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정벌과 회유 사이 >
군웅할거가 배출한 두 명이 순식간에 제거됐다.
반대할 수도, 낙향할 수도 없었다.
오직 고개를 끄덕이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작금의 고려 조정에는 선택지라는 게 없었다.
그랬다. 턱밑에 칼이 들어온 느낌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거였다.
“왜 그렇게 죽을상인가? 그토록 염원하던 외교를 하게 됐는데.”
“······.”
“지금쯤 이 나라 고려의 명운을 건 사신단이 압록강을 건너겠군.”
정몽주는 푸석푸석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예?”
“가면 죽을 거 아는데 왜 외교론을 꺼내는 거지?”
“목숨을 걸어서라도 해야 할 일이니까요.”
“뭐. 자결에도 여러 가지 방도가 있으니까. 존중하네.”
“목숨을 걸고 외교에 임하는 것과 자결은 다른 겁니다.”
“잘 듣게. 훗날의 역사는 지금 명나라로 가는 사신단의 외교가 평화를 구걸하는 작태가 아니라 진정한 황제국 고려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야. 이 왕선이 주둥아리만 산 사대부들의 목숨값을 아주 후하게 만들어 준거라고. 알겠어?”
“하나만 묻겠습니다. 작금의 정국은 재상을 탄압하기 위한 겁니까. 아니면, 고려를 위한 겁니까.”
“재상을 탄압하는 게 고려를 위하는 거지.”
왕선은 손을 내저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잘 알 것이네. 더는 이 문제로 왈가불가하지 맙시다. 이 아까운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어떻겠소이까. 수시중 대감?”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툴툴거리면서 궐을 나섰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요? 작금의 고려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
낭랑한 목소리.
퇴궐하던 왕선은 싱긋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이방원이었다.
“오랜만이군.”
“예. 그간...”
“아. 혹시 벌써 셋째를 가졌나?”
이방원의 말을 잘라먹었다.
“아닌데? 벌써 그럴 수는 없는데?”
“···오늘 소생이 찾아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득남할 때 연락하게. 이름은 꼭 ‘이도’라고 하게. 참으로 거는 기대가 크네. 자네 셋째 아들한테.”
...나를 희롱하다니.
이방원의 눈썹이 씰룩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자네 이름이 이방원이라고 했지?”
“예.”
“이성계 장군의 오남?”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조롱이다.
이방원의 눈빛이 다소 사나워졌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 그래서 하는 말일세.”
“예?”
왕선은 터벅터벅 걸어서 이방원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몇 번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내가 너와 푸닥거리할 군번으로 보이나?”
“예?”
“아.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띄엄띄엄 보이느냐고.”
“······.”
“재상도 아니고 재상의 오남 따위가 일국의 제왕을 찾아와서 지껄인다? 지나가는 개가 웃겠는데?”
“···영공 전하.”
“그래. 나 전하야. 그동안 헛짓하는 거 장단 좀 맞춰줬더니 세상이 만만해 보여?”
이방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봐. 누울 자리 보고 누워.”
“······.”
“나한테 하려던 말? 그동안 너무 설쳐서 사죄하러 온 거지? 그래. 그러면 앞으로 좀 조심하자고. 아.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철퇴 들고 설치면 진짜 죽는다. 알겠어?”
왕선의 등을 노려보는 이방원의 표정은 기괴하게 뒤틀렸다.
...반드시.
이를 악문 채로 중얼대더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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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오셨구려.”
“하하하. 이렇게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군.”
정도전은 밝게 웃더니 냉큼 자리에 앉았다.
이성계는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우리가 이렇게 볼 일이 있는지 모르겠소만.”
“장군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내게 청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다?”
“예. 국방성 장관으로서 하는 말이니까요.”
“들어보지요.”
의외로 이성계는 담담했다.
정도전은 빙그레 웃었으나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여진족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면 사용하면 될 일이지요.”
“하하하.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습니까. 이 장군께서 거들어주셔야지요.”
“음. 내가 왜 그래야 하오?”
“고려의 장수로서?”
“그러고 싶으나 내 힘이 미치는 영역이 아니외다.”
“진정 그렇습니까?”
“그렇소.”
정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여진족과 장군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이외다.”
“예. 알겠습니다.”
“한데, 왜 그걸 묻는지 알 수 있소?”
“기밀입니다.”
“······.”
“아. 장군의 영지가 동북면이군요. 그러면 미리 알 자격이 있지요.”
정도전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여진족을 정벌할 생각입니다.”
“뭐, 뭐요?”
“혹시 압니까. 그놈들이 명나라에 붙어먹을지. 그래서 미리 혼을 내주는 거지요.”
이성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도전은 양 손바닥을 비벼댔다.
“이번 작전은 이원계 장군이 맡기로 했습니다.”
“!!!”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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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인가?”
“예. 아는 바를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음. 얼마 전에 이성계의 사가를 다녀왔다던데?”
“그건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갑자기 발길을 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부보상 백달원은 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드나들면서 이성계 장군의 행보를 알아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쓸만한 정보는 넘기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알겠네. 물러가게.”
축객령을 내렸는데 백달원은 눈치를 살피고 있다.
“영공 전하.”
