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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륵이니라-132화 (132/187)

< 132화 사병혁파의 닻을 올리다 >

“영공 전하!”

“응? 수시중? 왜 그러나? 숨넘어갈 거 같은데?”

황급히 달려온 정몽주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 거칠게 말했다.

“지금 저들을 죽이려는 겁니까?”

“죽이려는 게 아니라 하자는 대로 한 거지.”

“죽이는 겁니다.”

왕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외교로 해결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렇게 했네. 그런데 또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된다고?”

오만 짜증을 토했다.

“그래. 그러면 수시중이 가겠나?”

“그러겠습니다.”

“그러면 가. 내일 당장. 안 말릴 거니까.”

“예. 당장 가겠습니다. 그 결과까지 조정에서 수용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고생하게.”

“그러니 북원으로 사신을 보내는 걸 멈추십시오.”

“신경 쓰지 말고 명나라 외교나 잘하게.”

“확답을 주셔야 갈 겁니다.”

진중한 눈빛의 정몽주.

왕선은 빙그레 웃었다.

“꼭 보낼 것이야. 해서, 피보다 진한 혈맹을 체결할 것이네.”

“!!!”

“이 꼴을 보기 싫으면 명나라 황제를 최대한 빨리 설득해봐.”

덧붙였다.

“칭제건원의 철회. 이건 절대로 안 할거고. 아. 물론 내가 가지도 않을 것이야. 내가 원하는 조건은 오직 하나. 현상 유지. 심장에 새긴 채로 압록강을 건너게.”

뒤통수를 둔기로 맞아도 이보다는 충격이 덜할 것이다.

정몽주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제 깨달은 것이다. 지금 이뤄지는 왕선의 대명 외교는 사대부의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왕선은 히죽이면서 말했다.

“이제 눈치챘나 보군.”

“···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번에 온 명사신 축맹 말일세. 왜 그렇게 급하게 왔는지 아나?”

“예?”

“고려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단속하러 온 거야. 그놈들은 고려를 두려워하지 않을지라도 북원의 맹방 고려는 두렵거든. 이제 분위기 파악했으면 얌전히 계시게. 아. 사대부들에게 고기라도 좀 대접하고. 당신 말 듣고 연좌하다가 죽게 생겼으니까.”

정몽주는 핏발선 눈으로 왕선을 노려봤다.

“후회하실 겁니다.”

“조만간 삼봉하고 술이라도 한잔하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역사를 울렸던 충신들의 이면을 눈으로 보면서 종종 들었던 생각이 있다.

오늘따라 더 강하게 치밀었다.

...흑화라는 건 참으로 무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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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들은 우와좌왕 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오긴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최영 대감. 혹시 연유를 아십니까?”

“이 사람 역시 들은 바가 없네.”

문하시중인 최영이나 수문하시중인 정몽주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

“게다가 이곳에 모이라고 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렇지. 도당이라니.”

그랬다. 재상들이 모인 곳은 구 도당이 있던 곳이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도당에 와보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지요?”

꿈에도 듣고 싶지 않은 이죽거리는 불편한 목소리.

당장이라도 걷어차 버리고 싶은 인간, 재상들의 적이 모습을 보였다.

완산공 왕선이었다.

“재상들을 모두 소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문하시중.”

최영은 착석하자마자 다시 말했다.

“또한, 장소가 도당이라는 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군요.”

“아. 실은 이곳의 용도를 바꾸려고요.”

“용도를 바꾼다?”

“예.”

왕선은 싱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부터 이곳은 국방성이라고 부를 것이외다.”

“···국방성?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북방의 위협에 맞서 우리 재상들이 논의하는 곳이지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대명 전선의 대책을 논의하는 곳이라는 말이 아닌가.

모두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넘어가기로 했다. 국방성이라는 해괴한 집단에 걸려서 일하게 될 인사만 불쌍할 뿐이다. 그 불쌍한 인사가 자신만은 아니길 바랐다.

그런데

“오늘부터 매일 이곳에서 회의를 진행할 겁니다.”

재상들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만일 단 하루라도 불참한다면 고려의 안위를 위협하는 심대한 도전으로 간주할 것이오.”

고려의 안위? 심대한 도전?

그건 아주 간단한 단어로 집약됐다.

“대역죄로 벌할 것이외다.”

“!!!”

“명나라 황제가 이 나라를 흔들어대고 있소. 이럴 때일수록 우리 재상들이 잘 뭉쳐서 대응해야 하지 않겠소?”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구석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

왕선은 누군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부득이한 사정?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오. 이보다 큰 사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

“뭐. 선인전의 결정에 반대하여 역적질하려는 것 외에 뭐가 있겠소?”

“그, 그건 억지입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

그냥 나오라고.

그래야지 당신들이 헛짓 안 하는지 감시하지 않겠소?

관심법으로 말이야.

불편함은 커졌다.

“다들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요.”

“지금 영공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 강압적입니다.”

“음. 그래서 말할 게 한 가지 더 있소.”

“예?”

왕선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의 시선이 모든 재상을 스쳤다.

“명나라가 본국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소. 충분한 대비를 하고자 하오. 국방성의 첫 번째 역할을 이르겠소.”

오른손 손바닥을 펼치듯 움직였다.

“진법 훈련을 시작할 것이오.”

쉬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왕선의 공세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에 튀어나온 말.

재상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왕선은 쉽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모든 병력을 개경에 집결시키시오.”

구 도당 그러니까 국방성은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선의 말은 이어졌다.

