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미륵이니라-133화 (133/187)

< 133화 군웅할거가 내린 또 다른 축복 >

“아버님. 고려국이 대명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뭐?”

“정확한 내용입니다.”

문 하라부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겼다.

북방의 실력자 나하추는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본국이 북방으로 밀려난 이후 고려는 꾸준하게 대명 외교를 이어갔어. 그런데 갑자기 선전포고?”

“완산공 왕선이라는 인물의 결정이라고 합니다.”

“완산공 왕선?”

“예. 이인임 이후 고려의 실권자입니다.”

“최영이 아니라?”

“예. 칭제건원부터 대명 선전포고까지. 모두 그의 솜씨입니다.”

문 하라부카는 파악한 고려의 정세를 아버지 나하추에게 빠짐없이 보고했다.

“허. 대단한 배포를 가진 인사로군.”

“예. 사분오열된 고려의 내부 상황을 감안한다면 절대 내릴 수 없는 결정이지요.”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고.”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거 아무래도 그동안 우리 고려에 너무 무심했나 보군.”

“예. 접촉을 다시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큰 성과가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 이참에 대고려 외교를 강화해야지.”

“그렇습니다. 본국에도 사람을 보내서 사정을 알려야 합니다.”

“응당 그리해야지. 이거 잘하면 수세로 일관하는 대명 전선에 일대 변화가 생길 수도 있겠어.”

“예.”

그런데 묘한 소식이 전해졌다.

고려국에서 심양으로 사람이 왔다는 것이다.

나하추와 문 하라부카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정세가 우호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밀사라니.”

속히 데려오게 했다.

그런데

“고려의 대사헌 남은이라고 하오.”

...대사헌?

설마 그렇다면?

두 사람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 남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밀사가 아니라 정사이외다.”

“!!!”

“본국은 귀공과 군사협정을 맺고자 하오.”

“!!!”

“또한, 본국은 대 북원 외교를 정상화하려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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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의 심장부 개경은 살얼음판 같은 정국이 이어졌다.

국방성 장관 정도전은 손에 쥐어진 칼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이건 말이 안 되오.”

“그렇소. 갑자기 대마도 정벌이라니.”

정지와 박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따졌다.

정도전은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그게 아니라 두 분의 사병이었던 병력을 동원한다니 말이 안 된다는 거겠지요.”

“허.”

“벌써 잊으셨습니까? 이제 고려에 사병은 없습니다. 모두 중앙군이지요. 그 첫 번째 역할을 두 분의 사병이었던 병력이 하는 겁니다. 영광으로 아세요.”

“우리가 동의할 거로 생각하오?”

“반대하셔도 됩니다.”

“뭐, 뭐요?”

“반대하세요. 간곡하게 청하는 바입니다.”

“장관!”

격한 내용이 오가는 와중에도 정도전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음.”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그의 손이 멈췄다.

“얼추 봐도 1만 명은 나오겠군요. 뭐.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오합지졸도 아니고 많은 전투를 거친 정예군이 아닙니까. 전라도의 남부와 경사도의 패권을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병사들이니까요. 고작 대마도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차고도 넘치는군요. 음. 남은 건 군선인데 이건 현지조달이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장관.”

“아. 그런데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의미심장한 말.

박위와 정지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나세 장군은 벌써 개경을 나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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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을 혁파한다고요?”

“예. 황상 폐하.”

“음. 가능하겠습니까?”

“불안하시옵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왕우는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인데도 무서운 게 있긴 한가 보다.

뭐. 부친이 암살당하고, 용상에 오른 이후로는 이인임에게 시달렸으니 소심한 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음. 그러고 보니까 이인임 사후에는 다른 사람한테 시달렸구나.

험험.

어쨌거나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희한한 것도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려의 사직을 위협하고 있는 대명 선전포고는 일언반구 하지 않는 거다.

엄밀히 따진다면 그걸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거다.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명나라는 논외로 해야겠지.

...아. 역시 실망하게 하지 않은 인사다.

