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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35화 (135/187)

< 135화 정벌과 회유 사이(2) >

“왜 그러십니까?”

“아.”

“귀신이라도 보셨습니까?”

왕선은 과장스레 놀란 시늉을 했다.

“드디어 군사가 괴력난신의 존재를 인정하는군요.”

“괴력난신의 최고 존엄이 눈앞에 있습니다. 귀신이 없을 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시비 거는 거요?”

“사실을 말씀드린 거지요. 미륵 성하?”

요즘 정도전의 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특유의 고약한 화법도 튀어나왔다.

“수시중 말이외다.”

“······.”

“거. 포은 정몽주만 언급하면 왜 그렇게 사람이 쪼그라드는 거요? 혹시 돈 빌려놓고 안 갚았소?”

“소생이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됐고. 포은 정몽주는 우리가 여진을 회유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더군.”

“예?”

“이성계를 만난 모양이오.”

“허.”

“아. 이성계한테는 우리 의도가 정벌이라고 말했더군.”

“예?”

반색하는 정도전.

왕선은 손을 내저으면서 일축했다.

“아.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시오. 포은 정몽주는 본인의 정도를 구현하는 것이니까.”

...그렇겠지. 포은 정몽주니까.

사실 아주 잠시 헛된 기대를 품기도 했다.

혹시라도 정몽주가 생각을 다르게 했을까 봐.

정도전은 쓰게 웃었다.

“여진족 회유에 성공하면 고려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한데, 이성계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으면 사실상 어려운 일이지요.”

“다 아는 내용은 그만 떠들고 정리합시다. 수시중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희한해졌으니까.”

왕선은 볼을 긁적이면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정몽주와 이성계. 누구를 바보로 만들지 결정해야겠군.”

“주공.”

“불가.”

“주공.”

“거. 지금 사적인 감정 집어넣어서 어쩌자는 거요?”

“······.”

정도전이 우물쭈물하자 왕선은 비아냥거렸다.

“수시중은 당신 등에 꽂아 넣을 칼을 갈았는데, 군사는 오매불망 바라만 보시오?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됐소. 내가 지금 군사와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니까.”

“······.”

왕선은 정리하듯 말했다.

“포은 정몽주로 하겠소.”

정도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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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전의 공기는 무거웠다.

명으로부터 너무나도 황망한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나. 다시 말해보게.”

“명사신단 전원이 처형됐습니다.”

정몽주는 크게 휘청였다.

재상들이 다급히 그를 잡았다.

“주,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명 황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다른 수를 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정몽주는 핏발선 눈으로 왕선을 노려봤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나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왕선은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새롭게 사신단을 꾸리겠네.”

“영공 전하!”

“이번에 간 사람들의 순번 뒤에도 수백 명의 사대부가 있으니 참으로 든든하네. 이 나라 고려가 직면한 위기에 이렇게 목숨을 던지다니 말일세.”

“기어이 그들을 죽이려는 겁니까?”

“수시중. 말 똑바로 하시게. 그들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명황제가 아닌가.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외교를 했을 뿐이고. 틀렸나?”

“영공 전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과한 처사입니다.”

부들거리는 정몽주를 대신하여 최영이 나섰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어쩔까요? 문하시중 대감?”

“죽을 게 뻔한 사지에 우리 사대부를 계속 보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묻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할까요? 문하시중 대감?”

“···외교를 하려면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최영을 지그시 쳐다봤다.

왕선은 조소를 날리면서 말했다.

“이거 실망이군요. 문하시중이라면 전격적인 북진을 주장할 줄 알았는데.”

“조롱하지 마십시오.”

“참으로 희한하지요. 사대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문하시중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반듯한 사대 외교를 주장하다니. 역시 신념을 이기는 건 권세인가 봅니다.”

최영은 볼이 일그러졌다.

“나 최영. 평생 북진을 신념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전에도 일렀지요? 때는 숨만 쉬고 눈 껌뻑인다고 오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지금 언급한 쟁취는 고려 백성의 목숨을 명 황제에게 던지면서 시간을 끄는 겁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세요. 이건 조정의 반대세력을 탄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지에 던진 것이라고.”