“이번 일을 책임질 사람을 소개하리다. 그러니까 국방성의 장관이오.”

그 말과 함께 인기척이 들렸다.

모든 재상의 고개가 돌아갈 때 왕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하나 말할 게 있소. 국방성 장관의 생모는 노비 출신이외다.”

“!!!”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는데, 재상의 씨는 따로 없는 법이오. 이는 지난 역사가 증명한 것이오. 법도 따지는 걸 좋아하는 재상들이니 이를 문제 삼지 않기 바라오.”

정몽주가 가슴에 품은 칼.

왕선의 최측근 정도전의 비밀을 터트려서 비틀어진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를 먼저 언급했다. 이는 적의 무기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아군의 약점을 없애는 것이다.

과연 정몽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도전은 참담한 시선으로 정몽주를 쳐다봤다.

말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 그런데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락가락했다.

설마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강했다.

...제발 아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포은 정몽주는 진심으로 출신을 거론하여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평생의 벗이라고 믿었던 정몽주가 말이다.

정도전은 입술을 깨물면서 나섰다.

“국방성 장관 정도전입니다.”

불편함. 어색함. 노여움 등.

무수한 감정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도전이 누구던가.

재상들의 불쾌한 시선을 가볍게 내치면서 말을 시작했다.

아니, 선언했다.

“지금 이 시각부터 고려의 사병은 혁파됩니다.”

누군가가 나서려고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선언했다.

“군웅할거는 종결됐습니다.”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것은 거대한 충격이 말문을 막아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충격은 빠르게 흡수됐다. 거센 반발이 일었다.

“누구 마음대로 사병을 혁파한다는 것이오!”

“예. 반대하셔도 좋습니다.”

“뭐요?”

“그리고 낙향하셔도 좋습니다.”

“허.”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정도전은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반대하거나 낙향하면 반드시 반란을 일으켜주십시오.”

“!!!”

“확실한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말입니다.”

느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하나 빼먹었군요. 진법 훈련. 단 하루라도 빠지면 역적입니다. 처음이라서 넘어가거나 공이 있어서 봐주거나 고위관직이라서 눈감아주는 거 없습니다. 안 오면 그냥 처리할 겁니다. 물론, 이때도 반발하셔도 됩니다. 이왕이면 개국 선언을 해주시면 가장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느긋했으나 거침없었다.

정도전의 세 치 혀는 미증유의 위력을 발휘하면서 움직였다.

-짝!

정도전이 양손을 마주쳤다.

그러자 마천목이 문서 꾸러미를 들어와서 올렸다.

정도전은 몇 장을 손에 쥐면서 말했다.

“속이지도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사병은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재상들은 다급하게 자신의 사병이 적힌 문서를 찾았다.

“!!!”

정도전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의 정확한 내용이었다.

...대체 이를 어디서 파악했다는 말인가.

“대단하더군요. 다 끌어 보아내면 족히 10만은 되겠더이다. 대체 이 많은 사병이 어디서 나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군웅할거 이전에 왜구와 홍건적의 공세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보이던데. 어쨌든 애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노력이 지금의 고려를 살찌게 했으니까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재상들의 귀로 정도전의 말은 이어졌다.

“가만히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

“물론 안 그래도 됩니다. 솔직히 이 사람은 그걸 원합니다. 개혁에는 적당한 피가 흘러야 하니까요.”

정도전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천년 고려의 영화. 그것은 이 땅에 똬리 튼 기득권의 피를 먹고 자라게 될 것이니까요.”

“삼봉.”

“수시중 대감. 따로 할 말이 있습니까?”

딱 잘라서 말하는 정도전.

그리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존대.

정몽주는 당황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한다.

“이건 지나친 처사일세.”

“군웅할거를 종식하는 게 지나치다? 그러면 이 난장판을 유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수시중 대감?”

“···그러나 반발이 있을 것이네.”

“그 반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할 겁니다. 음.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지요. 사병이 혁파되었는데 사병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역모를 꾀하고 있는 거지요. 모조리 응징할 겁니다.”

“국방성 장관.”

최영이었다.

정도전은 고개를 틀었다.

“이는 잘 논의해봐야 하네.”

“예. 논의해보십시오. 여러분끼리.”

“뭐라?”

“논의해보고 결정하십시오. 국방성의 시간은 흘러갈 테니까요.”

“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논의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보게!”

노기 충만한 최영의 외침.

그러나 정도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러분들의 표현대로 천하 대국인 명나라가 적대하고 있습니다. 언제 국경이 위태로울지 모릅니다. 예. 최악의 상황은 전쟁이지요. 우리의 사신단이 꾸준하게 명 황제를 만나서 꼬리를 흔들겠지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분명하게 대비해야 합니다. 해서, 지금부터 국방성의 두 번째 일을 일러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일?

재상들의 눈에는 불안함이 생겼다.

“천하 대국 명나라의 공격은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 만백성이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할 때 뒤를 공격당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국방성은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궤를 벗어나도 이렇게 벗어날 수는 없다.

누구도 말하지 못했으나 그들의 속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박위 장군과 정지 장군의 사병이었던 병력을 모조리 투입할 겁니다. 총사령은 나세 장군입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국방성 장관 정도전의 위엄을 지켜보는 왕선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삼봉 정도전.

당신의 염원. 이번에는 꼭 성공하시오.

이번 생에서는 내가 지켜줄 것이니까.

< 132화 사병혁파의 닻을 올리다 > 끝

ⓒ 날아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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