하긴 이 사람은 실제로도 요동 정벌을 기획했다. 보기보다 배포가 보통은 아니라는 거다.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짐이 완산공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이번 사병 혁파만 성공한다면 이 땅에 더는 고려 황실을 위협하는 무리는 없게 되옵니다.”

“그래요. 그래야지요. 혹시 짐이 할 일이 있습니까?”

“신이 어찌 황상께 불경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음.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세요.”

...다시 친정을 꿈꾸는 걸까?

살짝 불편해졌다.

그런데

-어차피 지금 내가 나서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다. 판이 너무 커졌어. 그러나 너무 잊히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황제의 이름값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분명히 존재하긴 할 거다. 그런데 완산공이 이렇게 완강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지. 아쉽구나.

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외람되오나 신이 청을 하나 해도 되겠사옵니까?”

왕우는 반색하며 말했다.

“얼마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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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진법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고뿔에 걸렸다는 말은 들었네.”

“하하하. 최영 대감. 그걸 소직이 믿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정도전은 미친 듯 키득거렸다.

최영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얼룩졌다.

이번 진법 훈련을 두고 재상들의 논의는 밤새 이어졌다.

무시하자는 의견이 제법 있었으나 지금까지 보여준 왕선의 행보는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짓을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미끼를 던지는 거다.

적당한 무게를 가진 군웅이 불참할 때 정도전이 어찌 나오는지 보는 거로 정리됐다.

만일 어설프게 행동한다면 그걸 분수령으로 삼아서 사병 혁파를 무력화시키자는 계획이었다.

정도전은 양 손바닥을 비벼대면서 말했다.

“지금쯤 심덕부의 사가는 난리가 났을 겁니다.”

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전의 손바닥은 열심히 비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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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멀쩡하던 대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마천목은 광포한 기세를 보이면서 위압적으로 들어섰다.

“죄인 심덕부는 오라를 받아라!”

그 말과 함께 수십 명의 병사가 사가로 진입했다.

안채에 있던 심덕부는 노기를 보이면서 나왔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오라를 받고 아름답게 끌려가면 참 좋을 거 같소.”

“뭐라?!”

“아니면 개처럼 끌려갈 거요. 아무쪼록 이 사람은 당신이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개처럼 끌려가길 바라오.”

...왕선과 정도전에게 물든 것일까?

마천목의 화법은 참으로 얄궂었다.

“나는 지은 죄가 없다.”

“당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죄라오.”

“허. 설마 진법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죄라는 것이냐?”

“바로 그거요.”

“그건 내가 기별했다. 그러니 썩 물러가라.”

“진법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없소. 그리고 기별도 장관께 한 게 아니라 엄한 데다 했던데? 아. 됐고. 어서 선택하시오. 아무쪼록 마지막까지 버티길 바라오. 간곡히 바라오.”

“가, 감히.”

군웅할거 이후 청송에서 제법 성세를 구가하던 심덕부다.

설마 이런 애송이에게 수모를 당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천목의 조롱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질펀한 그의 조롱에 심덕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천목! 작은 권세를 얻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냐! 호가호위라는 말은 바로 네놈을 두고 이르는 것이니라!”

“아주 좋소. 개처럼 끌려오는 걸 선택하다니.”

“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아라. 이 심덕부가 고작 네놈을 감당하지 못할쏘냐!”

“당장 내려오라.”

반말?

심덕부의 이마에 핏줄이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달려가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마천목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너무 흥분해서 조금 늦게 깨달은 거다.

그때 마천목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러섰다. 병사들이 좌우로 물러나고 있다.

“!!!”

심덕부의 눈동자가 출렁였다.

“저, 전하.”

“전하? 누가 전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화, 황공하옵니다. 황상 폐하.”

“어처구니가 없군.”

그랬다.

이 난장판에 등장한 인물은 고려의 지존 왕우였다.

왕선이 실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고려의 주인은 왕우다.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심덕부는 황급히 내려와서 몸을 낮췄다.

“마천목 대장?”

“예. 페하.”

“죄인을 당장 끌고 가시게.”

