 사병은 백해무익합니다.”
“뭐. 이번 기회에 모두 마무리할 수 있을 거니까.”
“예. 나머지 군웅을 대상으로 한 진법 훈련도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최영과 이성계가 동북면에 당도하는 즉시 모든 일을 일괄적으로 시행하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대마도 정벌은 어찌 되고 있는지 궁금하군.”
“주장으로 나세 장군, 부장으로 정지, 박위 장군이 갔습니다. 패배는 없습니다.”
“하긴. 점령도 아니고 잠시 찍고 오는 건데.”
“예? 찍고 온다고요?”
“도솔천.”
밑도 끝도 없는 도솔천.
정도전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지긋지긋하군요.”
그러나 고작 이런 반응에 신념을 꺾을 왕선이 아니다.
“나중에 가보면 아주 마음에 들 거요.”
“예. 반드시 가서 듣고 볼 겁니다. 그런데 주공께서 이른 내용이 없으면 용서치 않을 겁니다.”
“격하게 환영하오. 삼봉 보살.”
“막상 갔는데 미륵 성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참 좋을 거 같습니다.”
“아. 그럴 일은 없소이다. 삼봉 보살.”
정도전은 빙그레 웃었다.
“아. 그렇겠군요. 그곳은 미륵 성하께서 창조하신 상상의 세계였지요?”
“······.”
“기대가 큽니다?”
이거 오랜만에 밀렸다.
앞으로 긴장 좀 해야 할 거 같다.
왕선은 코를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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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최영과 이성계의 대군이 출병했다.
그리고 또 얼마 뒤 급보가 전해졌다.
“북원의 사신단이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왕선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런데
“영공 전하!”
집무실까지 쫓아온 정몽주.
정말 요즘에는 저 사람이 꿈에 나올까 봐 무섭다.
“왜 그러나?”
“당장 북원 사신단을 내쳐야 합니다.”
“왜?”
“우리 사신단이 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북원 사신단을 만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몰라서 묻나? 죽겠지. 확실하게.”
“!!!”
“말 다 했으면 물러가게.”
“영공 전하!”
“음. 내가 나가야겠군.”
“목숨을 걸고 막을 겁니다.”
왕선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혹시 연좌를 말하는 거면 격하게 환영하는 바일세. 모조리 오매불망 끼고 도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줄 테니까.”
“!!!”
“기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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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영과 이성계의 대군이 동북면으로 향한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일전에 이성계의 가별초에게 대패하여 죽다 살아났던 호발도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렸다.
“호, 호발도님.”
“무슨 일이냐! 서, 설마 벌써 적군이 나타난 것이냐?!”
다급함이 10할이었다.
그런데 답변은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사신이 왔습니다.”
“사신?”
눈을 껌뻑였다.
“어찌할까요?”
“일단 만나보지.”
“알겠습니다.”
호발도의 볼은 씰룩였다.
“고려의 대군이 경계를 넘어서 나를 공격한다던데 사신이 찾아왔다? 이건 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군.”
“통성명부터 하지. 고려의 대사헌 남은일세.”
“···호발도라고 하오.”
“사지 멀쩡한 거 같아서 다행이군.”
“이보시오. 나를 희롱하는 것이오?”
“희롱이라니. 내가 자네를 희롱해서 뭐하나.”
“됐소. 여기 온 이유나 말씀하시오.”
남은은 빙그레 웃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 기회를 주려는 거니까.”
“내게 기회를 주려면 당장 병력부터 물리시오!”
“최영 대감과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5만의 대군. 감당하기 어렵지. 심지어 자네는 일전에 이 장군에게 대패했으니까.”
“여진의 세력은 아직 강성하오!”
“그래서 내가 찾아온 거지.”
어?
이건 뭔가 있다.
호발도는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귀순하게.”
“!!!”
“그러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야.”
“이보시오!”
남은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 5만의 강병과 싸울 건가?”
“······.”
“기회를 주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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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하라부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왕선과 마주 앉았다.
“아무쪼록 저번에 저지른 결례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의 명장 2명이 5만 대군을 이끌고 떠났소.”
“···들었습니다. 여진 정벌을 한다고요?”
“오. 이제 고려에 사람을 심었나 보군.”
...대놓고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사신단의 정사에게.
문 하라부카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답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귀국에 관한 관심이라고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탓하는 건 아니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혹독한 정세 속에서 외교전과 정치를 해왔던 문 하라부카였으나 이런 상대는 접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오늘 여러 번 당황했다.
그를 또렷이 쳐다보던 왕선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하는 게 좋지 않겠소?”
“무슨 말씀입니까.”
“외교적 수사는 다 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외다.”
“음. 좋습니다. 한데, 본국을 반대하는 관리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아. 연좌하던 사람들? 신경 쓰지 마시오. 조만간 대명 사신단으로 떠날 사람들이니까.”
“예?”
...북원 사신단의 정사 앞에서 대명 사신단을 거론하는 이 사람의 머릿속은 대체 어찌 된 걸까.
문 하라부카는 갈수록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예. 알겠습니다.”
“군사협정을 받아주겠소.”
“예?”
“군사협정 때문에 온 게 아니오?”
“···귀국이 청했습니다.”
“절박한 건 당신들이지.”
“영공 전하. 지금부터는 외교입니다. 정확한 단어와 의미를 사용해야 합니다.”
왕선은 고개를 살짝 틀면서 조소를 날렸다.
마치 비웃는듯한 모습이었다.
문 하라부카의 얼굴에 불쾌함이 올라올 때였다.
“요동을 완벽하게 취하시오.”
조금씩 오르던 불쾌함은 사라졌다.
대신 당혹감이 치솟았다.
“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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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발도는 매섭게 노려봤다.
“결국, 겁박하러 온 거였소?”
“비슷하지.”
“그렇다면 싸워서 내 가치를 증명할 것이외다.”
“한 가지 더 있는데 듣고 판단하게.”
“됐소.”
호발도가 축객령을 내렸다.
“음. 들어보지?”
“배웅은 하지 않겠소.”
“제법 괜찮은 터전이 있네. 거길 주려고.”
“필요 없다고 했...”
호발도는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여진족의 새로운 터전.”
남은은 진하게 미소지었다.
“요동. 어떤가?”
호발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은의 목소리에 담긴 매혹적인 내용이 그의 귀를 지나서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여진족이 요동을 장악할 수 있도록 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네.”
< 136화 요동, 네가 가져라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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