노기가 잔뜩 담긴 최영의 일갈.

그 일갈에는 무척이나 불편한 내용이 담겼다.

모두 왕선이 궁색하게 변명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정치라는 것이니까.

그리고 변명할 때 최선을 다해서 물어뜯을 것이다.

정치는 그런 거니까.

그런데

“그게 잘못이오?”

왕선의 답변은 궤를 벗어났다.

최영이 눈을 부릅떴다.

“뭐가 문제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영공 전하!”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외다. 심지어 가기 싫다는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고 가겠다는 사람을 보낸 거요.”

지금 이 순간 재상들은 왕선이 악귀처럼 보일 정도였다.

“외교라는 방법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고 싶으면 명재상 서희처럼 해보란 말이외다. 그거 아시오? 우리 고려는 서희 이후 단 한 번도 외교에 성공한 적이 없소이다.”

“영공 전하의 외교도 실패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니지. 나는 애초 명과 화해할 생각이 없으니까. 아주 성공적이외다.”

“!!!”

대놓고 사대부들의 목숨을 미끼로 사용할 거라고 말했다.

모두 말문이 막혔다.

“잘 들으시오. 외교의 성공은 세 치 혀로 떠들고 머리를 숙이면서 구걸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의 정세를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면서 시작하는 것이외다.”

“해서!”

느닷없이 정도전이 나섰다.

시선이 쏠렸다.

“여진족을 정벌하고자 합니다.”

왕선이 화답했다.

“외교는 이렇게 하는 것이외다.”

정도전이 덧붙였다.

“총사령은 이원계 장군.”

“이 나라의 모든 기병을 동원할 것이외다.”

이성계의 가별초를 정확하게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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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

국방성에서 나온 정도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등을 돌렸다.

“수시중 대감.”

“됐네. 그런 격식은 치우게.”

“···포은.”

“묻겠네. 대체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라니.”

정몽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여진 정벌을 하려는 건가.”

“말하지 않았는가. 명과의 일전을 대비하여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을 제거하는 게 옳다고.”

“내가 그 명제를 부정하는 게 아닐세. 어째서 회유가 아니라 정벌을 선택했는지 물어보는 것이네.”

“여진족을 회유한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삼봉. 지금 고려는 힘을 낭비할 게 아니라 비축해야 하네.”

“걱정하지 말게. 사대부들이 최선을 다해서 명 황제의 이목을 끌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을 것이네.”

“삼봉!”

정도전의 표정은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정몽주는 한탄하듯 말했다.

“자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된 건가.”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답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네.”

“삼봉.”

“정벌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더는 잡지 말게.”

“반대한다면 어찌할 건가.”

“···이만 가보겠네.”

“이것만 대답하게. 기어이 고려의 힘을 빼는 정벌을 추진할 건가?”

“물론이네.”

“나는 회유라면 동참할 생각이 있네. 다시 생각해주게.”

“···그러니까 할 거면 제대로 하게.”

“뭐?”

“됐네. 회유는 없을 것이니 그리 알게.”

등을 돌린 정도전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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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시중 대감의 말대로 되었소.”

...그게 또 그렇게 된 건가?

정몽주는 쓰게 웃었다.

“···아닙니다.”

“음. 왜 그렇게 표정이 좋지 않소?”

“나라가 어지러운데 좋을 이유가 없지요.”

“대명 사신단 때문에 그러시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성계는 한탄하는 정몽주의 손을 잡았다.

“완산공의 독주를 막을 방법이 있을 것이외다.”

...완산공의 독주라.

한스러웠다. 그리고 한심했다.

그런 괴물과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을 자책했다.

정몽주는 결정했다. 무조건 막기로.

“장군.”

“말씀하시오.”

“최영 대감과는 계속 이렇게 지내실 겁니까?”

“······.”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

“무엇보다 완산공의 독주로 두 분 모두 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합니다.”

정몽주의 간곡한 어조.