“어찌 끌고 가면 되옵니까.”

“개처럼?”

“참으로 합당하시옵니다.”

마천목이 손짓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심덕부를 짓밟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우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비록 실권은 없으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얻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지존의 삶이 아니겠는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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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있는가.

작금의 고려는 중간이라는 게 없다.

이건 정치가 아니다. 어떤 합의를 하지도 않고 통보만 하지 않은가.

그랬다. 심덕부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접한 재상들은 충격과 분노로 점철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동이 트자 결국 국방성으로 몸을 움직였고, 진법 훈련에 참여했다.

...그러지 않으면 심덕부처럼 될 거니까. 따지고 싸우더라도 국방성에서 해야 했다.

“영공 전하. 국방성은 어찌 오셨습니까.”

“아. 장관. 방해하려는 건 아니외다.”

“참관하시려고요?”

“아. 전할 말이 있어서.”

“이르시지요.”

“죄인 심덕부의 영지였던 청송은 황실로 귀속되었다는 내용이라오.”

재상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왕선의 의도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사병 혁파를 따르더라도 모든 힘을 잃고, 따르지 않아도 힘을 잃는다.

군웅할거를 통해서 구축한 사상 최고의 힘이 증발하고 있지 않은가.

종래 고려는 개경이 군현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느슨한 중앙집권이 이뤄진 나라였다. 그런데 군웅할거가 펼쳐졌다. 완벽한 난세였다.

그런데 이걸 변형하면 개경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군현을 쥐고 있는 영주의 정치적 생명을 장악한 결과 종래 없었던 중앙집권이 구축되고 있는 것이었다.

군웅할거는 군웅들에게 축복이었다.

그러나 황실로서는 망국적인 체제였다.

그런데 지금 군웅할거가 중앙집권에 축복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 왕선은 이 축복을 만끽하면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침통한 분위기에 빠진 재상들을 돌아보던 왕선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이을지.”

싸늘하게 호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역모를 꾀하고 있었구나.”

“!!!”

“고작 일천의 사병으로 판을 엎으려고 한 그 용기가 가상하다만 여기까지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양백연 장군.”

새롭게 호명된 양백연.

그는 대단한 숙장이었으나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을지가 당신에게 사병이 개경에 당도하는 즉시 장관 정도전을 죽이고 궐을 범하자고 했지. 안 그런가?”

“그, 그것이···.”

“아. 당신은 거절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버벅거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말하게.”

새파랗게 안색이 질린 이을지.

양백연은 입술을 떨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무리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역모를 발고하지 않았으니 죄가 된다.

...그러나 완산공 왕선은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합법적으로 사병을 이동시킬 수 있으니까 지금이 적기라고 하면서. 아닌가?”

양백연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공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자, 장군!”

“하지만, 소직은 무관합니다.”

이을지는 발악하듯 외쳐댔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왕선의 목소리가 담고 있는 묵직한 무게 때문이었다.

“폐하. 그렇다고 하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국방성의 문이 열리고 노기가 가득한 왕우가 보였다.

재상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완산공. 짐은 너무나도 참담합니다.”

“신이 모두 바로 잡겠사옵니다.”

“완산공만 믿습니다.”

황제와 제왕의 철저한 결탁을 눈으로 본 것이다.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역적 이을지를 끌고 가라.”

그리고

“양백연은 역모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발고하지 않았기에 그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영지 합천을 황실에 바치겠습니다.”

“허. 지금 거래를 하자는 건가? 이렇게 대놓고?”

“이, 이렇게라도 진심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허.”

왕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양백연은 초조했다.

여기서 왕선이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끝이다.

최소 귀양이다.

이 시국에 귀양 간다는 건 영원히 재기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참으로 무도한 인사로다.”

...실패다.

양백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참으로 합당한 제안이었다.”

“하, 하면?”

“그 죄를 사하노라. 앞으로도 황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도록.”

“성심을 다할 것입니다.”

왕선은 대놓고 말한 것이다.

고려 황실은 중앙집권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 133화 군웅할거가 내린 또 다른 축복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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