“말하게.”
“전라도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전라도가 삼삼오오 모여 사는 촌구석인가? 문을 어떻게 닫고 열어.”
“그 뜻이 아니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부보상도 남상이나 서역 상인과 거래하고 싶습니다.”
“음.”
“영공 전하. 지금 고려에서 남상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소인을 믿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영공 전하를 보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열어주십시오.”
“좋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만 처리하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진족을 회유할 것이네.”
“예?”
“이걸 하려니까 동북면의 맹주인 이성계의 의중이 중요하거든. 우리가 적당하게 교란을 했으니 그의 심경 변화를 자네가 좀 파악해오게.”
“아, 알겠습니다.”
백달원이 물러나자 곧장 정도전이 들어왔다.
왕선은 힐끗 쳐다보면서 웃었다.
“안 죽었나 보군.”
“살벌하긴 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당황하더군요. 백달원은요?”
“입만 열면 거짓말이더군.”
“오. 의를 지킬 줄 아는 인사군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거지. 그나저나 이원계 장군은 설득한 건가?”
“고민하는 시늉을 하긴 했는데, 결국 수락했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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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어서 오시오. 포은 대감.”
이성계는 환하게 웃으면서 정몽주를 반겼다.
간단하게 안부 인사가 오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대감. 완산공이 여진족을 회유할 생각인 거 같소.”
“여진족을요?”
“그렇소.”
“장군.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외다.”
한참 동안 이어진 이성계의 말을 들은 정몽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삼봉이 와서 여진족 정벌을 일렀고, 백달원의 말에 의하면 회유를 시도한다고요?”
“그렇소.”
“백달원이라는 자는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오랫동안 내 일을 맡아온 인물이오.”
“음.”
“왜 그러오?”
“이건 잘 파악해봐야 합니다.”
“어찌하여 그렇소?”
“삼봉의 말대로 정벌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백달원은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오.”
“백달원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완산공이 그를 이용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음. 일부러 그런다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이성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만일 정벌이라면 나의 동의를 얻는 게 이상하오. 대마도를 공격하는 건 박위 장군과 정지 장군에게 일방적인 명령만 있었소. 이번에도 그러면 될 일을 복잡하게 일을 풀어내지 않소.”
“장군은 여진족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쳐 날뛰는 왜구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음.”
“장군을 설득하면 여진족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으니 접근했을 겁니다.”
“왜 회유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을 회유하실 수 있습니까?”
“음.”
“일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으나 회유는 어렵습니다. 그게 이유지요.”
“그 말이 옳소.”
이성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소?”
“정벌을 막아야지요.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겁니다.”
“그걸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소? 반대하면 역적으로 몰리게 될 건데.”
“소생이 해보겠습니다.”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이성계의 사가를 나온 정몽주는 한숨을 쉬었다.
“이 또한 고려를 위한 길.”
쓰게 웃었다.
완산공 왕선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생 싸워야 할 정적임이 분명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몽주는 자신했다.
이 싸움은 일신의 안위를 위함이 아니라 고려를 위한 것이라고.
해서, 이성계에게 거짓을 말했다. 아니, 거짓을 설득했다.
완산공 왕선은 여진족을 회유하려고 한다.
확실했다. 눈에 보였다. 그런데도 이성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왜? 여진족을 장악하는 건 고려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또 만일 왕선이 그동안 보여준 행보를 보면 여진족 회유가 실패하면 진정 정벌을 추진할 수도 있다.
불필요한 피는 보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는가?
고려를 위해서.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의 싸움은 내일의 일이다.
더 강해진 왕선일지라도 하더라도 싸우면 되니까.
비록 그가 강해지는 데 일조하더라도 고려의 신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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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소생이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남은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생이 적당한 때에 정사를 청했으나 한시가 급하다며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밀사 자격으로요.”
“······.”
“나하추공의 아들 문 하라부카입니다. 주공.”
그 말이 끝나자 문 하라부카의 입이 열렸고 함께 온 역관이 통역했다.
“천하를 진동시키신 고려국의 제왕을 직접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문 하라부카입니다.”
문 하라부카는 빙그레 웃었다.
왕선은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화답하듯 웃었다.
“웃지 마.”
“예?”
“웃지 말라고.”
“!!!”
문 하라부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왕선의 오른손이 움직였고
-차아아아아앙!
서슬 퍼런 칼이 뽑혔다.
문 하라부카의 몸은 경직됐다.
왕선의 입에서는 비릿한 말투가 새어 나왔다.
“분위기 파악 잘해.”
“영공 전하. 어찌하여 이러시는 겁니까.”
“여긴 고려야.”
입술을 고약하게 틀어댔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여, 영공 전하.”
“아직 우리가 네놈들 발가락 핥던 병신으로 보여?”
“!!!”
“당장 개경 밖으로 튀어나가. 정사 자격으로 기어들어 와. 알겠어?”
왕선의 칼이 목을 짓누르고자 기세를 뽐냈다.
문 하라부카는 마른침을 넘기면서 물러났다.
“남은.”
“예, 예. 주공.”
“똑바로 하게. 한 번만 더 이따위로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주공.”
“물러가게.”
< 134화 정벌과 회유 사이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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