이성계는 입술을 깨물면서 쳐다봤다.

“갑자기 그 말을 하는 이유는 최영 대감이 거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군요.”

“예.”

“듣고 판단해도 되겠소?”

“장군. 이원계 장군에게 가별초가 넘어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습니다.”

“사병 혁파는 현재진행형이오만.”

“하지만 완벽한 중앙군은 아니지요. 지금 여진족 정벌은 사병 혁파의 완성을 꾀하려는 완산공의 의도입니다. 대마도 정벌에 동원된 박위 장군과 정지 장군을 보십시오. 모든 힘이 완벽하게 박탈당했습니다. 이제 주요 군웅 중에서 남은 건 장군과 최영 대감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을 통해서 나와 가별초를 완전히 분리하려고 한다?”

“예.”

“대명 선전포고, 대마도 정벌, 여진족 정벌. 이 모두가 완산공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보시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합당합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구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뭉쳐야 합니다.”

“묻겠소.”

“예.”

이성계는 진중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완산공 왕선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소생은 항상 정치하고자 했습니다. 완산공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옳은 말을 한다면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했지요. 해서, 오늘 삼봉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정벌이 아니라 회유를 한다면 거들겠다고.”

“거절했소?”

“예.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건 정치가 아닙니다. 논쟁하고 합의점을 도출하지 않는데 어찌 정치라고 하겠습니까.”

정몽주의 단호함을 확인한 이성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감의 목표를 알고 싶구려.”

“적어도 쓸데없는 곳이 이 나라의 힘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면?”

“여진족을 회유하는 게 옳습니다.”

“음.”

“장군과 최영 대감이 힘을 모아내면 가능합니다.”

...여진족.

그들은 마지막 보루로 남겨둔 세력이다.

그런데 이대로 회유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성공한다면?

가별초와 함께 지금까지 세력을 지탱해온 두 축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이성계의 눈에는 갈등이 치밀었다.

정몽주는 간곡하게 말했다.

“장군. 부디 결심해주십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그들을 동북면에 귀속시킬 방법을 찾겠습니다.”

동북면에 귀속한다?

고려가 아니라 이성계의 밑에 둘 방법을 마련하겠다는 거다.

“약조하시오.”

“소생의 목을 걸겠습니다.”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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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성은 전운이 감돌았다.

재상들의 시선은 정도전이 아니라 최영과 이성계에게로 쏠렸다.

오늘 제대로 단합하기로 사전의 모든 논의가 이뤄진 상태다.

두 사람이 시작하면 모두 동조하기로 한 것이다.

“장관.”

“예. 대감.”

“여진 정벌에 대해서 이의가 있네.”

“전쟁입니다. 이 나라 최고의 무장이신 대감의 고견은 당연히 들어야지요.”

정도전이 승낙하자 최영은 주저 없이 말했다.

“여진 정벌은 이 사람과 이성계 장군이 맡겠네.”

“두 분이 나선다고요?”

“부족한가?”

“그럴 리가요.”

“하면, 동의하게.”

최영은 강하게 압박했다.

물론 정도전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영 역시 이번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지금 여진족 정벌의 군권이 이원계의 손에 넘어가면 사병 혁파는 사실상 마무리되는 것이다.

왜? 유력 군웅 중에서 정벌에 동원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막고자 했다.

아무리 사병 혁파가 진행되더라도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한다.

왕선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

만일 그 전에 사병 혁파가 마무리된다면 더는 방법이 없으니까.

최영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성계를 비롯한 군웅들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좋습니다.”

국방성을 울리는 간결한 한 마디.

...이런 말이 나올 수는 없는데?

기다리던 건 자신의 말에 동의하는 군웅들의 외침이었는데?

최영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 기괴한 한마디를 내뱉은 주인을 찾아서 고개를 틀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정도전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밝았다.

미소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이 나라 고려 최고의 무장이신 두 분이 함께하신다니 참으로 기대가 큽니다.”

최영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당했다.

< 135화 정벌과 회유 사이(2)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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